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찬의 두루두루 조선 후기사]
제10화 송시열
조선왕조실록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의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가장 논란의 대상일까요? 그 이름은 바로 송시열(宋時烈)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 이상 언급되어 있습니다. 살아 있을 때도 죽은 뒤에도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인물이고 지금까지도 평가에 대해 말이 많은 사람입니다.
나이 83세로 보기 드물게 장수했지만, 끝은 사약을 받고 마감했습니다. 노론의 영수로 당쟁의 중심에 섰던 인물로 죽은 뒤 집권한 노론에 의해 다시 살아나 유학자의 최대 명예인 성균관 문묘에 공자와 함께 나란히 배향되었습니다. 공자와 더불어 송자라고 불리며 성현으로 추앙받았으며 충청도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과 사당이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나 반대파인 소론 인사가 그를 모시는 사당을 지나가면 눈 흘기고 침을 뱉었으며 탄압받았던 남인이 살던 경상도에서는 개 이름을 ‘시열’이라고 고쳐 불렀습니다. 최근까지도 개를 개라 하지 않고 시열이라고 부를 정도로 증오와 저주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렇게 극과 극을 달리하는 평가를 받는 송시열은 성리학이 뛰어나고 특히 주자학에 심취하여 반대하는 사람은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하여 박해했습니다. 그의 공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피폐해지고 사회 기강이 무너졌을 때 유학의 정도를 바로 세운 것입니다. 도덕과 윤리를 지키는 사회로 만든 공과 더불어 당쟁을 심화시킨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그에 대한 일화는 많이 있는데 보통의 유학자답지 않게 정치감각이 뛰어나고 음흉하기까지 했습니다.
젊었을 때 어떤 양반과 친구가 되어 집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친구의 어머니는 사람 보는 눈이 있어 새로 사귄 송시열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잣집인데도 불구하고 식사에 달랑 간장 한 종지와 작은 굴비 한 마리만 내놓았습니다. 이럴 때 많은 사람은 불쾌하게 생각했을 것인데 송시열은 내색은커녕 아주 맛있다고 칭찬하면서 보잘것 없는 식사를 끝냈습니다. 송시열이 돌아간 뒤에 어머니는 아들에게 친구 관계를 끝내도록 했습니다. 성의 없는 대접을 받고도 후대 받은 것처럼 꾸미는 것에서 그의 이중성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송시열은 도심(道心)에 충실한 유학자에서 파당을 만들고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이는 인심(人心)에 끌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알려 지기로는 효종대왕이 송시열과 함께 북벌을 꾀했다고 하지만 실은 북벌은 남인 윤휴이 주장했을 뿐이었습니다. 입으로만 북벌을 말하는 송시열에게 효종이 북벌에 대해 의논하자 먼저 마음을 닦으라는 등 소극적으로 대응하다가 급기야 효종을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아직도 의혹으로 남는데 효종의 눈 근처에 난 종기를 어의의 반대에도 송시열의 심복인 침술가가 종기를 시술해 죽음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뒤를 이은 현종을 임금 취급도 안 하고 국익보다 당익을 앞세웠습니다. 그는 농민의 이익을 위한 대동법을 시행하려는 김육에게 사대부의 이익에 어긋난다고 반대했으며 자신이 신봉하는 주자학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박세당과 윤휴를 박해했습니다. 또 예송 논쟁을 통해 불필요한 국론 분열을 꾀하면서 신권으로 왕권을 끝없이 견제했습니다.
오늘날 유교의 폐해는 인조반정에서 시작한 서인 집권에서부터 출발하여 송시열이 주도한 노론에서 완벽하게 구축된 것입니다. 여러 성씨가 한데 모여 옹기종기 살던 지방 향촌에서 같은 성씨, 같은 가문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 활발해지고 제례가 호화롭고 까다로워지고 여성에 대한 차별이 굳건해진 것도 이 시기입니다. 이것이 모두 송시열의 잘못은 아닐지라도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통해 흩어진 민심을 유학의 재확립을 통해 모으는 것은 명분이 있었으나 주자학 이외에 학문을 하는 것은 박해를 가하고 노론 집권의 정치적 술수로 이용한 것은 분명히 조선을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막강한 배후세력으로 사상의 다양성을 철저히 봉쇄시킨 송시열도 왕권주의자 숙종에 의해 인생을 마감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