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의 대중가요로 보는 근현대사] 1955 방랑시인 김삿갓

조상을 모독한 죄인, 삿갓을 쓴 김병연

김문홍·전오승·명국환

 



입춘을 지낸 시절이 하수상하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이름 속에 어울려 살아가는 민초들의 심상(心想)과 신상(身上)의 안녕이 간절한 요즈음이다.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그렇다. 이러한 시절에 음유할 만한 유행가는 바로 <방랑시인 김삿갓>이 합적(合適)하리라. 나라가 어지러우면 민초들은 감성적인 유랑객이 된다. 이 노래는 6.25전쟁의 총성이 멈춘 지 2년차이던 1955, 김문홍과 전오승이 노랫말과 가락을 얽어서 명국환의 목청으로 세상에 울려 퍼진 절창이다.

 

<방랑시인 김삿갓>, 노래 속 화자의 실제 인물인 김병연은 1826년 영월지역 백일장에서 장원(壯元)상을 받았다. 홍경래 반란 당시 선천방어사였던 김익순이 반란군에게 투항을 한 죄를 지탄하는 글을 지어서. 답안지를 서술해 갈 그 시간에는 김익순이 자신의 친조부인지를 알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백일장에서 장원한 후 그는 스스로 세상을 등진 삿갓을 쓴 죄인이 되었다. 그는 1807(순조7) 양주군 북한강 근처에서 태어났으며, 5세 때에 청천강유역에서 일어난 홍경래란(181112~18124)이 그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이 노래는 이러한 묘절(妙絶)한 사연을 얽은 곡조다. 1863년 그가 전라도 화순 땅 동복에서 객사를 한지 92년이 지난 뒤의 환생이다.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흰 구름 뜬 고개 넘어 가는 객이 누구냐/ 열두 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 한 잔에 시 한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세상이 싫던가요 벼슬도 버리고/ 기다리는 사람 없는 이 거리 저 마을로/ 손을 젓는 집집마다 소문을 놓고/ 푸대접에 껄껄대며 떠나가는 김삿갓// 방랑에 지치었나 사랑에 지치었나/ 괴나리 봇짐지고 가는 곳이 어데냐/ 팔도강산 타향살이 몇몇해던가/ 석양지는 산마루에 잠을 자는 김삿갓.(가사 전문)

 

https://youtu.be/a97CNmX1mHY

 

홍경래란 이후 그의 가문은 역적 집안으로 전락되어, 멸족(滅族)을 우려한 부친이 형과 함께 황해도 곡산으로 보내 노비의 집에서 숨어 살게 한다. 이후 여덟 살에 폐족(廢族)으로 사면되어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아버지와 동생이 죽고, 홀어머니의 손을 잡고 여주·가평·평창을 거쳐 영월에 정착하였다. 여기서 그의 어머니는 집안의 내력을 숨기고 아들 김병연을 글공부에 몰두시킨다. 이처럼 숨어살던 김병연이 20세 되던 1826년 봄, 영월관아에서 실시한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으며, 이 장원 시제(詩題)가 바로 친할아버지 투항죄를 지탄하는 것. <논정가산충절사 탄김익순죄통우천>(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 정가산의 충절 사망을 논하고 김익순의 죄를 하늘이 울만큼 통탄하라. 홍경래 난(1811~1812)은 서북지방출신 사람들의 인사등용 불이익에 대한 반기를 든 난. 홍경래·우군칙을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반란, 이때 가산 군수가 정저(鄭著)이고 그의 아버지는 정노(鄭魯)였다. 이때 반란군에게 끝까지 저항한 정서에게 내려진 호가 정가산이다.

 

김병연(김삿갓)은 일필휘지로 답설(答說)을 써내려갔다. 김익순의 한 번 죽음은 죄에 비하여 너무 가벼우니 만 번 죽어 마땅하다는 역설로 1. 장원상장을 들고 짐으로 돌아와 뒤늦게 어머니로부터 집안내력 자초지종을 들은 김병연은 조상을 모독한 죄를 하늘에 부끄럽게 여기며 삿갓을 쓰고 방랑을 시작한다. 그 무렵이 22세경이며, 이후 35년을 방랑하면서 스스로 김란·난고·이명이라는 호를 사용하며 기시(奇詩)를 남긴다. 그는 짙은 해학과 풍자를 담은 시를 속세에 뿌렸고, 풍자시·영물시·연정시 등 1천여 편을 남겼다. 그는 1863(철종13) 57세로 동복현(화순군 동복면) 달천변에서 방랑시인의 삶을 마감했으며, 훗날 둘째 아들 익균(장남은 형에게 양자를 줌)이 유골을 수습하여 영월군 하동면 노루목에 장례하였다.

 

<방랑시인 김삿갓>을 부를 당시 31세였던 명국환은 1933년 황해도 연백에서 출생하였으며, 중학교 3학년 때 노래자랑 콩쿨에서 남인수의 <남아일생>을 불러 3등을 했다. 이후 19506.25전쟁 발발로 강화도로 피난을 했다가 해병특공대에 입대하여 전투도 하고, 위문공연도 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 후 1954년 전오승의 <백마야 울지마라>로 데뷔했으며, <내 고향으로 마차는 간다>, <아리조나 카우보이>등으로 인기를 얻었다.

 

영월군은 2020년 기준 세대수 21천여 가구, 총인구 4만여 명의 산골 읍이다. 군 나무는 소나무, 꽃은 철죽, 새는 까막딱따구리다. 조선 단종(端宗)임금 장릉(莊陵)이 있으며, 김삿갓면에 김병연의 묘가 있다. 영월하면 동강(東江)이다. 1457년 계유정난(수양대군이 단종 보좌 원로대신 황보인·김종서 등 수십 명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의 주인공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노산군으로 격하시킨 후 영월 청령포로 유배를 보낸다. 이때 호위대장 금부도사가 왕방연이다. 왕방연(王邦衍)은 단종임금을 청령포 동강 건너에 유배하고 강을 건너와서 회한을 읊었다.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청구영언>·<해동가요>·<병와가곡집>에 실려 있다. 구전돼오던 것을 1617년 김지남(15591631, 조선중기 문신)이 정리한 시다. 운명을 역행하는 것도 하나의 운명이다. 운명과 숙명은 인간의 관점에서 구분 지은 것이고, 신의 관점으로 보면 같은 맥락이다. 시인은 일탈자다. 시인은 보통명사를 고유명사로 만들며, 생명이 없는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고, 사람과 신의 중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김병연, 김삿갓은 운명과 숙명을 합친 삶을 살다가 간 일탈자였다.



[유차영]  

솔깃감동스토리연구원장

음유시인 / 문화예술교육사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2.05 20:17 수정 2020.02.05 20:27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편집부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1/1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Shorts 동영상 더보기
대청의 그거 왜 해?
광주루프탑카페 숲안에 문화복합공간 #로컬비즈니스탐험대 #우산동카페 #광주..
2025년 4월 25일
2025년 4월 25일
전염이 잘 되는 눈병! 유행성 각결막염!! #shorts #쇼츠
2025년 4월 24일
2025년 4월 23일
2025년 4월 22일
나는 지금 '행복하다'
2025년 4월 21일
2025년 4월 20일
2025년 4월 19일
2025년 4월 18일
2025년 4월 17일
2025년 4월 17일
2025년 4월 16일
2025년 4월 15일
2025년 4월 14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3일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