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확대판이 영원이고 영원의 축소판이 순간이라면, 우리는 모두 순간에서 영원을 살고 있지 않나. 내가 태어나기 전 헤아릴 수 없는 무궁한 세월 동안 우주는 존재해 왔고, 또 내가 떠난 다음에도 우주는 영원토록 계속 존재하는 것이라면, 찰나 같은 나의 존재란 어떤 것일까?
나의 존재란 언제부터일까. 엄마 뱃속에 잉태된 그 순간부터 이거나 아빠의 정자로 생긴 때부터이거나, 또는 그 이전부터일까. 그리고 내 심장이 뛰기를 멈추거나 마지막 숨을 내쉬거나 의식을 잃는 순간, 그 언제 끝나는 것일까. 아니면 부모와 조상으로 한없이 거슬러 올라가고 또 자식과 후손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것일까. 불교나 힌두교에서 말하는 ‘윤회(輪廻)’가 아니라도.
뉴론(neurons)이란 정보를 전송하는 두뇌 속 세포들의 작용으로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며 생각하고 행동하기 등 모든 행위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 뉴론들 사이의 연결점들은 시냅시즈 (synapses)라고 불리는데 여기에 기억들(memories)이 저장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시냅시즈들은 물론 뉴론들도 한없이 복잡 미묘한, 영원한 수수께기들이란다. 어디 그뿐인가. 시냅시즈와 뉴론들 숫자는 하늘의 별처럼 부지기수라 하지 않나. 다시 말해 한 사람의 두뇌 속에만도 광대무변(廣大無邊)의 무한한 우주가 있다는 얘기다.
갓 태어났을 때부터 내가 나를 관찰할 수 없었지만 내 손자와 손녀만 보더라도 참으로 경이롭기 이를 데 없다. 외형의 외모만 보더라도 날이면 날마다 시시각각으로 그 모습이 달라지고 변해 가고 있음을 여실히 목격하게 된다.
어느 한순간의 모습과 표정도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고 영원무궁토록 단 한 번뿐이라는 사실을 가슴 저리도록 아프게 절감(切感)한다.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각자의 순간순간의 삶이 그렇지 않은가. 이 얼마나 한없이 슬프도록 소중하고 아름다운 순간들이고 모습들인가. 영세무궁토록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들이고, 처음이자 마지막인 만남들이요 장면들이 아닌가.
진실로, 그러할진대, 아무리 좋아하고 아무리 사랑해도 한없이 끝없이 너무너무 부족하기만 한데, 우리가 어찌 한시인들 그 아무라도 무시하거나 미워하고 해칠 수 있으랴. 우리는 다 각자대로 순간에서 영원을 사는 것임에 틀림 없어라!
1973년에 출간된 이후 3천만 권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 ‘비상(飛翔)의 공포(Fear of Flying)’의 저자인 미국 작가 에리카 종(Erica Jong, 1942 - )의 그 속편(續篇/續編) ‘죽음의 공포(Fear of Dying)’가 2016년에 나왔다.
‘비상의 공포’를 두 단어로 요약한다면 ‘지퍼 없는 씹(zipless fuck)’으로 ‘억제할 길 없는 욕망’ 이야기다. 여자라면 이런 상상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남자들은 ‘놀라 자빠질 것’이라는 홍보문구처럼 센세이셔널한 문제작으로 40여 개 국어로 번역 출판되었고, 여성의 성적(性的) 자아표현(自我表現)의 기폭제(起爆劑)가 됐다.
‘죽음의 공포’는 또 다른 금기사항(禁忌事項)인 노인(老人)들의 섹스를 다룬다. 이 속편 소설의 주인공은 60대 할머니이지만 농(濃)익은 욕정(慾情/欲情)을 ‘zipless.com’이란 쉽고 편한 섹스 사이트 (casual-sex site)를 통해 아무런 부담 없이 채워 즐긴다. 이 ‘죽음의 공포’ 책 커버엔 미국의 영화감독, 배우, 극작가 겸 음악가 우디 알렌(Woody Allen, 1935 - )의 다음과 같은 추천의 글도 실렸다.
“난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그의 유명한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그가 죽을 때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그가 이 책을 읽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I was thinking of his famous quote, “I’m not afraid of dying;” I just don’t want to be there when it happens, so I thought he should read this.)
