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극동지역을 사람들은 연해주(沿海州:Приморский(프리모르스키:바다와 접한땅)라 부른다. 민족주의 사학자요 언론인인 단재 신채호선생과 헤이그 밀사인 이상설 선생,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쓴 장지연 선생,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선생, 만주벌판을 휩쓸며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무장 최운산장군과 홍범도장군. 이들이 민족운동기초를 닦은곳이 바로 연해주이다. 지금은 중국과 북한그리고 러시아 3개국의 국경이 맞닿은 나진선봉지역 개발이 한창이지만 100년전 현대사(現代史)의 초입이며, 연해주는 우리 독립투사들의 전진기지였던 것이다.
더구나 당시 연해주에서는 1905년부터 1908년까지 두만강 건너인 연추(煙秋: 현재 크라스키노:Краснознамен)지역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을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 대표적인 의병장으로서는 최재형, 이범윤, 홍범도, 안중근 등을 들 수 있다. 당시 재소동포들은 이들 의병장들을 중심으로 활발한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여 일본군에게 큰 위협을 가하였다. 특히, 의병장의 1인인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이등박문(이토우 히로부미, いとう ひろぶみ)을 포살함으로써 한국독립운동의 활성화 및 국내외 동포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하였다.
연해주에 대한국민의회라는 ‘정부’를 조직하다.
3.1 운동 이후 이 지역에 거주하는 동포들은 노인동맹단 등 다양한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여 대일투쟁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될 기미가 있자 연해주 한인들은 유인석을 중심으로 13도의군을 조직하여, 국내로 진공하여 일제를 몰아내고자 하였다. 아울러 성명회 선언서를 발표하여 일제의 조선강점의 부당성을 전 세계에 선포하여 한국의 독립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지역을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11년 연해주 한인들은 한인자치기구로서 권업회를 조직하여 한인들의 자치활동과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아울러 신채호, 이상설, 장도빈 등을 주필로 하는 권업신문도 간행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또한 이동휘 등을 중심으로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 일제에 대항하여 한국의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함으로써 재러한인들의 이러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자 한민학교 등 민족학교를 설치하여 동포 자제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신문 등을 간행하여 국내외 소식전달과 항일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하였다. 대표적인 신문으로는 『해조신문』과 『대동공보』 등을 들 수 있다. 『해조신문』의 경우 국내에서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장지연을 주필로 초빙하였다. 러시아지역의 한인들은 1919년 2월 국내외에서 최초로 대한국민의회라는 정부를 조직하였다. 이때 대한국민의회에서는 최재형, 문창범, 이동휘, 김철훈 등이 중심인물로서 활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단체는 만주와 국내 등지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고자 하는 한편 상해임시정부와도 통합을 이룩함으로써 발전적으로 해체하여 민족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1919년 3월 17일 대한국민의회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후 우수리스크를 시작으로 블라디보스토크, 크라스키노 등 여러 지역에서 3.1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특히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 있는 한인들은 한민학교를 중심으로 활발히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중 노인동맹단 소속의 강우규 의사는 1919년 9월 남대문역(현재 서울역)에서 새로 부임하는 조선총독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일제를 경악케 할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강우규는 1920년 11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당하였다.
가족과 함께 연해주로 이주하다.
