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의 항간세설] 물안개일 뿐이야

이태상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영화 한 편이 있다. 프랑스의 르네 클레망(Rene’ Cle’ment 1913-1996)이 감독한 금지된 장난 (프랑스어로 Jeux Interdits, 영어로는 Forbidden Games, 1952)으로 프랑스 극작가 프랑솨 봐예(Francois Boyer 1920-2003)의 동명 소설을 영화한 것이다.

 

전화(戰禍) 속 어린아이들의 순수와 어른들의 미친 광기(狂氣)를 더할 수 없이 슬프고 아름답게 시적(詩的)으로 그린 흑백(黑白) 명작(名作)이다. 꾸밈없이 사실적(事實的)이면서도 거의 초현실적(超現實的)으로 강렬(强烈)하게 깊은 인상(印象)을 각인(刻印)시키는 반전(反戰)영화이다.

 

때는 19406, 나치의 프랑스 침공을 피해 파리로부터 남쪽으로 피난을 가던 5세 난 폴렛(Paulette, Brigitte Fossey 1946 - )과 애견(愛犬) 족크 그리고 부모가 나치 공군의 공습을 받아 폴렛만 살아남는다. 졸지에 고아가 된 폴렛은 피난민이 강에 집어 던진 족크를 찾으러 나셨다가 동네 농부 돌레의 11세난 막내아들 미셸(Michel, Georges Poujouly 1940-2000)을 만나 미셸의 집으로 간다. 미셸의 가족은 폴렛을 따뜻이 맞아 한 가족처럼 지낸다.

 

그리고 미셸과 폴렛은 다정한 친오빠와 동생처럼 친해진다. 미셸과 폴렛은 죽은 강아지 조크를 버려진 물방앗간 안에 묻으려는데, 조크가 외로울 것을 폴렛이 걱정하자, 미셸은 방앗간 안 둘만이 아는 무덤에 죽은 두더지와 곤충과 병아리와 쥐들을 같이 묻어주고, 무덤을 십자가와 꽃들로 장식해주기로 한다. 그러기 위해 미셸은 무덤에 꽂을 십자가들을 훔치기 시작하는데, 제일 먼저 말에 채여 죽은 자기 맏형 조르지의 관을 실은 영구 마차의 장식품 십자가를 비롯해 성당 제단에 있는 십자가까지 훔치다가 신부에게 들켜 혼이 난다.

 

그러다 미셸과 폴렛은 성당 옆 공동묘지에 있는 십자가들을 손수레에 싣고 자기들만의 묘지로 옮긴다. 신부로부터 십자가 도둑이 미셸이라는 말을 들은 돌레는 미셸을 마구 두들겨 패면서 십자가들의 행방을 추궁하나 미셸은 입을 굳게 다물고 밝히지 않는다. 이때 마침 경찰이 폴렛을 고아원에 보내기 위해 돌레 집을 찾아온다. 안가겠다고 우는 폴렛과 떨어지기 싫은 미셸은 아버지에게 십자가의 행방을 알려주는 대신 폴렛을 보내지 말라고 사정한다. 돌레가 그러겠다고 하자 미셸은 십자가가 어디에 있는지 말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약속을 어기고 폴렛을 경찰에 넘기자 미셸은 묘지로 달려가 십자가들을 죄다 망가뜨려 버린다. 인파로 붐비는 기차역, 불안과 두려움과 슬픔에 젖은 눈동자로 역사에 쪼그리고 앉아 폴렛은 자기를 수녀원의 고아원으로 데려갈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이때 누군가 미셸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에 폴렛은 벌떡 일어나 미셸하고 부르나 그 미셸은 다른 남자의 이름이었다. 폴렛이 계속해 미셸을 찾으면서 역 안의 인파 속으로 뛰어가는 마지막 장면이 보는 사람 가슴 미어지게 하고 눈시울을 뜨겁게 적셔준다.

 

베니스 영화제 대상과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이 영화는 어린이들의 순수한 사랑과 정직성에 대비시켜 어른들의 기만과 이기심, 인간의 잔인성과 어리석음, 그리고 전쟁의 광기와 참극을 규탄하고 통탄하는 최고의 걸작 명화인데, 기타로 연주되는 유일한 음악 나르시소 예페스(Narciso Yepes1927-1997)로망스 (Romance Ano’nimo, 영어로는 Anonymous Romance)가 긴 여운(餘韻)으로 남는다.

