[윤헌식의 역사칼럼] 서애 류성룡이 충무공 이순신을 천거한 배경

윤헌식

임진왜란 직전 서애 류성룡이 충무공 이순신을 천거했다는 말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다시 화제로 삼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이유는 류성룡이 충무공을 천거했다는 말이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이유는 류성룡이 충무공을 천거하게 된 개인적·역사적 배경을 자세히 다룬 글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류성룡이 충무공을 천거했다는 이야기의 사실 여부부터 우선 검토해보자.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약 3년 전인 1589년 1월경 조선 조정은 무신(武臣)의 불차채용(不次採用)을 추진하였다. 불차채용은, 품계를 따지지 않고 그 능력만으로 인재를 뽑으려는 의도에서 시행된 정책이다. 당시 조선 조정이 일본으로부터 침략을 받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느꼈기 때문에, 이에 대비하여 능력 있는 무신들을 뽑아 군사적 요지에 배치하려고 한 것이다.

 

『선조실록』 권23, 선조22년-1589년 1월 21일 기사 1번째 기사

 

비변사에게 무신(武臣)을 불차채용(不次採用)을 한다고 하자,

이산해(李山海)는 손인갑(孫仁甲)·성천지(成天祉)·이순신(李舜臣)...을 추천하였으며,

심수경(沈守慶)은 이경(李景)·신할(申硈)·이용준(李用濬)...을 추천하였으며,

유홍(兪泓)은 이혼(李渾)·왕경조(王景祚)·이용준(李用濬)...을 추천하였으며,

정언신(鄭彦信)은 손인갑(孫仁甲)·성천지(成天祉)·이순신(李舜臣)...을 추천하였으며,

...

 

위 『선조실록』 기사에 따르면 당시 조정의 비변사에 있던 고위 문무 대신들은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무신들을 추천하였는데, 이때 충무공은 좌의정 이산해와 병조판서 정언신의 추천을 받았다. 이 시기 류성룡의 관직은 대제학이었는데, 당시 대제학이 비변사에 참여할 수 있는 관직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류성룡이 누군가를 추천했다는 기록은 위 기사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약 1년 전인 1591년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 기사에 충무공이 전라좌수사에 제수된 기록이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충무공을 추천한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서애 류성룡 영정 - 자료출처: 나무위키

 

『선조실록』 권25, 선조24년-1591년 2월 13일 경진 1번째 기사

 

"전라감사 이광(李洸)은 지금 자헌대부로 가자(加資)하고, 윤두수(尹斗壽)는 호조 판서에, 이증(李增)은 대사헌에, 진도군수 이순신(李舜臣)은 초자(超資)하여 전라도 좌수사에 제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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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실록』 권25, 선조24년-1591년 2월 1일 무진 5번째 기사

 

이순신을 전라좌도 수사로 삼았다. 이때 이순신의 명성이 드러나기 시작하여 칭찬과 천거가 잇따라서, 정읍(井邑)에서 진도군수로 이배(移拜)되어 부임하기 전에 가리포첨사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수사로 발탁되었다.

 

​『선조실록』 기사에 따르면 충무공 이순신은 초자(超資: 벼슬의 품계를 건너뛰어 벼슬을 내리는 것)하여 전라좌수사로 제수되었는데, 어떤 특별한 공을 세워서 초자한 것이 아니므로 추천에 의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 뒷받침하듯 『선조수정실록』 기사는 칭찬과 ‘천거’가 있었다고 언급하였다.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 기사는 충무공을 추천한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충무공이 누군가의 추천을 받고 전라좌수사가 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충무공의 조카 이분(李芬)이 저술한 충무공의 행록(行錄)에 충무공을 전라좌수사로 추천한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을 법도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않다. 류성룡은 자신의 저술인 『징비록』에 충무공을 추천한 사람이 본인이라고 서술하였다.

 

『징비록』, 「체 수군통제사 이순신 하옥(逮水軍統制使李舜臣下獄)」

 

이순신을 처음 추천한 것은 나였기 때문에 나를 좋아하지 않는 자들은 원균과 합세하여 이순신을 공격하는 데 온 힘을 다하였다.

  

『징비록』을 제외한 다른 문헌에서 류성룡이 충무공을 추천한 기록을 찾기 어렵기 때문에 위 『징비록』의 내용을 의심하는 분들도 있다. 류성룡이 자신의 행적을 미화하기 위해 위 기록을 지어내었다고 보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작성된 문헌이 저자 자신의 행적을 윤색하거나 왜곡하는 사례가 적지 않으니 이러한 의심도 이해는 된다.

  

임진왜란 직전 류성룡이 충무공을 추천한 사실은, 엉뚱하게도 정유재란 직전 『선조실록』 기사를 통해 밝혀진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선조실록』 권84, 선조30년-1597년 1월 27일 무오 1번째 기사

 

류성룡이 아뢰기를, "이순신은 같은 동네 사람이어서 신이 어려서부터 아는데, 직무를 잘 수행할 자라 여겼습니다. 그는 평일에 대장이 되기를 희망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주상이 이르기를, "글을 잘 아는가?"라고 하니,

 

류성룡이 아뢰기를, "성품이 강의(强毅)하여 남에게 굽힐 줄을 모르는데, 신이 수사로 천거하여(臣以薦水使) 임진년에 공을 세워 정헌(正憲)까지 이르렀으니, 매우 과람합니다..."라고 하였다.