1869년 7월 홍수로 인해 함경도 지역의 많은 백성들이 굶어죽거나 혹은 만주나 연해주로 몰래 이주하는 지경에 이르자 최재형가족도 두만강 건너 연해주 포시에트 지역 지신허(地新墟,Tizinkhe)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때가 그의 나이 아홉 살이었다. 최재형 집안이 이주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경원지역이 두만강을 경계로 마주하고 있는 북만주와 러시아인 연해주로 나가는길목인 훈춘건너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주한 지신허는 1864년(고종1)에 대흉년이 들자 해주최씨인 무산사람 최운보(崔運溥,雲實)와 경흥사람 양응범(梁應範)등은 빈곤을 극복하고자 시베리아에 이주, 언어와 생활양식의 불편을 견디며 토지를 개척하였다. 1869년(고종 6) 이 소식이 월경의 기회를 노리던 많은 세궁민(細窮民:매우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해져, 1869년 갑산(甲山),삼수(三水) 등지의 빈민들이 대규모로 국경을 넘어가 최운보의 도움으로 추풍(秋風)에 정착하여 개간을 시작하였다. 이때 최재형 일가는 러시아로 이주하게 된 것이다. 그후 1870년(고종 7) 다시 96명이 시베리아(Sibir,Siberia)로 넘어갔고, 1871년 70세대 415명이 이주하여 피땀 흘려 노력한 결과 수년 후에 모스크바로 유학생도 보내게 되었다. 한편,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개척은 비교적 순조로워 1874년 25명이 이주하여 초가집 다섯 채를 짓고 개척리라 하였는데 l년이 채 못 되어 신한촌(新韓村:일제강점기에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海蔘威(해삼위))에 자리잡고 있던 한인집단 거주지.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는 국외독립운동의 중추기지 구실을 하였다.)이라 부르고 양옥을 짓고 학교와 교회당도 건립하였다. 1875년(고종 12) 안병국(安炳國),김동삼(金東三) 등은 나선촌(羅鮮村)을 개척하였으며 1884년(고종 21) 김석우(金錫雨),김정련(金正連)은 남석동(南石洞)을 개척하는 등의 활약을 하여, 시베리아의 미개척지를 옥토로 바꾸어 놓았다. 특히 개척사업에 도움을 준 것은 1884년 6월에 체결된 경흥개척조약(慶興開拓條約)으로 우리 동포의 자유로운 입주를 허용, 특히 함경도민 다수가 입주, 3.1 운동 당시에는 우리 동포가 50만에 이르렀다.
러시아인 선장의 양자로 들어가다.
러시아 지신허로 이주한 최재형은 너무도 가난한 생활에 가출을 하게 된다. 1871년 집을 나와 전전하다가 포시에트 선착장에서 상선의 어린노동자로 죽자 사자 열심히 일하게 되었다. 그런 그를 귀여워한 러시아 선장과 부인은 자신들의 집에 살게하고 세례를 받게한후 표도르 세베노비치(Цой Пётр Семёнович)라는 러시아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는 선장 부부와의 만남으로 러시아어를 배우면서 교양을 넓힐 수 있게 되었다. 그이후 러시아 선원들에게 발탁되어, 러시아 함대의 견습수부가 되었다. 그후 그는 1878년부터는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무역회사에서, 1882년에는 블라디보스톡-라즈돌노예-슬라뱐카-노보키예프스크-크라스노예 셀로를 잇는 전략도로 건설부에서 통역원으로도 일하며 많은 인생 경험을 쌓아나갔다. 뿐만 아니라 항해를 통하여 견문을 넓혔는데 러시아의 수도 상트베테르부르크방문은 시골소년인 최재형에게는 크나큰 감명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자 자연스럽게 그들은 부모자식의 관계가 이루어졌다. 그는 6년이란 기간동안 선원으로 활동하면서 러시아어와 러시아인들의 생활방식을 익혔고, 견문도 넓혀 러시아에 정통한 청년으로 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1877년 길고긴 항해에서 돌아온 그의 나이는 열 일곱살되는 해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조그만 상점을 열어 4년동안 장사에 대해 많은 일들을 배우며, 자신의 앞날에 필요한 인과관계와 중요한 경험을 쌓아갔다. 그이후 그는 러시아정부의 통역관으로도 활동하였고, 얀치혜남도소의 초대 도헌으로 임명되었고, 당시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지못한 한인들에게 불합리한 소작인제도도 개정하였고, 러시아 지방정부의 한인들에게 러시아화 하는 정책을 펴게 되었다. 그러므로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하게 되었고 한인들 자녀들에게 교육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인들에게 러시아화 교육은 뜻대로 되지 못했다. 이후 최재형은 군수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최재형은 한국인들을 직원으로 고용했는데, 이로 인해 절대빈곤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 최재형은 러시아 연해주 연추에서 활동하였는데, 한국인들의 경제적 자립에 기여한 덕분에 연추의 한국인 사회에서 도헌(군수 정도 되는 공직)에 선출될 정도로 러시아 사회에서의 위치가 높아졌다. 1893년 최재형은 얀치헤(연추) 한인 마을의 책임자(읍장)로 선출되면서 그는 마을에 학교와 교회를 세우는 등, 지역 한인들로부터 높은 신뢰와 덕망을 쌓아나갔으며, 1896년에는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조국의 국운이 위태롭던 시기 그는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한인들의 활발한 지지를 받다.