‘비상의 공포’가 이 책을 읽은 독자들로 하여금 버스나 지하철 기차 옆 좌석에 앉은 참한 아가씨나 여인을 달리 쳐다보게 했듯이, ‘죽음의 공포’를 읽는 독자들도 할머니들을 달리 쳐다보게 될 것이라고 ‘비상의 공포’에서 문학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미국 작가 제니퍼 위너(Jennifer Weiner, 1970 - )는 말한다.
내가 청소년 시절 읽은 소설이 하나 있다. 저자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제목은 ‘인간발견(人間發見)’이었던 것 같다. 한 신부(神父)가 억제만 해오던 성(性)에 눈떠 파계(破戒)하고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발견하는 이야기였다.
그 후로 내가 1970년대 영국에 살 때 이웃에서 작은 식료품 가게를 하는 부부를 만났는데 남편은 아일랜드 사람으로 한국에서 신부(神父)로 18년을 근무하다 한국 수녀(修女)를 만나 신부와 수녀복을 벗고 아들딸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며 ‘인간적(人間的)’인 삶을 살고 있었다.
종교 특히 기독교에서 섹스를 불결(不潔)해 하며 치부시(恥部視)하고 또 여성을 제2의 성(性)으로 격하(格下)시킬 뿐만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선악과(善惡果)를 따먹는 원죄(原罪)를 짓도록 유혹(誘惑)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한 ‘악녀(惡女)’ 이브로 원초적인 낙인(烙印)까지 찍지 않았는가.
그 후로 기독교 신자들은 물론 기독교의 종교적인 세뇌(洗腦)와 악영향(惡影響)을 받게 된 거의 모든 지구촌 사람들이 지상(地上)의 삶을 외면(外面)하다시피 하면서 ‘그림의 떡(Pie in the Sky)’ 같은 천국행(天國行)에 목을 매 오고 있지 않은가.
얼마 전 한 드라마에서 나는 이런 대사(臺詞)를 듣고, 아, 참으로, 세상에 저렇게 ‘철든 사람도 있구나~!’ 쾌재(快哉)를 불렀다. 어려움에 부닥친 인물이 이번 생은 포기하고 다음 생을 기억하라 는 친구의 권유에 “나는 이번 생에 행복할 거야. 다음 생은 필요 없어”라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사람은 살기 위해서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잠을 자야 하듯이 섹스도 너무나 자연스런 인간 본능이요,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가 성욕(性慾/性欲)을 의미하는 리비도 (libido)가 삶의 원동력이라고 했다는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 삶의 엔진(engine) 발동기(發動機)가 아닌가.
자동차에 비유해서 차가 오래돼도 달릴 때까지는 엔진이 작동(作動)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 몸의 엔진인 섹스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다면 섹스가 남자나 젊은이들의 전유물(專有物)일 수는 없다는 얘기다. 촛불의 심지가 다 타버릴 때 마지막으로 불꽃이 커지듯 황혼(黃昏)의 섹스도 마찬가지이리라.
‘지각(知覺)’이 ‘현실(現實),’ 영어로는 ‘Perception is reality.’이라고 한다. 인물(人物)이고 사물(事物)이고 간에, 믿는 대로 보고 싶은 대로, 느끼는 마음의 인식작용(認識作用)을 일컫는 말인 것 같다.
몇 년 전 미연방수사국(FBI)은 싸구려 와인에 프랑스 명품 와인 라벨을 부착해 무려 130만 달러(약 15억 원)에 달하는 부당이득을 챙긴 범인을 검거했다. 그 당시 놀랍게도 세계적인 와인 전문가들조차 위조한 명품 라벨에 속아 와인 맛까지 명품으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1970년대 영국에 살 때 비영리 소비자보호 공익단체에서 명품 화장품들을 수거해 조사 분석한 보고서를 보니 바셀린 종류의 원료 이상 들어 있는 것이 없고, 향료를 포함해 재룟값은 얼마 안 되며 화려한 포장과 광고 선전비가 상품가격의 90% 이상을 차치한다는 거였다.
