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선의 시를 걷다] 임진강

금단의 땅으로 거침없이 내리는 노을을 바라보다

가파른 물길을 지나  하루가 저무는

강 하구로 강물이 흐르고 시간도 흐르는데

세상의 길들은 땅위에서 끝나고

저 너른 바다로 흘러간다.

강가를 나는 새들의 순결한 날갯짓이

바람을 가르며 어슷어슷 가로막은 산들을

지나 저 금단의 땅으로 거침없이 날아드는  

임진강의 겨울 저녁 앞에 서서 노을을 바라보았다.  

자유의 운명이 자유처럼 흘러가는 강물은

여전히 말이 없고 날아가는 새들도 말이 없다

 

붉은 노을은 내리고

겨울은 깊어 가는데

강은 여전히 세상의 향기를 뒤로 하고

유토피아를 향해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귀순하지 않은 이념은

시공 속을 넘어 저 편으로 돌아앉아

낡은 세월을 묶어 놓고 철책선의 날선 못을 잡고

쓸데없이 강의 안부를 걱정하다가

나는 문득 저 산을 열고 싶었다.

저 순연한 강을 열고 싶었다.

나는 하찮은 아픔을 아파하며

오랫동안 강이 되고 싶었다.





겨울산의 까만 뒤통수를 밟고 올라온 달에선

아직도 이성적이고 서늘한 햇볕 냄새가 났다.

이성은 현현한 저녁달로 차갑게 빛나고

이성은 경건한 저녁달로 하늘을 받드는데

저 몽매한 풍경을 편애한 나의 이성이

흘러가 가 닿는 곳에 임진강이 흐르고 있었다.

사물은 사소하여 아무런 욕망이 없는 뿐인데

나는 혼자 마음속을 들락거리며

저 달을 묶어놓고 자연과 인간사이의

경계를 만들고 있었다.



시대의 변방이 이러했을까.

증오도 시대를 벗어나면

진정한 사랑이 된다는 믿음은 모순이다.

시대는 늘 현실이라는 기차를 타고

몇 십 년을 줄곧 달려와

이곳 비무장지대의 비실비실한

이념의 허무로 주저앉아 버렸다.

시대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희망이라 해도

두려움과 상처로 묵은 고통은

어쩌면 이라는 기다림일지 모른다.

진정 그럴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기다릴 것이다.

 

단지,

세상의 바깥에 구원이 있다고 말하지 말자.

인간은 희망을 끌고 나가는 절망의 대리인일 뿐,

불우한 자들의 낙원은 지뢰라는 단 하나의 문장으로

여기 이렇게 처절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 미세한 문체 속에서 인간은 농락당하고

현실은 화해를 거부하고 버림받고 있었다.

단호하게 지뢰라고 써 논 저 철조망 안에서

인간은 나약하고 허망한 존재로 타락한다.

지뢰는 사물과 인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착한 짐승들만이 주어로 빛나고 있었다.



옛 고랑포 나루터 뒤편

남방한계선 가까운 곳에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신라의 땅을 떠나 말없이 누워 있었다.

그도 현대사의 흔적을 온몸으로 받았는지

비석은 총탄에 맞아 여기 저기 패이고

쓸쓸한 망주석이 세월을 풍화시키고 있었다.

육이오라고 말하는 모든 이들의 상처가

천 년 전 죽은 경순왕도 비켜가지 못하고

비무장지대의 풍경이 되어 있었다.




이 나라에 가장 참혹하고 가여운

우상을 만들어 낸 반공과 방첩은 저처럼 처연한 형상으로

이 들판 한 가운데에 두 발이 묶여 서 있었다.

지금도 누군가의 김신조는 여전히 휴전선을 넘고

청와대로 진격해 공산당의 우상이 되려는 꿈을 꾸고 있을지 모른다.

간첩 김신조의 침투 경로에 떡하니 만들어 논 형상들은

따질 수 없는 시간의 굴레만 뒤집어쓰고 서서

민통선 새들과 다람쥐들의 벗이 되어 놀고 있었는데

낮게 내려앉은 하늘가로 겨울바람이 휑하니 몰려왔다 몰려갔다.




살아서 스스로 아름다운 운명이여

나무마다 한 생 벗어 놓은 껍질이 쌓이고

푸득 푸득 재두루미가 날아갈 때마다

바람의 음률이 빈 들판으로 퍼지면

마른 갈대가 서걱서걱 흔들린다.

가오우, 가오우

누군가를 불러대는 재두루미 소리는

들판을 지나고 비악산을 넘어 북녘으로 사라져갔다.

스스로 아름다운 운명의 새들이여

희디흰 겨울 하늘에 꾸불꾸불 몇 자 적어

네 등에 매달아 더 멀리 날아 보내고 싶다.

아름다운 네 운명처럼

내 희망에게도 이름을 붙일 수 있게…….

 

겨울 민통선에 가면

하늘의 길들은 저마다 북녘으로 뻗어 있다.

가까스로 몇 갈래의 하늘 길을 따라

기러기들이 날아가고 적막에 휩싸인 먼 산을

팔짱을 끼고 쳐다보니 삶을 껴안은 마을마다

겨울 안개가 내려 침묵으로 덮여가고 있다.

지난 것들을 다 덮어 버리는

겨울 안개는 온 세상을 떠돌다 돌아 온

기러기들의 고백을 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저무는 강가에 서면

부끄럽지 않은 나이를 헤아려야 한다.

스스로 강물이 깊어진 깊이만큼

강의 소리가 강의 슬픔을 지우는 울음인 것을

불안하고 위태로운 상실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웅웅웅 흐르는 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늘과 강이 맞닿은 임진강 언저리에서

나는 나이를 헤아리지 않아도 되는

유순한 어린아이가 되었다.

 

 

너라는 추상과

나라는 관념이

아득한 그리움으로

종결짓는 강은

생명이며 사랑이다

그러하기에

모든 생명들이 몰려들고

모든 그리움들이 몰려든다.

저 평화의 생명을 낚고 있는

오리 떼들처럼

그대여 강으로 가자

그리움의 강으로 달려가자

끝도 버리고 시작도 버리고 나니

세상을 향해 묵념으로 여윈 저 강은

마침내 그리움이 따뜻한 물결로 피어난다.

연민도 버리고 침묵도 버리고 나면

삶은 강물같이 흐르고 흘러 바다에 닿는다.

막막한 세상 어디 한번이라도 맨발로

저 흐르는 강물을 건너 본적 있는가.

신발창에 달라붙어 따라온 질퍽한 삶을

강가에 부려 놓는다.




서문강 기자
작성 2018.08.13 11:41 수정 2018.08.22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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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