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찬의 두루두루 조선 후기사]
제15화 옷
보통 의식주라고 해서 옷을 맨 앞에 둡니다. 사실 먹는 것이 인간 생존을 위해서는 제일 중요한데 우리 조상은 왜 옷을 앞에 두었을까요? 옷은 외양을 치장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옷은 추위나 더위를 막는 실용성과 함께 모자 같은 액세서리와 함께 그의 신분, 빈부를 드러내는데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변란이 많고 부유함이 강도의 목표가 되기 쉬운 중국에서는 값비싼 모피는 안에다 입고 겉은 허름하게 다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모피가 밖으로 드러나 자신의 부유함을 뽐냈습니다.
이런 명나라가 말년에 극심한 식량부족으로 나라가 어지러웠는데 그 이유가 쌀을 심은 논에 더 많은 이익을 위해 면화를 심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굶주림 때문에 명나라가 망했다는 것입니다. 구한 말 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에 프랑스군이 한강까지 올라왔다가 구경 나온 사람들이 모두 흰 옷을 입고 있어 군인인 줄 알고 급히 퇴각했다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습니다. 미군이 쳐들어온 신미양요 때에는 서양의 총을 막는다고 베옷을 열 몇 겹 껴입었다고 하니 옷은 나라의 존망이나 국방과도 연관이 있는 듯 합니다.
우리의 옛 조상은 흰색의 옷을 많이 입었다고 전해 옵니다. 그래서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흰색이 빛을 상징하기 때문에 밝은 정신을 추구하는 마음 때문에 입었다고 합니다. 또 임금이나 왕후 등 왕실의 가족이 죽으면 흰색 상복을 입는데 벗을만하면 초상이 나고 해서 또 입기 때문에 흰옷으로 굳어졌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여기다 한술 더 떠서 여자들이 한가하면 딴마음을 먹기 때문에 때 타기 쉬운 흰 빨래를 노상 시키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느 말이 정답일까요? 분명한 것은 옷에 물감을 들이면 옷값이 비싸진다는 것입니다. 모시 한 필을 물 들이려면 모시 값만큼 물감값을 내야 하기 때문이지요. 요즘도 절을 짓는데 5억이 들었다면 단청 값이 5억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나무나 옷에 바르는 천연물감은 중국에서 수입해야 했기에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옷을 만드는 재료인 무명이나 모시, 비단은 저렴했을까요? 비단은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해야 했고 모시나 베 무명도 많은 노동이 투입되어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숙종 때 상평통보가 만들어져 널리 유포되기 전까지는 무명이 돈을 대신하는 물품이었습니다. 세금도 쌀이 아니면 집에서 짠 모시나 무명으로 바쳤습니다. 화폐 기능을 했다는 것입니다.
옷은 여러 이야기를 만들어내니 함경도 같이 추운 지방에서는 아예 무명이 생산되지 않아 짐승의 가죽을 벗겨 입고 다니는 바람에 마치 곰이 걸어 다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또 옷은 돈을 버는 수단이 되어 중국에 인삼을 가져다 파는 역관이나 상인은 그 대가로 비단을 사서 도성의 부호나 고위 관리들에게 팔아 많은 이익을 남겼습니다. 이런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주는 한복을 짓는 전문인도 많았으니 여자가 할 수 있는 마땅한 직업이 없는 시절에 술빚고 떡 만드는 것과 함께 좋은 직업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옷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남에게 주거나 재활용함에 넣지만, 예전에는 어림없는 일이었습니다. 옷이 얼마나 귀했나 하면 부잣집에서 사람이 죽으면 관 속에 입던 옷을 집어넣기도 했는데 무덤을 파서 옷을 꺼내 시장에서 팔기도 했습니다. 그러지도 못하는 사람은 어렵사리 구한 책을 새끼 꼬듯이 꼬아 옷으로 만들어 입었으니 지의(紙衣)라고 했다고 합니다. 한복은 세계적으로 그 아름다움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홍보가 부족해서 코리아 기모노라고 잘못 알려진 것도 있지만 아름다운 곡선과 화려한 색은 칭찬받을 만합니다. 특징은 서양 옷은 여성의 섹시한 몸매를 드러내는 데 있고 한복은 조선 여인의 아담한 몸매를 감추는 데서 고상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