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으악새 슬피 우는 가을인가요?”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던 1936년말에 가수 고복수(高福壽 1911-1972)가 부른 ‘짝사랑’ 이란 노래 가사다. 여기서 말하는 ‘으악새’는 ‘억새’로 알려져 있다. 가을바람에 한들한들 살랑거리는 억새의 사각거림을 슬피 운다고 표현했으리라. 올해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잃어버린 봄’이 되어서인지 지금부터 벌써 가을바람이 부는 것만 같다.
2015년 10월 2일자 미주판 중앙일보 오피니언 페이지 <고은의 편지10> ‘하원(下園)에게’를 “맹목적이네. 눈앞의 10월은 맹목적인 너무나 맹목적인 나의 하루하루를 열어주네.” 이렇게 시작하면서 그는 단언(斷言)하듯 술회(述懷)한다. “가을은 소설이 아니네. 가을은 해석이 아니네. 가을은 시이네.”
모든 어린이들처럼 나도 아주 어릴 적부터 모든 사람, 특히 여자와 아가씨를 무척 좋아하다 보니, 그야말로 ‘다정도 병이런가’ 짝사랑이 되고 마는 것 같다. 이게 어디 사람뿐이랴! 하늘도 땅도, 그 안에 있는 모든 것 말이어라. 고은(高銀, 본명: 高銀泰 1933 - ) 시인의 글을 나는 이렇게 바꿔보리라.
‘삶은 소설이 아니네. 삶은 해석이 아니네. 삶은 시이네.’
아니, 그보다는 ‘삶이 산문(散文)이라면 숨 쉬는 숨은 시(詩)’라고 하리라. 대학 시절 강의실보다는 음악감상실이나 다방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내 짝사랑을 소설화 해보겠다고 긁적인 초고(草稿) ‘내가 걸어온 자학(自虐)의 행로(行路)’ 앞부분을 이어령(李御寧, 1933 - ) 대학 선배에게 보여줬다. 그랬더니 그의 평(評)은 이러했다.
“이 ‘자학의 행로’에는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등 불후의 세계명작을 쓴 작가들의 심오한 사상이 모두 다 들어 있지만 전혀 요리가 안 된 상태이다. 그러니 독자가 먹기 좋게 살도 부치고 양념을 쳐라.”
하지만 나로서는 그럴 재주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고 싶지도 않아 일찌감치 작가가 될 생각을 접고, 차라리 인생이란 종이에 삶이라는 펜으로 사랑이란 피와 땀과 눈물을 잉크 삼아 소설이 아닌 시를 써보리라 작심했다. 그것도 단 두 편이면 족하리라 생각했다. 그 하나는 내 ‘자화상(自畵像)’이고 또 하나는 먼 훗날의 내 ‘자서전(自敍傳)’이라고 나 스스로 명명(命名)한 ‘바다’와 ‘코스모스’란 시(詩)다.
이 둘을 하나로 합치면 ‘코스모스바다’가 되리라. 이게 어디 나뿐이랴. 코스모스바다의 물방울들이 사랑의 숨으로 기화(氣化)하여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무지개 타고 황홀하게 주유천하 (周遊天下)하다 코스모스바다로 돌아갈 우리 모두의 참모습이며 여정(旅程)이 아니랴! 이 사실 아니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계절이 바로 가을이리라.
1987년에 나온 김윤희(金潤姬 1947-2007)의 장편체험소설 ‘잃어버린 너’가 있다. 그녀의 시공(時空)은 물론 생사(生死)까지 초월한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이 실화소설은 수백여만 부 팔렸고 일본어로도 번역 출판되어 일본 독자들까지 사로잡은 체험 소설이다. 1991년에는 김혜수, 강석우 주연으로 동명의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고, TV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한 남자와 나누었던 운명적인 사랑과 비극적인 사별을 담은 이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의 심금(心琴)을 울렸다. 한국 출판마케팅 연구소가 1999년에 조사한 ‘20세기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 19위에 올랐었다. 이러한 사랑을 솔새 김남식은 ‘사랑 愛’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그대가 없는 세상에
산다는 것은
그믐달 같은 거
다시
사랑한다 하여도
그대가 될 것이며
다시
이별한다 하여도
그대가 될 것을
불사조처럼
죽고 못 사는 이가
되리라
‘에필로그 하나’에서 솔새 김남식은 또 이렇게 적고 있다.
