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의 항간세설] ‘어버이날’에 읽는 ‘어머니의 편지’

이태상

하늘에 별이 이렇게 많았나 싶었다. 사람이 만든 불빛이 모두 사라진 발리에서 유일하게 빛을 발하는 건 별뿐이다. 까만 하늘에 별빛 총총 정도가 아니라 온통 반짝이는 꼬마전구 무더기에 깔아 놓은 밑바탕으로 검푸른 하늘이 슬쩍 보이는 듯하다. 빛과 소리가 사라진 발리의 새해맞이는 항상 익숙하던 것을 잠시 단절하는 것, 일부러 만들어 낸 불편함 속에서 잠시 고요로 빠져드는 것이다.”

2020214일자 한국일보 삶과 문화칼럼 침묵 속에서 발리는 새해를 맞는다에서 전혜진 여행작가는 독백하고 있다. 이어서 그녀는 발리의 새해맞이 풍속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발리에서 사용하는 사카 달력의 새해 첫날인 녀피(Nyepi)는 꼬박 24시간 동안의 자발적인 단절로 시작한다. 전기나 불을 사용하지 말아야 하고 늘 하던 일도 재미있는 놀이도 멈추어야 한다. 소리를 내지 않는 침묵의 날인지라 믿음이 깊은 사람들은 자신의 입을 가리며 침묵을 지킨다. 힌두교에서 저승세계를 지배하는 야마 왕이 매년 한 해가 끝나는 날이면 지옥의 악마들을 세상으로 쓸어내는데, 이때 풀려난 악마가 인간세계에 끼어들지 않도록 발리섬 전체가 사람이 살지 않는 죽은 땅인 양 행세하는 것에서 시작한 전통이다. 모든 것을 끊고 가만히 멈추어 있던 하루가 지나고 나면 발리에 있는 모든 집의 아궁이에서는 새로운 한 해의 불이 지펴진다. 긴 침묵에서 깨어나 이전의 죄가 정화된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리고는, 친구와 친지를 찾아가 그간 알게 모르게 가졌던 미움과 원망에 대해 서로 용서를 구한다. 잠시의 단절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았으니 이제는 다시 서로를 연결하고 지지할 때라는 의미다.”

그러면서 그녀는 우리 모두의 간절한 소망을 이렇게 피력하고 있다.

올해 3, 우리와는 다른 시기에 새해를 맞는 발리 사람들과 함께 우리도 간절한 기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갈 곳을 잃은 양 불쑥불쑥 나타나 세상을 두려움으로 몰아넣는 위협들이 모쪼록 사라지기를,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관계가 회복되고 우리에게 다시 연결의 시간이 돌아올 때 있는 힘껏 서로를 껴안을 수 있기를 말이다.”

 

가족에의 관심과 사랑을 더욱 다지는 5월 가정의 달에 코로나19 팬데믹 현상으로 자택 대피령 속에서 우리는 새삼 가족애와 인류 애 그리고 나아가 자연애(自然愛)를 깊이 더욱 절실히 느낄 일 이리라. 빛과 소리에 매료되었었던 네덜란드인의 후기 인상파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편지 문구를 인용, 영국의 인기 여류작가 안토니아 수잔 바이어트(Antonia Susan Byatt, professionally known as A,S, Byatt 1936 - )1993년에 나온 마음의 열정(Passions of the Mind)’란 수상록에서 사색의 계절에 명상과 상념의 시간 속으로 아래와 같이 산책한다.

 

나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 안 하려고 자연을 주시(注視) 관찰한다. 얼토당토아니하게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다. 내가 칠하는 색깔이 자연의 빛깔에 일치 부합하는가 보다는 자연 그대로 아름다운 것처럼 내 화폭에 나타나는 그대로 아름다운가. 이것이 내 관심사다.”