 

, 선각자(先覺者) 한 사람의 시() 한 편이 떠오른다. 영국의 화가이자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의 시집 순수와 경험의 노래: 천지무구(天眞無垢)와 유구송(有垢誦) Songs of Innocence and Experience, 1789’ 말이다. 이 두 노래는 동요동시집(童謠童詩集)이다.

 

순수의 노래가 어린이들의 순수(純粹)한 천국에 대한 찬가라면 경험의 노래는 어른들의 미친 세상 지옥에 대한 비창(悲愴 Pathetique)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 노래들은 21세기 오늘날에도 특히 요즘 코로나바이러스로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는 인류에게 공전(空前)의 중차대(重且大)하고 엄중(嚴重)한 경각심(警覺心)을 불러일으키는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아직까지도 스스로 명품(名品)’이 될 생각을 못하고 명품을 갖지 못해 애쓰는 세상이고, 환영(幻影) 이미지 아이콘(icon)에 집착(執着)하는 세태(世態)이지만 시조시인(時調詩人) 조운(曹雲 1900-?)석류(石榴)’를 우리 음미해보리라.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툼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좋고 아름다운 것은 외부에서 오지 않고 내부에서 자라 영글면 넘쳐나는 것임을 깨우치게 하는 시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말이어라. 우리 각자 자신이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 다 알 수 있는 사실 아닌가. 너무도 자명(自明)한 일이다. 밖을 보기 위해서는 안을 봐야 한다는 진리(眞理)일 것이다.

 

얼마 전 페이스북이 좋아요를 보완(補完)할 버튼을 만들고 있다고 밝히자 그 이름이 안 좋아요가 될지 싫어요가 될지 슬퍼요가 될지 별로에요가 될지 관심을 끌었었다.

 

몇 년 전 한국에서 가수 임재범(당시 53)3년 만의 새 앨범 발표를 앞두고 선공개곡 이름을 2015106일 음원사이트에 올렸는데 바람처럼 들풀처럼 이름 없이 살고 싶었던 남자가 소중한 한 사람에게 만큼은 특별한 이름이고 싶다는 주제라고 했다. 데뷔 30주년을 맞아 보컬리스트로서는 초심으로의 회귀, 음악적으로는 발전을 꾀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우주에서 가장 작으며 가장 가벼운 소립자인 중성미자의 존재가 근래에 와서 주목을 받고 있다. ‘작은 중성자라는 뜻의 중성미자가 워낙 작고 전기적으로도 중성인 데다 무게도 있는지 없는지 불분명할 정도로 가벼워 존재 확인이 극히 어렵지만, 현재 확인된 중성미자의 무게는 양성자의 1/1836인 전자의 100만 분의 1에 불과하며 1광년 길이의 납을 통과하면서도 다른 어떤 소립자와 충돌하지 않을 정도로 작다고 한다.

 

이 중성미자는 태양에서 만들어져 날아온 것인데 관측된 수치가 이론적으로 예측된 수치의 1/3에 불과했던 것을 중성미자가 날아오는 동안 계속 형태(flavor)’를 바꾼다는 사실을 알아낸 사람이 바로 일본의 물리학자 가지타 다카아키(梶田 隆章 1959 - )와 캐나다의 천체물리학자 아터 맥도날드(Arthur B. McDonald,1948 - )이다. 이 공로로 이 두 사람은 2015년 노벨 물리학상 공동수상자가 됐다.

 

이 중성미자의 변형은 우주 탄생의 비밀과 직결돼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다. 138억 년 전 빅뱅과 함께 우주가 탄생했을 때 물질과 반물질의 비중은 거의 같아, 이 둘이 서로 만나면 폭발해 없어지기 때문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지금과 같은 우주가 생겼는지는 아직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왔는데, 중성미자의 변환 과정에서 물질이 반물질보다 조금 더 남았다는 설이 최근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천문학자나 과학자도 아닌 문외한(門外漢)인 내가 이를 감히 아주 쉽게 풀이해 보자면 이 물질좋아요이고 안 좋아요반물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지만, 나머지는 다 우리 각자의 선택사항이 아닌가. 죽는 날까지 어떻게 사느냐 가, 일찍 삶을 포기하고 자살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우주 만물, 세계 만인 다 좋아요버튼만 누르고 또 누를 대상만도 부지기수(不知其數), 하늘의 별처럼 많은데, ‘좋아요버튼만 누를 시간만도 너무너무 부족한데, 어찌 안 좋아요싫어요또는 슬퍼요별로에요로 너무도 소중하고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수 있으랴.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누구든 그 무엇이든 좋아하고 사랑할 때 천국을, 싫어하고 미워할 때 지옥을 맛보게 되지 않던가. 그러니 반물질안 좋아요가 카오스(Chaos)를 불러온다면 물질좋아요아브라카다브라(abracadabra, the Aramaic phrase avra kehdabra, meaning “I will create as I speak”) 주문(呪文)외듯 코스모스(Cosmos)를 피우리라. 온실의 화초를 옥()이라 한다면 들의 잡초는 돌()이라 하겠지만 옥도 돌이 아닌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옥과 돌을 구별한다. 그래서 돌을 차면 발만 아프다하는 것이리라.