을사조약 체결로 조선의 국운이 위태롭던 시기인 1906년 제정러시아에 살고 있는 한인 가운데 당시 연해주 사회에서 경제력 및 정치적인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었던 한인공동체 지도자 최재형은 연해주 남부에서 최초의 의병부대를 조직했다. 그는 의병부대를 직접 지휘하거나, 이범윤 등과 연합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했으며, 1909년에는 전 조선총독 이토 히로부미 암살계획에 참여하기도 했다. 1911년 5월 21일 57명의 주요 항일인사들로 구성된 블라디보스톡 비밀회의에서 애국단체『권업회』가 조직되었다. 최재형은 권업회(勸業會)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발한 항일운동을 전개해 나갔으며, 한때 일본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나흘 후 방면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최재형의 적극적이고 활발한 항일활동 배후에는 한인들의 아낌없는 지지와 신뢰가 바탕이 되었다. 그는 노우키예프스크 도헌(都憲)이 되자, 연봉을 은행에 적립하여 그 이자로 동포 자녀 1명씩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유학시켰다. 1904년 러일전쟁 때 러시아 해군소위로 경무관 부속 통역관이 되어 활동하는 한편, 남부소집회감독(南部所集會監督)으로 러시아 군부의 지원하에 동포들을 규합했다. 또한 전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 이범윤(李範允)과 결의형제하고 그를 지원했다. 1907년 8월 대한제국군대가 해산당하여 다수의 군인들이 러시아령으로 넘어오자, 이범윤과 함께 격문을 작성하고 최병준(崔秉俊)·엄인섭(嚴仁燮) 등을 각지에 파견하여 의병·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이듬해 3월 이위종(李瑋鍾)으로부터 군자금 1만 루블을 지원받고,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범윤과 함께 독립군 600명을 훈련시킨 다음,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여 함경북도 경원의 신아산(新阿山), 회령 영산(永山)에서 일본수비대를 궤멸시켰다. 이어 노우키예프스크에 박춘근(朴春根)이 이끄는 독립군 본부를 설치하는 한편, 러시아군에 쇠고기 기름 등을 납품하여 군자금을 마련하고 동포 사회의 정착을 지원했다. 엄인섭·김서윤(金瑞允)·이위종 등과 독립운동단체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불꽃처럼 살다간 연해주의 우국지사
1913년 최재형은 7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이끌고 페트로그라드의 로마노프 왕조 30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으며, 1914년 1월에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열린 한인의 러시아 이주 50주년 기념 행사준비위원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1915년 슬라뱐카 마을에서 헌병에게 재차 체포되어 니콜스크-우수리스크(현재 우수리스크)로 이송되었다가 여론의 압력으로 11일 후 석방되는 등, 또 한 번의 고초를 겪기도 했다. 최재형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항일운동을 위해 대부분 사용하였다. 연해주에 온 의병들을 옛 소비에트연방이 제2차 세계대전때까지 사용할 정도로 성능이 뛰어난 소총으로 무장시키기도 했으며, 러시아의 모든 항일 의병 세력을 단결시킨 동의회를 결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그는 안중근의사의 의거를 지원한 인물이다.『대동공보』를 발행,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던 최재형에게 안중근의사가 찾아온다. 최재형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일본이 아닌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하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한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가 1910년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자, 최재형은 안중근 의사를 지켜주지 못했다고 자책감을 느껴 안중근 의사의 부인과 아이들을 보호하였다. 1910년 2월 『해조신문(海朝新聞)』을 인수하여 『대동공보(大東共報』로 개칭·재간행하여 동포들의 항일독립정신을 고취했다. 또한 노우키예프스크에 한인중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주력하는 한편, 1911년 신한촌(新韓村)에서 홍범도(洪範圖)·이종호(李鍾浩) 등과 함께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일했다. 1917년 최재형은 이번에는 얀치헤 집행위원회 대표로 선임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재러한인대표로 2명의 위원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할 것을 계획하고 이를 추진했다. 그해 4월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재무청장에 선임되었으나 이를 사양했다. 1920년 4월초 일제의 시베리아 출병에 대해 재러한인독립군부대를 총집결하고 사단장이 되어 러시아 적군과 함께 시가전을 전개하다가 김이직(金利稷)·황경섭(黃景燮)·엄주필(嚴周珌) 등과 함께 체포되다. 헤이룽장 성[黑龍江省]의 일본헌병본부로 압송되는 도중 탈출했으나 니콜스크시 남쪽 군사경계선 근처에서 일본군추격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다.
