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예술의 세계 명작들은 저 하늘의 별들과 같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명작들도 보고 읽는 사람들에 따라 그 내용들이 달리 해석되는 것이리라.
대우주 가운데 먼짓가루 하나보다 작은 이 지구라는 별의 억만 분의 한 쪼가리도 못 되는 서울 북한산을 오르다 보면 동물 모습을 한 바위들을 만난다고 한다. 보는 각도와 느낌에 따라 곰으로 보이기도 하고 돼지나 물고기 또는 새로 보이기도 하듯이 말이다.
미술이나 조각품은 제쳐 놓고라도 문학 작품들 가운데서 명작 중의 명작이라는 것들조차 시대와 사람에 따라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전혀 다른 내용으로 읽히는 것이리라. 존 밀톤(John Milton 1608-1674)의 ‘실낙원(Paradise Lost,1667)을 그 한 예로 들어보리라. 밀톤은 그의 시 첫 연(聯)에서 저자의 의도를 밝히고 있다.
“이 거창한 논거를 통해 인간에 대한 신(神)의 영원한 섭리를 정당화시켜 보리라. (That to do the heighth of this great argument/ I may assert Eternal Providence./ And justify the ways of God to men.”
이 ‘실낙원’은 한 세기 반 동안 신의 정의를 입증하는 것으로 읽혔다. 인간의 타락이란 성서적 드라마가 예수의 희생을 통해 인류의 구원으로 끝나고, 아담의 모든 수난도 최선의 결말을 위해 신의 예정에 따른 것이라고.
“오, 무궁무진한 선이여, 악이 선으로 변하는 이 선악과(善惡果)여! (O goodness infinite, goodness immense!/ That all this good of evil produce,/ And evil turn to good!”
그러다 18세기 후반부터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나 퍼시 비쉬 셸리(Percy Bysshe Shelley1792-1822) 같은 독자들이 ‘실낙원’의 주인공 영웅은 아담도 예수도 신도 아니고 실제로 악의 화신 사탄으로 보게 되었다. 사탄 말고 ‘실낙원’에 등장하는 모든 다른 인물들은 대담성도 용기도 자존감도 없이 신의 계획과 섭리에 무조건 복종할 뿐인데 유일하게 신에게 맞서 사탄은 지옥에 떨어져서도 웅변적으로 선언한다.
“다 잃은 것 아니다. 결코 정복되지 않는 의지, 불멸의 증오와 복수심, 그리고 절대로 굴종하지 않는 용기는 살아 있다. (All is not lost; the unconquerable will,/ And study of revenge, immortal hate,/ And courage never to submit or yield.)”
그래서 셸리에게는 “정신적으로 도덕적인 존재로서 밀톤의 악마는 그의 신보다 비교가 안 되게 훨씬 더 훌륭하다. (Milton’s Devil as a moral being is far superior to his God.)”
또 한 예를 들어 보리라. 서양의 선과 악이란 독단적인 개념과 흑과 백이란 이분법적 탁상공론(卓上空論)을 떠나서 우리 동양적 자연관(自然觀)에서 볼 때 인간도 새와 같지 않을까.
새
ㅡ 프랑시즈 퐁주(Francis Ponge1899-1988)
가는 화살 또는 짧고 굵은 투창,
지붕 모서리를 에둘러가는 대신,
우리는 하늘의 쥐, 고깃덩이 번개, 수뢰,
깃털로 된 배, 식물의 이,
때로 높은 가지 위에 자리 잡고,
나는 그곳을 엿본다,
어리석고, 불평처럼, 찌부러져서....
장석주 시인은 이 시를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공중을 활강하는 새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뛴다. 상승 기류를 타고 포릉포릉 나는 새들에 늘 경탄한다. 이 경이로운 존재들, 이 사랑스럽고 하염없는 자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새들이 뼛속이 텅 빈 골다공증 환자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새들은 씩씩하게 공중을 주름잡는다. 푸른 궁륭의 자식들, 가장 작은 분뇨제조기, 작은 혈액보관함, 좌우 날개를 가진 무소유의 실천자, 바람이 띄우는 작은 연들, 발끝을 딛고 춤추는 공중의 발레리나들, 은행 잔액이나 국민연금 따위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통 큰 백수들! 한편으로 새들은 “하늘의 쥐, 고깃덩이 번개, 수뢰, 깃털로 된 배”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 그래서 우리말로 꿈보다 해몽이 좋아야 한다고 했던가. 어떻든 우리는 모두 하나같이 우리의 영원한 고향 코스모스 하늘로 날아가는 새, 코스미안이리.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코리아헤럴드 기자
뉴욕주법원 법정통역관
전명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