 

언어나 다른 방식에 의한 우리의 표현력과 함께 우리가 색깔을 감지하고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이 어쩌면 인간에게만 부여된 특전일지 모를 일이다. 다른 생물들은 다른 파장을 알아본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공기와 소리의 흐름 속에 살고 있듯이 빛과 빛깔의 흐름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그 아주 작은 부분만을 감지하고 그 뜻을 이해하려고 애쓸 뿐이다. 반 고흐의 조색(調色)판 팔레트 위의 여러 색의 그림물감 색소 사이의 화학작용과 그 색조의 변조 또한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흐름의 일부 일 따름이다. 저 변화난측한 날씨에 따라 변화무상한 하늘과 나무들같이,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서로 또 우리 자신에게 연관 짓고 관련시킨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우리가 서 있는 입장에서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시각으로 말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의 창작력의 열정이 절정에 달했을 때 반 고흐는 이 모든 것들을 일종의 창조적이고 시적인 조화 속에 수용시킬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모든 것이 균형 잡힌 조화란 언제나 항상 안팎으로 위협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어디 빛의 흐름 속에서 뿐이랴.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우리가 겪는 일이기도 하리라.

 

미국의 언론인 겸 작가인 조세핀 헙스트(Josephine Herbst 1892-1969)1960년 출간된 활기 띤 스페인의 창공(The Starched Blue Sky Of Spain And Other Memoirs)’에서 어린시절 한여름 바닷가에서 지낸 일을 아래와 같이 묘사하면서 어른들이 한 어린아이에게 어떻게 세월의 흐름을 통해 이어지는 한 가족의 부단한 지속성과 일체감을 전해주는지, 그 은밀 미묘하고도 신비스런 방법들을 상기시킨다.

 

밤이었다. 유목(流木), 부목(浮木)을 걷어 모아 지핀 커다란 야영의 모닥불 캠프파이어(camp fire) 불똥이 산지사방으로 튀면서 무지갯빛으로 혹은 유황빛 황녹색의 빛줄기 분수로 뿜어 오르다가 녹청색 웅덩이 속으로 침몰하듯 가라앉는 불빛 속으로 요술쟁이들과 견습하는 그들의 제자들이 마술을 부리고 있었다. 깊은 수면 같은 하늘에 떠서 반짝이는 수많은 별빛과 끊임없이 들려오는 파도 소리로 나는 물속에 잠긴 채 밤이라는 광대한 침상용의 그물 해먹(net hammock), 흔들리는 요람에 누워있는 것 같았다. 없어진 것들과 지나가 버린 일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어른들의 말소리가 때로는 웃음소리로 변하면서 시간과 공간의 아득한 수평선 너머로 넘나들고 있었다. 그 순간 저기(there)’여기(here)’가 되었고 그때(then)’지금(now)’이었다. 마술사들이 그들의 요술 그물을 바다 위로, 사람들이 농사짓고 살던 시골 동네 마을들을 뒤덮어버린 대양에 던지고 있었나 보다. 그렇기에 그들이 되살려내는 세계는 그토록 꿈같았고, 그 환상들은 유령 같았으며, 그 밤은 온통 물속에 잠겼으리라. 그들의 소유인 역사의 산호섬들을 나뭇가지처럼 내게로 뻗어 나눠주면서.”

 

, 지금으로부터 66년 전 고등학교 시절 백운택이란 친구와 함께한 밤에 우리가 살던 서울 동대문 밖 보문동 뒷산 채석장에 올라가 구성지게 불렀던 이별의 노래(박목월 작사/김성태 작곡)가 절로 되살아나 가슴 속 깊이 메아리친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193270대에 인생철학이란 제목으로 행한 그의 마지막 강의에서 오스트리아의 신경과학자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직관과 영감이란 다름 아닌 소원이 성취된 것이라는 착각으로 간주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Intuition and inspiration can safely be counted as illusions, as fulfillments of wishes.”

 

신약 성경 중 하나인 히브리서 111절에 이런 말이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보이는 것은 나타탄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 Now faith is the assurance of things hoped for, the conviction of things not seen”

 

이는 객관성이란 하나의 현실이라기보다 하나의 이상이라는 뜻이었으리라.