1910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되던 《대동공보(大東共報)》가 재정난으로 폐간되자 이를 맡아 재발행, 격렬한 논조로 일제를 규탄하고 독립을 절규하였다. 또한 노우키예프스크 한족민회(韓族民會) 회장에 취임, 교포자녀들을 위한 한인학교를 설립하였다. 국권피탈 후에는 사태를 관망하며 동지규합에 힘쓰다가 1919년 4월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그 해 11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新韓村)에 본부를 둔 독립단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1920년 4월 일본은 니항사건을 빌미로 연해주 일대에 출병하여 시베리아 혁명군과 한인의병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최재형은 우수리스크에서 체포되었으며 이송 도중 탈주를 시도하였다가 총격을 받고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러시아식 이름은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Цой Пётр Семёнович)이며, 이명은 최재형(崔在衡), 최도헌(崔都憲), 별명은 최 뻬치카, 최 비집게가 있다. 우수리스크에 위치한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옛 집이 독립운동기념관으로 지정되었다. 가족은 두번째 아내 엘레나 외에도 자녀로 4남(표트르[2], 파벨(1900년생), 발렌틴(1908년생), 비켄티(1914년생)) 7녀(베라[3], 나제즈다(1888년생), 류보프(1898년생), 소피아(1902년생), 올가(1905년생), 류드밀라(1910년생), 엘리자베타(1912년생))가 있었다. 가족들은 다른 한인들과 함께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해 뿔뿔이 흩어졌으며 그 중 최초의 한인 출신 러시아 해군 장교였던 둘째 아들 파벨(또다른 이름은 최성학), 딸 류보프는 1930년대의 스탈린의 대숙청에 휘말려 총살당하고 자식들 중 일부는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나기도 한다. 사위들 중 4명(기록이나 증언에 따라 5명)도 총살당하는 등 크게 고생했다. 그의 자식 중 살아남은 건 발렌틴, 올가, 엘리자베타, 류드밀라, 소피아 뿐이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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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사』3∼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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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獨立運動』Ⅲ(金正明 編, 原書房, 1967)
『朝鮮民族運動年鑑』(在上海日本領事館, 東文社書店, 194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시베리아한인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박환, 역사공간,2008)
『국외한인사회(國外韓人社會)와 민족운동(民族運動)』(윤병석, 일주각, 1990)
『소련한족사』(김승화 저, 정태수 편역,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89)
『한국유이민사(韓國流移民史)』 상(현규환, 삼화인쇄출판부, 1976)
「국치직후(國恥直後)의 신한촌(新韓村)과 한민학교연구(韓民學校硏究)」(정태수, 『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韓民族獨立運動史論叢)』, 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논총간행위원회, 1992)
「아령실기(俄領實記)」(뒤바보, 『독립신문(獨立新聞)』(상해판), 1920. 2ܩܪ)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社) 始華湖 文化 史學會 理事長 脫凡 최영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