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의 항간세설] 인간도처유청산(人間到處有靑山 )이 되려면

 

 

요즘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으며 수상하고 있다. 아마도 지구와 자연의 대표적인 기생충이라 할 수 있는 인류를 각성시키고, 그중에서도 큰 기생충들에게 복수하는 작은 기생충들에게 카타르시스(catharsis)를 제공하기 때문이리라.

 

인생 순례자들은 모두, 사상가 토마스 모오(Thomas More 1478-1535)의 공상적 이상향 유토피아(Utopia 1516)’의 신기루를 좇고 있는 것 같다. 이 잡히지 않는, 좇아가면 좇아갈수록 멀어지는 신기루를 좇다 기진맥진 지쳐 쓰러져 숨진 사람이 부지기수이리라.

 

그러나 때로는 신기루 같은 이 환상적 환영이 잠시 현실로 나타나기도 한다. 물론 현실이란 것 자체가 일종의 환상이라면 환상이겠지만 말이다. 그 한 예로 아시아에서는 한반도가 그렇듯이 유럽에서는 폴란드의 경우를 들 수 있다. , 서로 갈린 양극 사이에 위치한 나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폴란드가 근년에 계속 뉴스의 초점이 되어온 것처럼 상반되는 양극 사이에서 고뇌하고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영화 화면을 통해 사실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2013년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BIFF)에서 안제이 바이다(Andrzej Wajda 1926-2016)바웬사인간(Walesa: Man of Hope)’이 상영되었.. 지금으로부터 39년 전 같은 감독이 만든 철의 인간(Man of Iron, 1981)’에 단역으로 출연한 바웬사는 반세기 전 (19701113) 스물둘에 분신한 전태일과 달리 47세에 대통령까지 되었다. 1943년생으로 그의 70회 생일을 맞아 만든 영화라고 한다.

 

1926년생인 바이다는 16세부터 레지스탕스로 평생을 오로지 저항영화인으로 살아왔다. 30여 년 간격으로 만들어진 이 두 영화는 둘 다 1980년 노동운동을 다뤘지만 이번 영화는 바웬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초등학교와 직업학교밖에 다니지 않아 읽은 책이 하나도 없다며 자신은 소위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전혀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 너무도 신선하다. 민주화운동이 강성일변도의 지식인이 아닌 순수 노동자가 앞장서 타협을 통해 협상에 성공해 1983년의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고 1988년 민주 선거에서 연대의 압승을 이끌어 낸다.

 

기생충처럼 1981년 칸느 영화제에서 황금종려(Palme d’Or)상 등을 수상한 철의 인간은 허구와 현실이 전적으로 통합된 역사 그 자체란 평이었다. 이 영화는 바이다 감독이 1976년 제작 감독한 영화 대리석 인간(Man of Marble, 1977년 방영)’의 속편으로 2차대전 직후의 낙관적 희망이 50년대 스탈린 공포시대를 겪고 냉소적인 부정부패로 무산되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40년대에 정부 당국이 생산 목표를 초과 달성토록 노동자들을 독려키 위해 한 벽돌공을 충격용원모범노동자로 뽑아 국민의 영웅으로 치켜세워 이용한 후 그를 반동으로 몰아 그는 투옥되었다가 행방불명이 된다.

 

대리석 인간에서 이 벽돌공의 생애를 한 젊은 TV방송국 여기자가 추적한다. 그리고 철의인간이 이 스토리를 이어간다. 심층취재에 나선 이 여기자는 도처에서 침묵의 벽에 부닥친다. 그러다 실종된 노동자의 아들을 만나게 되고 방송국에선 해고되며 그 아들과 결혼한다. 여기자가 찾던 노동자 영웅은 1970년 그디니이 의거 때 사살된 사실을 알게 된다. 독학한 이상주의자였던 아버지와는 다른 배경과 견해를 갖고 아들은 그단스크 레닌 조선장 노조파업을 주도한다.

 

한편 비밀경찰의 사주를 받은 알코올 중독자인 라디오방송 기자가 이 파업 지도자에 대한 흑색선전을 편다. 파업을 야기한 일련의 사건과 파업의 종국적인 승리가 등장인물들의 시각과 관점에서 조명되고 있다. 1970년 파업 현장을 몰래 찍은 뉴스필름이 어느 한 파업노동자를 경찰이 구타하는 장면을 생생히 보여진다. 담뱃불을 붙이기 위해 잠시 구타를 중단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당시 폴란드 정치와 경제개혁의 주역인 자유노조의 지도자로 대통령에 당선된 바웬사도 등장, 이 영화의 주인공 결혼식에 증인으로 사회를 본다. 억압적 이데올로기를 고발하는 이 감동적인 영화는 예술과 역사를 통합한 걸작 명화로 길이 남을 것이다.

 

안제이 바이다의 동적인 드라마 대리석 인간철의 인간에 비해 그의 후배 크지슈토프 자누시(Krzysztof Zanussi)가 감독한 영화 불변수(The Costant Factor)’는 실제 인물과 사건들을 통해 일반 도덕, 윤리적인 문제들을 냉철하게 분석한 작품으로 1980년 칸느영화제에서 최우수 감독상을 받았다. 이 영화의 제목 불변수는 주인공 젊은이가 그의 여가에 하는 공부, 수학적 개념뿐이 아니고 마르크스주의 윤리에 집착한 사회에서 변치 않는 어떤 항구적인 도덕적 가치 기준을 추구하는 그의 집념을 뜻한다.

 

이 영화는 1980년 폴란드의 그단스크 파업 사태를 통해 드러난 사회의 도덕적 파산 상태를 부각시킨 역작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부패한 사회 풍토에서 개선될 희망이 없지만 자신도 타락하기를 거부한다. 직장을 얻으려면 또 죽어가는 가족을 병원에 입원시키려면 꽤 영향력 있는 빽이나 줄 아니면 뇌물을 제공할 수 있는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 젊은이는 알게 된다. 전시 광고 대행회사 직원인 그는 그의 동료들이나 상사가 모두 제 직무수행보다 각자 제 주머니 챙기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동조하지 않는 그는 결국 희생되고 물러난다.

 

수학적인 은유를 계속 음미하면서 젊은이는 그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는 확률을 계산해 보고 있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카오스의 혼돈과 암흑세계를 지나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코스모스를 좇는 코스모폴리탄 아니 코스미안의 궁극적인 비전은 찬란할 수밖에 없으리라. 비록 이 순례자의 지로역정(地路歷程) 아니 천로역정(天路歷程)이 고달프고 고통스럽더라도....

 

여기서 우리 인간(人間)’이란 한자 풀이를 해보리라. ‘인간이란 한자어는 인생세간(人生世間)’이 줄어든 말로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는데 그렇다면 인간도처유청산(人間到處有靑山)’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려면 우린 모두 사랑이란 무지개를 타고 지상에 잠시 놀러 온 코스미안임을 깨달아야 하리라.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2.20 11:54 수정 2020.02.20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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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