 

태국에서는 승려들이 사람이 죽은 시체가 썩어 가는 사진을 보면서 자신들의 육체도 매한가지임을 심사숙고한단다. 부처 자신이 시체 명상(corps meditation)’을 제자들에게 권했다고 한다. 얼마 전 TV에서 보니 자신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관속에 들어가 시체 체험을 하기도 한단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다 조만간 죽는다는 게 기정사실이라면 이 엄연한 사실을 잊고 살기보다 언제나 절감하면서 한시도 허송세월 할 수 없는 일이어라.

 

이 해가, 이 달이, 이 날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면, 이렇게 죽음을 의식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우울해지거나 심각해지기보다 외려 더 명랑하고 경쾌해진다는 사실을 밝힌 논문이 최근 발표되기도 했다. 우리 삶 자체가 꿈꾸듯 하는 환상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어떤 꿈을 꾸어야 할까. 무슨 꿈이면 어떠랴. 사람마다 저마다 제가 꾸고 싶은 꿈을 꾸는 데는 그 어떤 아무런 제약도 있을 수 없으리라.

 

영국 시인 새뮤얼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1772-1834)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항상 낙관하고 꿈꾸다 죽거라.”

 

“Look at the bright side always and die in a dream.”

 

이보다 더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삶의 지침이 어디 또 있을까. 설혹 꿈이 한낱 착각이요 환영이라 하더라도 꿈이 없다면 무슨 현실이 소용 있겠는가. 우리 꿈에 관한 시 세 편 함께 읊어보리라.

 

꿈꾸지 않는 자, 청춘을 포기했네

 

단 한 번도 이룰 수 없는 꿈을 꾸어보지 않은 청춘,

단 한 번도 현실 밖의 일을 상상조차 하지 않은 청춘,

그 청춘은 청춘도 아니다.

허무맹랑하고 황당무계해 보이는 꿈이라도

가슴 가득 품고 설레어 보아야

청춘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야말로 눈부신 젊음의 특권이 아니겠는가.

 

-한비야 오지여행가

 

 

꿈꾸는 악기

 

입을 버리고 말을 버리고,

춤추는 손으로 대답한다.

춤추는 가슴으로 대답한다.

우주는 주인 잃은 꿈꾸는 악기,

네가 울면 허공에 별 하나 뜨고

지상의 목숨들은 탈춤을 춘다.

떨리는 나뭇잎은 가지 끝에서

출렁이는 물결은 바닷가에서

 

-오세영 시인

 

 

꿈을 꾸고 싶다.

 

오늘 밤에는 네 꿈을 꾸고 싶다

절대로 안 된다고 떼쓰지 마라

정말 꿈이란 어딜 가나 지름길이다

꿈만 꾸고서도 하늘까지 갔다 온 기쁨

내일 밤에도 네 꿈을 꾸고 싶다

 

-이생진 시인

 

어젯밤 한 친구가 임태주 시인의 어머니의 편지를 이메일로 보내왔다. 58일이 한국에선 어버이날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읽고 큰 감동을 받아왔겠지만 코스미안뉴스 독자들과 더 좀 나누고 싶어 옮겨 본다. 그 어떤 고답적인 경전 이상의 진솔함과 질박함으로 세상의 모든 진리와 진실을 무색하게 하는 삶의 지혜가 한 통의 편지에 옹골지게 가득 차 있는 보고다.

 

아들아, 보아라.

 

나는 원체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천만 배 고되다. 그리 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 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이다. 서러워할 일도 가슴 칠 일도 아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도 있다. 살려서 간직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무엇을 슬퍼한단 말이냐.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주어진 대로 살았다. 마음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다.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깨꽃은 얼마나 예쁘더냐. 양파꽃은 얼마나 환하더냐. 나는 도라지 씨를 일부러 넘치게 뿌렸다. 그 자태 고운 도라지꽃들이 무리 지어 넘실거릴 때 내게는 그곳이 극락이었다. 나는 뿌리고 기르고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나는 뜻이 없다. 그런 걸 내세울 지혜가 있을 리 없다. 나는 밥 지어 먹이는 것으로 내 소임을 다했다. 봄이 오면 여린 쑥을 뜯어다 된장국을 끓였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재첩 한 소쿠리 얻어다 맑은국을 끓였다. 가을에는 미꾸라지를 무쇠솥에 삶아 추어탕을 끓였고, 겨울에는 가을무를 썰어 칼칼한 동태탕을 끓여 냈다. 이것이 내 삶의 전부다.

