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자년 쥐해를 맞아 논픽션과 픽션을 통해 쥐와 인간의 생태를 좀 살펴보리라.
우리 동양의 육십갑자(六十甲子) 지지(地支) 가운데 쥐띠가 왜 제일 먼저일까. 병자(丙子)년 1936년생 쥐띠로서 나는 자문해본다. 쥐는 가장 영리한 동물이라고 생물학자들은 말한다. 유사 이래 인류와 쥐 사이의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는데, 쥐를 잡기도 어렵지만, 온갖 쥐약조차 큰 효력이 없어 쥐가 독약을 먹고도 생존하는 확률이 높고 더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란다. 또한 쥐의 번식률이 놀라워 인간이 쥐를 잡아 죽이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새끼를 치는데, 암컷 한 마리마다 일 년에 네 번씩 한 번에 다섯 마리부터 스물한 마리까지 낳고, 이 새끼들은 또 제각기 4개월이면 제 가족을 갖게 되며 이들의 새끼들은 4개월 후엔 또 다른 새끼들을 친단다.
따라서 뉴욕만 해도 뉴욕 인구와 맞먹는 숫자의 쥐가 서식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2차대전 당시 독일이 쥐를 이용, 전 유럽에 전염병을 퍼뜨릴까 봐 걱정했듯이 9.11사태 이후 미국정부는 알카에다가 쥐를 통한 병균을 확산시킬 것을 우려, 전전긍긍했었다. 그래서일까 미국의 1962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존 스타인백(John Steinbeck 1902-1968)은 그의 작품 ‘생쥐와 인간(Of Mice and Men,1937)’에 등장하는 인물 레니를 통해 우매한 인간의 비극을 너무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작은 자기 집과 농장을 갖겠다는 소박한 꿈을 좇는 두 떠돌이 일꾼의 비극적인 이야기다.
조지와 거인의 몸과 힘을 가졌으나 어린애의 두뇌를 갖고 사고만 치는 레니가 오페라 막이 오르면서 경찰로부터 쫓기고 있다. 둘 사이가 언제나 그렇지만 조지는 화를 내고 기분이 상한 레니는 불퉁스럽다가 화해한다. 레니가 귀여워하다가 실수로 죽인 생쥐 한 마리를 조지가 빼앗아 던져버리자 레니는 항의한다. 자기가 쓰다듬을 수 있고 감촉이 부드러운 것들을 사랑한다면서. 그러자 조지는 레니를 달랜다. 앞으로 다른 애완동물을 구해주겠다고. 그 후로 강아지 한 마리를 얻어 기르게 되는데 레니는 또 다시 부주의로 그 강아지를 죽게 한다. 그뿐더러 그는 농장주의 바람끼 있는 아내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다가 그만 그녀까지 죽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선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레니가 기다리던 조지가 나타나자 둘 사이의 화내고 삐치고 화해하는 의식적인 순서를 밟은 후 목장주와 일꾼들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놀라는 레니를 조지가 안심시킨 다음, 어차피 그들에게 레니가 린치당해 죽기 전에 조지가 레니를 총으로 쏴 죽인다. 일종의 안락사로. 둘이 꿈꾸던 집과 농장이 저 멀리 보인다고 레니가 상상하는 순간에 총소리를 듣고 농장주와 일꾼들이 몰려들면서 막이 내린다.
이 작품에서 레니는 우리 모두를 대표하고 있지 않을까. 뭔가를 또는 누군가를 너무 사랑하다가 사랑하는 대상을 죽이고 마는 우리 자신들을 말이다. 지나치게 사랑한다는 것이 상대를 질식시키고 만다는 엄중한 교훈을 주고 있는 것 같다. 부모자식, 부부, 애인, 친구 간에는 물론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도. 아, 그래서 예부터 우리말에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음이라고 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