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의 항간세설] 사랑은 헛되지 않으리(Talk not of wasted affectiuon)

 



2013214일 창간호를 낸 뒤 계절마다 나오는 계간 <홀로>는 연애하지 않는 사람을 문제 있는 미완의 존재로 보는 연애지상주의를 깨는 잡지란다. 연애를 하지 않는 삶이 얼마나 자유롭고 풍요로운지를 설파한 칼럼, 사랑과 소유욕의 역설적 관계에 대한 사유와 함께 자취요령, 혼자 하는 여행 등 모태홀로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담는단다. <홀로>의 발행인 이진송 씨는 사랑 자체를 부정하거나 모두 솔로가 되자는 건 아니라며 연애와 비 연애를 우열 관계로 볼 게 아니라 삶의 한 형태로 평등하게 보자는 것이란다. 자유연애는 1910년대 개화기, 서양에서 수입된 인위적 문화에 불과하다고 그녀는 본다.

 

시집 한 권, 술 한 병, 빵 한 덩어리에 그대가 내 옆에 있으면 더이상 바랄 것 없다는 지상낙원을 노래한 서력 12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오마 카얌은 근본 궁극적 신비 속에 싸인 수수께끼를 풀 길 없는 우리의 절망감을 술로 달래자고 이렇게 읊었다.

 

어제 이날 이때의 광증(狂症)이 생겼어라.

내일의 침묵 또는 승리의 개가(凱歌)나 절망의 비가(悲歌)

, 마시자.

어디서 우리가 왔으며 왜 왔는지 모르나니

어서 마시자.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알 수 없나니.

 

그 한 예로 영국 시인 딜란 토마스(Dylan Thomas1914-1953)를 들 수 있으리라. 특히 죽음과 종교와 섹스 그리고 사랑의 여러 가지 무드와 스타일로 무아의 황홀경에서 부르짖는, 고음으로 오르기도 하고 비통 침울한 저음으로 침잠하기도 하는, 언어의 발음과 발성에 매료되고 집착했던 그는 미국 순회강연 도중 39세로 그의 삶을 일찍 마감했다. 당시 검시관의 진단서에 기재된 사망 이유는 그가 하룻밤에 스트레이트로 위스키를 연거푸 열여덟 잔이나 마신 ㄱ의 두뇌에 대한 모욕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살아서 쓴 시 그리고 죽음이 지배하지 못하리라

(And death shall have no dominion)’에서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미칠지라도 그들의 정신은 말짱할 것이오,

바다에 빠져도 그들은 다시 떠오를 것이오;

연인들은 없어져도 사랑은 남을 것이오;

그리고 죽음이 지배하지 못하리.

Though they go mad they shall be sane,

Though they sink through the sea they shall rise again;

Though lovers be lost love shall not;

Aad death shall have no dominion.

 

마치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함을 앎이로다. (로마서 69) 했듯이. 술에 취했던 성령(Holy Spirit)에 취했든 간에, 주정뱅이, 협잡사기꾼, 식객이었던 건달 딜란 토마스도 예수처럼 그가 살아생전에 꿈도 못 꾸던 영광을 누리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의 산문과 희곡을 통해 유감없을 정도로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탕진한 시인으로서 게걸스런 그의 영혼은 성령에 취했든 안 취했든 간에 성신(聖神)의 거룩한 제단에 펼쳐지는 시심(詩心)의 향연에 참석하게 되어 흔희작약(欣喜雀躍) 하였으리라. 영국 런던 템즈 강가에 자리한 웨스트민스터 성당 시인의 코너에 한 자리를 차지, 그의 기념비가 1982년 그것도 그에 못지않게 방종 방탕했던 바이런 경의 기념비 옆에 건립되었다.

 

이렇게 이슬 먹고 구름똥 싸며 바람처럼 살다 간 자유인(free spirit)’들은 그렇다 치고, 우리 평범한 속물들은 어쩌랴. 삶의 다른 한쪽 죽음을 의식하고 사는 것 이상의 종교도, 죽음을 안고 사는 삶을 더할 수 없이 잘살아보는 것 이상의 예술도, 사랑으로 숨 쉬고 사는 사랑 이상의 삶도 없으련만

 

정녕 그 어느 누구와 만났다 헤어지는 것이 그 어느 누구의 뜻과 섭리에서인지 알 길 없지만, 사랑의 사자(使者) 큐핏의 수많은 화살을 운 좋거나 아니면 나쁘게도 용케 맞지 않는 사람들은 어쩌며, 운수 대통인지 아니면 운수가 사나워 이 사랑의 화살을 한 가슴에 너무 많이 맞고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의 깊은 상처는 그 누가 다스려 아물게 해줄 수 있을까. 이 사랑의 독침을 맞은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실연의 가시덤불 속에서 남몰래 소리 없이 몸부림치면서 온몸으로 피눈물 흘리고 있으리라. 붉은 피가 창백해지도록.