“며칠 전 낡은 서재에서 간신히 책을 찾아 20여 년 만에 다시 읽었으나 그때의 감동이 그대로 정말 밤잠 설치면서 읽었던 책으로 느낌이 다가왔다. 1987년도 그 당시 누구나 하룻밤에 독파해 버린 추억의 책으로 모든 사람들이 마치 자신의 일처럼 눈물을 흘렸다. 김윤희와 엄충식 두 사람의 사랑, 아니 그들의 인생 이야기가 바로 우리가 필요한 순수한 사랑이었기에 많은 여성 팬을 울렸던 것 같다.”
그녀는 한동안 화장도 않은 채, 검은옷을 수년간 입고 다녔으며 커피 둘, 프림 둘 그렇게 아침이면 모닝커피 두 잔을 만들었다고 했다. 한 잔은 그 사람 자리에 놓고 나머지 한 잔은 그 사람을 생각하며 한 남자를 만나서 사랑이 많이 힘들고 아팠지만 행복했던 날이었고 그렇게 그와 어설프게 함께 한 18년이란 세월이 외롭고 가난했지만 시간을 같이한 그에게 정말 미안하다며, 책 말미에 적었다. 그를 보내고 난 뒤 시름시름 앓고 있을 때 주위의 권유로 체험 소설을 쓰게 된 그녀는 그와 보낸 지난 일을 글로 적어 가면서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으며 사랑이라는 절대적인 끈으로 인해서 두 사람은 늘 함깨 살았다고 한다.
이 책이 나온지 33년이 되는 오늘날 재판(再版)이라도 다시 나오게 된다면 그 제목(題目)을 ‘잃어버린 너’가 아닌 ‘되찾을 나’라고 한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2013년 여름 43세가 되도록 싱글로 지내오다 인터넷을 통해 피부암 말기 환자를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하게 되었고, 만난 지 18개월 만에, 결혼하고 5개월 후, 남편과 사별한, 1993년부터 스코티시 챔버 오케스트라(Scottish Chamber Orchestra) 첼리스트로 근속해온 내 둘째 딸 수아는 6개월간의 안식년을 얻어 유럽, 미국, 인도, 남미, 아프리카 등, 특히 산티아고 순례길을 여행하며 “결코 혼자가 아니라 늘 남편 고든과 함께하는 순간순간을 실감한다”는 말을 나는 듣게 되었다.
김윤희와 수아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더할 수 없이 축복받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들을 몹시 부러워하면서 축복할 뿐이다. 이처럼 절대적인 사랑의 영원한 순간을 맛볼 수 있다는 이 한없이 신비(神秘)롭고 경이(驚異)로운 기적(奇蹟) 같은 사실과 진실을 어찌 축복하지 않을 수 있으랴. 최근 처제 안영순 씨로부터 카톡으로 전달받은 ‘행복 날개’를 많은 독자들과 나누고 싶어 옮겨보리라.
장자(莊子)편에 풍연심(風憐心)이란 말이 있습니다. 바람은 마음을 부러워한다는 뜻을 지닌 내용입니다.
옛날 전설의 동물 중에 발이 하나밖에 없는 기(夔)라는 동물이 있었습니다. 이 기(夔)라는 동물은 발이 하나밖에 없기에 발이 100여 개나 되는 지네를 몹시도 부러워하였습니다. 그 지네 에게도 가장 부러워하는 동물이 있었는데, 바로 발이 없는 뱀(蛇)이었습니다. 발이 없어도 잘 가는 뱀이 부러웠던 것입니다. 이런 뱀도 움직이지 않고도 멀리 갈 수 있는 바람(風)을 부러워 하였습니다. 그냥 가고 싶은 대로 어디든지 씽씽 불어 가는 바람이기에 말입니다. 바람에게도 부러워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가만히 있어도 어디든 가는 눈(目)을 부러워했습니다. 눈에게도 부러워하는 것이 있었는데, 보지 않고도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고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마음(心)을 부러워했습니다. 그 마음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습니까?:”
“제가 가장 부러워하는 것은 전설 속 동물인 외발 달린 기(夔)입니다.”