 

최근 하버드대 토론연합(HCDU)이 뉴욕 동부교도소 재소자들과의 토론 대회에서 패배했다. 하버드대 재학생들로 구성된 토론연합은 미 전역 및 세계챔피언 전에서 1위를 차지했던 일류 토론팀이다. 뉴욕 동부교도소 재소자들의 승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재소자들은 토론동아리를 만든 이후 2년 동안 미국 대학 토론팀들과 시합을 벌여왔으며, 미국의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 토론팀도 이겼다. 상아탑(象牙塔)의 최고 명문대 학생들이 그야말로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교도소 재소자들에게 진 것은 너무도 당연(當然)한 일 아닐까. 마치 폭풍우 속에서도 야생의 잡초들은 살아 남지만 온실의 화초들은 그럴 수 없듯이 말이어라.

 

탁상공론(卓上空論)의 지식과 (울어야 하는 상황에서 너무나 어이가 없어 울 수 없으니까 마지못하여 웃는다는 뜻으로) ‘울어난삶의 지혜는 전혀 별개의 문제가 아닌가. 우리 칼릴 지브란 (Kahlil Gibran 1883-1931)방랑자(The Wanderer: His Parables and His Sayings, 1932)’모래사장에 적은 글[Upon the Sand]’을 우리 함께 심독(心讀)해 보리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오래전 밀물 때 내 지팡이 끝으로 모래 위에 한 줄 적었는데 사람들이 아직도 멈쳐 서서는 유심히 그 글을 읽으면서 그 글이 지워지지 않게 조심한다네.”

 

Said one man to another,

 

“At the high tide of the sea, long ago, with the point of my staff I wrote a line upon the sand; and the people still pause to read it, and they are careful that naught shall erase it.”

 

그러자 그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썰물 때 나도 모래 위에 한 줄 적었지만 파도에 다 씻겨버렸다네. 그런데 참 그대는 뭐라고 썼는가?”

 

And the other man said,

 

“And I too wrote a line upon the sand, but it was at low tide, and the waves of the vast sea washed it away. But tell me, what did you write?”

 

첫 번째 사람이 대답해 말하기를,

 

나는 이렇게 썼다네. ‘나는 있는 그 (사람)’이라고. 그럼 그대는 뭐라고 썼었나?”

 

And the first man answered and said,

 

“I wrote this: ‘I am he who is.” But what did you write?”

 

그러자 그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이렇게 나는 적었었네. ‘나는 이 대양(大洋)의 물 한 방울일 뿐이라.”

 

And the other man said,

 

“This I wrote: ‘I am but a drop of this ocean.’”

 

칼릴 지브란의 아포리즘 잠언집(箴言集) ‘모래와 파도의 물거품 포말(泡沫) Sand and Foam: A Book of Aphorism, 1926’에 나오는 어록(語錄) 한마디도 우리 깊이 음미(吟味)해보리라.

 

언젠가 한 번 나는 내 손 안에

안개를 가득 채웠지.

 

그리고 나서 내 손을 펴보니,

손안에 있든 안개가

벌레 한 마리로 변했어.

 

내가 손을 쥐었다가 다시 펴보니,

내 손 안에 있던 벌레가

새 한 마리로 변했어.

내가 손을 쥐었다가 또다시 펴보니,

내 손 안에 있던

새는 없어지고

어떤 한 사람이

슬픈 얼굴로 서서

날 쳐다보고 있었어.

그래서 내가 다시 한번 손을 쥐었다가 펴보니,

이번엔 내 손 안에 아무것도 없고 물안개뿐이었어.

 

하지만 한없이 감미(甘美/甘味)로운 노랫소리가 들렸어.

 

Once I filled my hand with mist.

Then I opened it and lo, the mist was a worm.

And I closed and opened my hand again, and behold there was a bird.

And again I closed and opened my hand, and in its hollow stood a man with a sad face, turned upward.

And again I closed my hand, and when I opened it there was naught but mist.

But I heard a song of exceeding sweetness.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4.26 10:28 수정 2020.04.26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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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