 

너는 책 줄이라도 읽었으니 나를 헤아릴 것이다. 너 어렸을 적, 네가 나에게 맺힌 듯이 물었었다. 이장집 잔치 마당에서 일 돕던 다른 여편네들은 제 새끼들 불러 전 나부랭이며 유밀과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챙겨 먹일 때 엄마는 왜 못 본 척 나를 외면했느냐고 내게 따져 물었다. 나는 여태 대답하지 않았다. 높은 사람들이 만든 세상의 지엄한 윤리와 법도를 나는 모른다. 그저 사람 사는 데는 인정과 도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만 겨우 알뿐이다. 남의 예식이지만 나는 그에 맞는 예의를 보이려고 했다. 그것은 가난과 상관없는 나의 인정이었고 도리였다. 그런데 네가 그 일을 서러워하며 물을 때마다 나도 가만히 아팠다. 생각할수록 두고두고 잘못한 일이 되었다. 내 도리의 값어치보다 네 입에 들어가는 떡 한 점이 더 지엄하고 존귀하다는 걸 어미로서 너무 늦게 알았다. 내 가슴에 박힌 멍울이다. 이미 용서했더라도 어미를 용서하거라.

 

부박하기 그지없다. 네가 어미 사는 것을 보았듯이 산다는 것은 종잡을 수가 없다. 요망하기가 한여름 날씨 같아서 비 내리겠다 싶은 날은 해가 나고, 맑구나 싶은 날은 느닷없이 소낙비가 들이닥친다. 나는 새벽마다 물 한 그릇 올리고 촛불 한 자루 밝혀서 천지신명께 기댔다. 운수소관의 변덕을 어쩌진 못해도 아주 못살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물살이 센 강을 건널 때는 물살을 따라 같이 흐르면서 건너야 한다. 너는 네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네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해롭고 이롭고는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세상사는 거 별거 없다. 속 끓이지 말고 살아라. 너는 이 에미처럼 애태우고 참으며 제 속을 파먹고 살지 마라. 힘든 날이 있을 것이다. 힘든 날은 참지 말고 울음을 꺼내 울어라. 더없이 좋은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은 참지 말고 기뻐하고 자랑하고 다니느라. 세상 것은 욕심을 내면 호락호락 곁을 내주지 않지만, 욕심을 덜면 봄볕에 담벼락 허물어지듯이 허술하고 다정한 구석을 내보여 줄 것이다. 별것 없다. 체면 차리지 말고 살아라.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고 귀천이 따로 없는 세상이니 네가 너의 존엄을 세우면 그만인 것이다.

 

아녀자들이 알곡의 티끌을 고를 때 키를 높이 들고 바람에 까분다. 뉘를 고를 때는 채를 가까이 끌어당겨 흔든다. 티끌은 가벼우니 멀리 날려 보내려고 그러는 것이고, 뉘는 자세히 보아야 하니 그런 것이다. 사는 이치가 이와 다르지 않더구나. 부질없고 쓸모없는 것들은 담아두지 말고 바람 부는 언덕배기에 올라 날려 보내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지극히 살피고 몸을 가까이 기울이면 된다. 어려운 일이 없다. 나는 네가 남보란 듯이 잘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마음 가는 대로 순순하고 수월하게 살기를 바란다.

 

혼곤하고 희미하구나. 자주 눈비가 다녀갔지만 맑게 갠 날, 사이사이 살구꽃이 피고 수수가 여물고 단풍물이 들어서 좋았다.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니 내 삶을 가여워하지도 애달파하지도 마라. 부질없이 길게 말했다. 살아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을 여기에 남긴다. 나는 너를 사랑으로 낳아서 사랑으로 키웠다. 내 자식으로 와주어서 고맙고 염치없었다. 너는 정성껏 살아라.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5.08 11:29 수정 2020.05.08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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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