 

주상이 이르기를, "이순신은 용서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위 『선조실록』 기사는, 다시 전운이 감돌던 1597년 초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조선으로 도해한 일이 조정에 알려진 직후의 일을 기록하고 있다. 가토 기요마사가 도해한 사건이 이후 충무공의 제2차 백의종군의 주요 원인이 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가토 기요마사의 도해는 충무공뿐만 아니라 그를 후원하던 류성룡 또한 정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류성룡은 조정에서 본인이 충무공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했음을 밝히며 그 이유까지 설명하였다. 이 기록은, 임진왜란 직전 서애 류성룡이 충무공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했음을 입증하는 확실한 근거이다.

 

위 『선조실록』 기사의 내용을 고려하면, 앞에서 살펴본 『징비록』의 기록 또한 사실이거나 사실에 가깝다고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원균은 칠천량해전으로 조선 수군을 와해시켰으며, 이후 충무공은 명량해전과 노량해전 등의 승리를 통해 조선 조정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였다.

 

​그러면 류성룡이 충무공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위 『선조실록』 기사에 언급된 바와 같이 류성룡과 충무공은 어릴 적에 한양 건천동에서 살아서 서로 친분이 있었다. 충무공과 류성룡이 서로 친구였다고 소개하는 글도 있지만, 이는 사실로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충무공 이순신의 둘째 형이었던 이요신(李堯臣)이 1542년생으로서 류성룡과 나이가 동갑일 뿐만 아니라 퇴계 이황의 문하로서 류성룡과 함께 동문수학하였기 때문이다. 아마 충무공은 사석에서 류성룡을 '형님'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류성룡과 이요신은 두 사람이 모두 퇴계 이황의 문하라는 점 이외에도 그 친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류성룡은 여동생(1550~1592년)이 한 명 있었는데, 진양정씨 정호인(鄭好仁, 1551~1622년)이라는 사람에게 시집가서 딸 3명을 낳고 1592년에 세상을 떠났다. 류성룡의 매제였던 정호인은 후사를 이을 아들을 낳기 위해서인지 이후 재혼하였는데, 그 재혼 상대는 바로 이요신의 딸이었다. 이러한 통혼 관계가 단순한 우연일 수 없다. 아마 류성룡 집안에서 정호인에게 이요신의 딸을 재혼 상대로 소개했을 듯하다. 이요신이 1580년에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요신의 딸은 아버지 없이 혼인을 치렀다.

 

​충무공의 족보인 『덕수이씨세보』와 정호인의 족보인 『진양정씨공대공파대동보』에서 정호인과 이요신 딸의 혼인 관계가 확인된다. 『진양정씨공대공파대동보』에 따르면 이요신 딸은 생몰년이 을해년(1575년)~갑술년(1634년)이며, 정호인과 혼인하여 5남 1녀를 낳았다. 이를 통해 류성룡과 충무공 가문이 우리가 알던 것보다 더 친밀한 관계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류성룡이 충무공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하게 된 것은 당연히 충무공의 성품과 능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단지 이러한 친분만으로 고위 관직의 천거가 이루어질 수는 없다. 천거로 관직을 받은 사람이 이후 어떠한 문제를 일으킨다면, 그를 천거한 사람에게도 책임이 돌아가므로 천거는 신중하게 시행될 수밖에 없었다. 가토 기요마사의 도해로 인해 충무공이 지탄받게 되었을 때 류성룡 또한 난감한 상황에 몰렸던 사실은, 이를 말해주는 한 사례이다.

 

​조선시대 천거제도는 중종·명종·선조 때 사림이 조정에 대거 진출하면서 상당히 활성화되었다. 비록 이 제도는 대체로 문관 채용을 위한 것이었지만, 임진왜란 직전 무신의 불차채용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천거는 과거제도 같은 공식 관직 임용 시스템과 상충하는 정책이다. 천거제도는 현대의 특채에 비유될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천거제도(특채)가 존치되는 이유는 과거제도 같은 공식 시스템을 통해 선발하기 어려운 인재를 채용하려는 데 있다. 많은 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천거제도는 양날의 검과 같아서 이 제도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 성패가 달라진다. 서애 류성룡은 충무공 이순신의 천거를 통해 이 제도의 필요성을 역사적으로 증명한 셈이다.

 

​조선시대 천거제도는 이글에서 더 이상 자세히 다루기 어려운 방대한 주제이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 자료가 있으니 관심이 있는 분은 참고하시길 바란다.

 

​정구선, 『조선시대 천거제도연구』, 1995년, 초록배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진양정씨공대공파대동보(晋陽鄭氏恭戴公派大同譜)』

『덕수이씨세보(德水李氏世譜)』

 신태영 외 4명, 『판본비교 징비록』, 2016년, 논형

 정구선, 『조선시대 천거제도연구』, 1995년, 초록배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

 

작성 2026.05.15 11:09 수정 2026.05.15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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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