1980년대 미국 뉴저지주 오렌지시에서 잠시 가발 가게를 한 적이 있다. 당시 가발 개당 도매 구입 원가가 평균 7달러로 소매가는 21달러였다. 그런데 간혹 직업이 연예인이나 가수 같은 고객이 명품 가발을 찾으면서 21달러짜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제일 비싼 가발을 보여 달란다. 그러면 하는 수 없이 21달러짜리 가발이라도 ‘명품’이라며 그 열 배로 210달러를 받아야 손님이 만족스러워했다.
언젠가 한 여성과 허물없이 대화하는 중에 자기는 치과에 가서 ‘룻 커낼(root canal)’ 같은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는 순간 최근 섹스하면서 느끼던 오르가슴(orgasm)을 떠올리면 견딜 만하더라고 했다.
그녀는 부언(附言)하기를 남녀 간에 첫사랑과 결혼까지 하게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많은 경우 마지못해 적당히 편의상 썩 내키지 않는 사람과도 결혼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비참해하면서 불행할 필요가 없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극단직인 예까지 드는 것이었다. 싫은 사람과 섹스를 하면서도 눈을 감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상상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삶의 목적은 삶을 살아보는 것, 최대한으로 최고로 한껏 기껏 맛보고 만끽(滿喫)하는 것, 새롭고 더 풍성(豊盛)한 경험을 두려움 없이 열성(熱情)껏 추구(追求)하는 것이다.”
“The purpose of life is to live it, to taste experience to the utmost, to reach out eagerly and without fear for newer and richer experience.”
엘리노어 루즈벨트(Eleanor Roosevelt 1884-1962)의 말이다.
“삶이란 대담(大膽)하게 모험(冒險)을 감행(敢行)하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Life is either a daring adventure or nothing at all.”
핼렌 켈러(Helen Keller 1880-1968)의 말이다.
젊어서 한때 서울 한복판에 내 자작(自作) 아호(雅號) ‘해심(海心)’이란 이름으로 주점 대폿집을 차려 ‘해심주’와 ‘해심탕’으로 대인기를 끌면서 문전성시를 이뤘었다. 한 가지 희한한 사실은 수 많은 손님들이 ‘해심탕’을 안주로, ‘해심주’를 마시면서 잠시나마 실연(失戀)의 슬픔도, 삶의 고달픔도,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 다 털어 버리고 인생을 달관(達觀)하게 되노라고 비록 취중이지만 내게 거듭 증언하는 것이었다. 필시(必是) 이 ‘해심(海心)’이란 작명철학(作名哲學) 때문이었으리라.
후세 사람들이 성인군자(聖人君子)나 위인(偉人)이라고 숭상하는 인물들도 빛과 그림자처럼 좋고 나쁜 양면을 다 갖고 있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Socrates 470 bce-399 bce)나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가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훌륭한 인물들이었을지는 몰라도 가족 특히 부인들에게는 형편없는 남자들이 아니었을까? 오죽하면 부인을 ‘악처(惡妻)’로 만들었을까. 새삼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란 말을 심사숙고(深思熟考)하게 된다.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한두 예를 들어보리라.
세 딸들이 다닌 영국의 명문 음악학교의 세계적으로 저명한 선생님 한 분이 제자들을 성추행해온 사실이 밝혀져 조사를 받아오던 중 자살했고 피해 학생 한 명도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국에서도 UC 버클리대 교수이자 그동안 70개의 외계 행성을 발견한 유명한 천문학자 제프리 마시(Geoffrey Marcy, 1954 - )가 여학생들을 성희롱한 혐의로 사직했고, 미국 연예계의 대부(代父)로 만인의 칭송을 받아온 빌 코스비(Bill Cosby, 1937 - )는 수많은 연예계 지망생들을 약물을 탄 음료수를 먹여가면서 성폭행을 일삼아온 사실이 60여 명 이상의 피해 여성들 증언으로 드러나 법의 심판을 통해 2018년 3년 내지 10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아, 그래서 자고(自古)로 겉이 화려하면 속이 빈약하다고 외화내빈(外華內賓)이라 하는 것이리라. 자, 이제, 우리 모두 내실(內實)을 다져, 부질없이 밖에서 명품을 찾지 말고, 우리 각자 자신이 믿는 대로, 보고 싶은 대로, 바라고 원하는 대로, 각자가 스스로를 작명해서 단 하나뿐인 명품인물이 되어 명품인생을 살 때 우리 각자는 가짜가 아닌 진품(眞品/珍品)으로 전무후무(前無後無)하고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존재가 될 수 있으리.