 

이 쓰도록 맵도록 새콤달콤한 사랑의 미약(媚藥)을 맛보고 사랑의 마술에 한 번 걸리면 이 마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랑만을 위해서 살든지 죽든지 하라는 사랑의 절대적인 지상명령을 거역할 수 없게 되나 보다. 사랑과 삶이 또 죽음까지도 연인들에게는 같은 이상, 같은 현실, 같은 진실의 삼위일체가 되는 것. 그렇다면 이 어인 일일까.

 

장밋빛 인생은 가시덤불

장밋빛 사랑은 꿈속의 사랑

 

이것이 정말 사실이더냐. 참말로 그렇다면 어째서일까. “삶에는 방정식이 없다. 오직 무늬만 있을 뿐! 만약 방정식이 존재한다면 그동안 수많은 수학자나 과학자들이 평생을 다 바쳐서라도 복잡다단한 공식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삶은 살아보지 않고서는 답을 얻을 수 없는 미스터리다. 제일 큰 미스터리는 어떻게 정신이 육체 속에 들어오는 가다.” 이렇게 재미동포 시인 정명숙 씨는 (미주판 중앙일보 2014215일 자) ‘삶의 무늬라는 칼럼에 쓰고 있다. 2014년 발렌타인스데이 214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날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1만여 커플에게 결혼생활 비법을 전수(傳授)했다는 보도가 있었고 또 그 언젠가 그의 전임(前任) 교황이 남편이 아내를 강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는 기사를 봤다. 결혼도 안 해본 주제에 뭘 어찌 안다고. 차라리 실수하고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무사무고(無事無故)의 백지답안을 내놓기보다는 할 수 있는 대로 한껏 인생을 탐험하고 경험해보겠노라고 말한 이탈리아 여배우 소피아 로렌한테서 좀 배울 일이지. “있는 자에게는 더 좀 줄 것이오. 없는 자에게서는 있는 것까지 빼앗으리라는 예수의 말이 정말 용용 죽겠지참으로 원통, 절통한 일일 것이다. 인생 무대에서 제 노릇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언제나 그 어느 누구의 대리 노릇이나 하는 꼭두각시 인생의 비애가 아닐까. 여기서 우리 칼릴 지브란의 경구(警句) 하나 들어보자.

 

눈처럼 흰 종이 한 장이 말했다.

눈처럼 흰 종이 한 장이 말했다.


순결하게 나는 창조되었으니 영원무궁토록 나는 순결하게 살리라. 내 몸에 더러운 것이 가까이 오거나 검은 것이 내 몸에 닿는 것을 참고 견디느니 차라리 나는 불에 타서 하얀 잿가루가 되리라.”

 

잉크병이 이 말을 듣고 그 시꺼먼 속으로 웃었다. 그리고 그는 종이에게 접근조차 안 했다. 종이가 하는 말을 들은 색색이 색깔의 여러 가지 색연필들도 또한 종이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다.

 

눈처럼 흰 종이는 순결하고 정숙하게 영원토록 있었다.

순결하고 정숙하게. 그러나 외롭고 공허하게.

 

Said a sheet of snow-white paper

 

Said a sheet of snow-white paper,

“Pure was I created, and pure will I remain for ever.

I would rather be burnt and turn to white ashes than suffer darkness to touch me or the unclean to come near me.”

 

The ink-bottle heard what the paper was saying, and it laughed in its dark heart; but it never dared to approach her. And the multicoloured pencils heard her also, and they too never came near her.

 

And the snow-white sheet of paper did remain pure and chaste for ever pure and chaste and empty.

 

From THE FORERUNNER(1920) by Kahlil Gibran(1883-1931)

 

옳거니, 고통을 당할 바에는 사랑 때문에 넘치는 사랑 때문에 받는 고통 이상 또 뭣이 있으랴. 사랑이 가능만 하다면 사랑이 절로 샘솟기만 한다면 어떤 수난이나 고통도 감미롭기 때문이지. 이 세상 그 어느 누구에게도 너무 많이 줄 수 없는 것이 세상에 사랑 말고 또 있으랴. 아무리 주고 또 줘도 그 더욱 주고 싶고, 아무리 받고 또 받아도 그 더욱 받고 싶고, 결코 주는 데 지치지 않고 받는데 싫증 나지 않는 것이 세상에 사랑뿐이리라. 그리고 하다못해 짝사랑인들 어떠랴. 미국의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ollow 1807-1882)의 말처럼.

 

사랑은 흐르는 샘물같이

비록 목마른 이의 갈증을

풀어주지 못하는 때에라도

흘러흘러 바다로 가다가

날씨가 가물기라도 하면

홀연히 온데간데없이

없어져 자취를 감추지만

증발한 샘물은

결코 없어진 것 아니고

저 푸른 하는 떠도는

한조각 구름 되었다가

빗물로 쏟아져 내려와

그 샘을 그 더욱

넘치도록 가득 채우지.

 

Talk not of wasted affection,

affection never was wasted,

If it enrich not the heart of another,

its water returning

Back to their springs,

like the rain

shall fill them

full of refreshment;

That which the fountain sends forth

returns again to the fountain.”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2.28 10:41 수정 2020.02.28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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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