마음은 의외(意外)의 답(答)을 했다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어쩌면 서로를 부러워하는지 모릅니다. 자기가 갖지 못한 것에 상대적으로 가진 상대를 부러워하지만 결국 자신이 가진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 것을 모르는 채 말입니다. 세상이 힘든 것은 부러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상대방의 지위와 부, 권력을 부러워하면서 늘 자신을 자책하기에 불행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를 부러워하고, 부자는 권력을 부러워하고, 권력자는 가난하지만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결국 자기 안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람이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 사람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일 것입니다.
현미(玄米)와 백미(白米) 또는 찹쌀과 멥쌀을 반반씩 섞은 걸 ‘반반미(半半米)’라고 한다. 영어로 ‘그는 아직 너한테 홀딱 빠지지 않았어 (He’s just not that into you)’라는 표현이 있다. 네게 전적(全的)으로 끌려 온통 반해버리지 않았다는 뜻으로. 남녀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대인 관계에 있어서도 얼마나 빨리 또는 천천히 친해질 수 있는가는 매우 흥미로운 사안이다. 흔히 영국 사람들은 유보적(reserved)이라고 한다. 내가 영국에 가서 받은 첫인상이 예의 바르고 정중하면서도 함부로 근접(近接)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요즘은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전 세계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모든 사람들과 ‘거리두기’를 강요받고 있지만 이를 영국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들을 너무 가까이하지 말라 (Keep people at your arm’s length)’고 한다.
처음엔 대영제국의 후예(後裔)들로서의 우월감의 발로인가 했는데 10여 년 영국에 살아보니 그게 아니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配慮心)이고, 시간이 좀 걸려도 서로 잘 알게 되면 깊은 정(情)을 나누게 되더란 것이다. 우리말에도 소인(小人)의 사귐은 달기가 꿀과 같고, 대인(大人)의 사귐은 담담(淡淡/潭潭)하기가 물과 같다 하지 않았나. 우리 동족 한인 사이에서도 너무 쉽게 사귄 사람과는 지속적인 관계가 잘 맺어지지 않고, 남녀 간에서도 너무 빨리 달아오른 열정은 그만큼 빨리 식어버리지 않던가. 쉽게 얻은 재산(財産) 쉽게 탕진(蕩盡)하듯이 말이다.
‘티끌 모아 태산 (Many a little makes a mickle)’이나 ‘물방울이 모여 대양 (Every drop of water makes the ocean)’이란 속담이 있듯이 애정도 우정도 인정도 이와 같지 않을까. 이처럼 태산(泰山)과 대양(大洋)의 축소판이 티끌이요 물방울이라면 인류의 축소판이 개인일 테고, 하찮은 아무나 아무것도 그 확대편이 대우주 코스모스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무엇이든 누구이든 제각기 다 온전(穩全)한 소우주(小宇宙)인데 이를 어찌 반(半)쪽으로 쪼갤 수 있으랴. 그러니 어느 누구나 무엇에 반(半)한다는 건 자기 자신에 반(叛)하는 짓이요, 스스로를 저버리는 일이 되지 않으랴.
영어에 ‘내 짝’이란 뜻으로 ‘my better half’란 말이 있다. 이를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난 너의 멥쌀, 넌 나의 찹쌀’이 되겠다.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반(半)할 수도 변(變)할 수도 없으려니와 반(半)해서도 변(變)해서도 아니 되리라. 다만 온전(穩全)한 나로서의 나와 온전한 너로서의 네가 반쪽이 아닌 통째로 합해 너무 차지지도 않지만 쫀득쫀득하게 맛있는 밥을 지으면 되리라.
또 영어에 그 어떤 무슨 일에 전심전력(全心全力/專心專力)하지 않고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면서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걸 ‘반심(半心)’으로 한다는 뜻으로 ‘half-hearted’라고 한다. 사업이든 사랑이든 삶이든,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아니 하느니만 못하지 않을까. 뭣이든 이왕 할 바에는 온 심혼(心魂)을 다 쏟아부어야 성과(成果)나 보람도 있고, 그 결과(結果)가 어떻든 하는 재미와 쾌감(快感)도 느낄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