몇 년 전 당시 현행 8개의 한국사 검인정교과서를 단일화하겠다는 정부방침으로 국회 내에서뿐만 아니라 외부에서까지 찬반 토론이 활발했고, 국정화에 반대하는 각계 성명이 잇달았었다. 도대체 역사란 무엇인가 우리 생각 좀 같이 해보리라.
“선생님, 역사란 무엇입니까?” 한 젊은 제자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고 “역사란 믿을 수 없는 것일세.”라고 언론인 출신 작가 이병주(1921-1992)는 답했다고 한다. 그는 장편소설 ‘산하’의 제사(題辭)로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적었다. 역사(歷史)란 승자(勝者)의 기록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만 잘 보려면 그 배경(背景)과 이면의 사정(事情)을 살필 수 있는 심안(心眼)을 가져야 하리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를 그 한 예로 들어보자. 미국에선 1934년 프랭클린 루즈벨트 (Franklin D. Roosevelt 1882-1945) 대통령에 의하여 10월 12일이 콜럼버스 날( Columbus Day) 미연방 공휴일로 정해졌다가 1971년 10월의 둘째 월요일로 변경되었다. 신대륙 발견 500주년을 기해 National Geographic 잡지가 ‘콜럼버스가 우리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콜럼버스를 보았다’라는 남아메리카 사람들의 시각(視覺)을 소개하면서 콜럼버스의 비판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콜럼버스가 남미대륙에 상륙한 이후 150년 동안 1억 명에 달하던 원주민들의 숫자가 30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며, 그들은 콜럼버스를 인류 역사상 최대의 학살을 촉발한 침략자로 보게 되었다. 베네수엘라(Venezuela)의 우고 차베스(Hugo Chavez 1954-2013) 대통령은 “10월 12일을 원주민 저항의 날로 바꾸라!”라는 대통령령을 내리기도 했다.
미국 미네소타 대학 인권센터에서는 콜럼버스를 ‘사상 최악의 인물’로 모의재판에 기소했는데, 배심원들은 12시간에 걸친 심리 끝에, 7개의 죄목인 노예범죄, 살인, 강제노동, 유괴, 폭행, 고문, 절도에 대해서 유죄라고 평결하였고, 재판장은 죄목 하나마다 50년씩 계산해서 통산 350년의 사회봉사활동을 콜럼버스에게 선고하였다. 이 같은 현상은 아직도 세계 도처에서 인종과 민족, 국가 간 그리고 개개인 사이에서도 사회 전반에 걸쳐 갑을 관계로 계속 반복되고 있지 않나. 흔히 속된 말로 ‘억울하면 출세하라’느니, 적자생존(適者生存)이니, 약육강식(弱肉强食)이니 하지 않는가.
아, 그래서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 대종사는 “모든 사람에게 천만 가지 경전을 다 가르쳐 주고 천만 가지 선(善)을 장려하는 것이 급한 일이 아니라, 먼저 생멸(生滅) 없는 진리(眞理)와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진리를 믿고 깨닫게 하여 주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라고 했으리라.
이 ‘생멸 없는 진리’와 ‘인과응보의 진리’를 내가 한마디로 줄여 풀이하자면 ‘우리는 하나’라고 수 있지 않을까. 자연을 포함 해서 내가 너를 위하면 곧 나를 위하는 게 되고, 내가 너를 다치게 하면 내가 다친다는 진실(眞實)말이다. 이것이 바로 코스미안 사상이며 현재 코로나바이러스로 명명백백(明明白白)해지고 있는 사실(事實)이 아닌가.
호기심에 가득 찬 아이들은 말끝마다 “왜(Why)?”라고 묻는다. “네가 좋아야 나도 좋으니까,” 이것이 정답(正答)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어른들도 아이들처럼 “왜?”라고 묻고, 전쟁과 파괴의 카오스(Chaos)를 초래하는 대신 사랑과 평화의 코스모스(Cosmos)를 창조해가면서 밝고 아름다운 새로운 코스미안 역사를 써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