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종의 본산이자 조계종 19교구 본사, 화엄사로 들어가는 계곡의 고목들은 풋풋한 잎새를 내뿜고 있다. 만화방창(萬化方暢)한 화엄사 계곡의 산색을 보고 이미 들어선 봄을 읽는다.
수많은 꽃들이 피어 화려한 세상을 연출하는 화엄(華嚴)의 계절, 지리산 노고단 아래 너른 품 가슴께에 살포시 안긴 대가람 화엄사의 기운이 싱싱하고 다사롭다.
수많은 세월만이 담아낼 수 있는 오묘함과 편안함이 펼쳐지는 절집, 고색창연함이 곳곳에 서려 있다. 웅장하면서도 모든 것이 가지런하다. 어느 곳이든 들여다봐도 마음 한 구석 쉴 만한 여유로움이 깃들어 있다. 돌담길을 걷듯 그렇게 걸어도 좋고 숲길을 산책하듯 그렇게 걸어도 좋은 그런 곳이다. 솔바람에 흔들리는 노송과 계곡 물소리가 하모니를 이루니 절집에 들어서기 전 따로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없다.
‘지리산화엄사’라는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면, 좌우에 금강역사와 문수, 보현 동자상을 안치한 금강문이 있다. 그 바로 뒤에는 천왕문이 있는데, 전면 3칸의 맞배집으로 목각 사천왕상이 모셔져있다. 천왕문에서 약 50m 거리에 강당으로 사용되는 정면 7칸의 보제루(普濟樓)가 종루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고, 이곳을 지나면 화엄사의 중요한 당우들이 있다. 보물인 동서 쌍탑 정면에는 대웅전, 그 서쪽에는 각황전이 있다. 대웅전 앞의 계단 아래에는 양식을 달리하는 동서 오층석탑이 있는데 동탑은 서탑에 비해 아무런 조각과 장식이 없고, 단층기단으로 되어 있다.
국보 제67호인 구례 화엄사 각황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의 2층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그 건축수법이 뛰어나다. 원래 이름은 장육전인 각황전 내부에는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화엄사는 세종 때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으로 승격되지만, 임진왜란의 병화로 완전히 불타버렸는데 숙종 때 각성이 중건한 불전이다. 장륙전의 사방 벽은 원래 화엄석경(華嚴石經)으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불행히도 임진왜란과 6.25전쟁 때 파괴되어 작은 조각들만이 남아 있다.
각황전 앞에 있는 높이 6.36m나 되는 거대한 석등은 8각의 하대석(下臺石)이 병 모양의 간석(竿石)을 받치고 있고, 중간에 띠를 둘러 꽃무늬를 연이어 새긴 것으로 현존하는 국내 석등 중에서 가장 큰 것이며, 통일신라시대의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대표적 작품이다.
각황전 오른쪽에는 국보 제35호인 사사자삼층석탑이 있다. 이 석탑의 사방에는 머리로 석탑을 받치고 있는 네 마리의 사자와, 그 중앙에 합장을 한 채 머리로 탑을 받치고 서 있는 스님 상이 있다.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인 비구니의 모습이라고 전하며, 석탑 바로 앞 석등의 아래쪽에도 꿇어앉은 한 승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불탑을 머리에 이고 서 있는 어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한 연기조사가 석등을 머리에 이고 차 공양을 올리는 모습이라고 한다.
절집을 나와 근처 토지면에 있는 운조루로 가는 산모롱이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새싹 돋아 오르듯이 푸르다. 파랗게 싹을 내는 나무들의 몸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풀들의 마을, 나무들의 동네에 봄이 무르익으니 꽃향기가 가득하다.
토지면 오미리의 운조루(雲鳥樓)는 '조선 3대 명당자리'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고택이다. 영조 때 무관이던 류이주가 관직에서 은퇴하고 99칸 대저택으로 지었는데 지금은 70여 칸이 남아있다. 운조루의 당호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라는 의미인데,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나오는 칠언율시에서 따온 것이다.
운조루 대문에는 호랑이뼈가 매달려 있었다. 당시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근무하던 류이주는 호랑이를 때려잡아 가죽은 임금인 영조에게 바치고 호랑이뼈는 잡귀의 침범을 막기 위해 운조루 대문에 걸어 두었다. 그런데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진 호랑이뼈를 사람들이 조금씩 갉아 가다가 나중에는 아예 통째로 가져가고 말았다.
운조루에 들어서면 바로 앞에 두 칸의 누마루가 있는 사랑채가 나오는데, 눈길을 끄는 것은 큰 사랑채 누각 아래에 있는 거대한 수레바퀴다. 소 세 마리가 끌었다는 수레를 얹었던 나무바퀴인데, 이 집안이 누렸던 부의 규모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곳 두 개의 사랑채 사이에는 안채 통로를 겸한 부엌이 있다. 그리고 그 부엌 안에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씨가 씌어있는 둥근 나무 뒤주가 있다. ‘누구나 쉽게 열 수 있다’는 뜻이다. 운조루의 주인들은 쌀 두 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나무 뒤주에 항상 쌀을 채워놓고 가난한 마을 사람들이 끼니를 이을 수 없을 때, 마개를 열고 쉽게 쌀을 빼 가도록 나눔을 베풀었다고 한다.
안채로 들어서니 마당의 매화나무와 목련, 동백나무, 살림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장독대, 처마 밑의 제비집, 안채에 걸려있는 빛바랜 옛 벽화 등 지나온 세월의 흔적들이 오롯하다. 세월의 무게감이 묻어나오는 툇마루에 앉아 따사로운 봄 햇살을 한참동안 즐긴다.
지리산 자락을 너른 마당으로 품은 화엄사와 운조루.
모든 존재의 조화로움을 근간으로 삼는 화엄의 빛이 화엄사에서 운조루로 흘러내려 자비의 꽃을 피웠다.
화엄사상에서는 나와 남이 따로 없다. 그래서 무아(無我)라고 한다.
진정한 자비심은 나와 남을 분별하지 않는 열린 마음이다.
그래서 화엄의 세계는 자비의 세계다.
운조루 돌담 아래에는 작디작은 들꽃들이 함초롬히 피어있다. 저 여리고 순한 것들이 온전히 피어나는 세상, 바로 이것이 화엄의 세상이 아니겠는가.
여계봉 선임기자 yeogb@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