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찬의 두루두루 조선 후기사]
제17화 의학
허준은 ‘동의보감’이라는 의학서적으로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한중일 삼국의 의학발전에 도움이 되었던 동의보감은 ‘본초강목’등 동양의학의 지식을 집대성한 책입니다. 독창적 요소도 가미해 우리나라 땅에서 채취한 약초로 처방하고 지금의 정신과 치료를 연상케 하는 대목도 들어있다고 합니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먹는 것이지만 그에 못지않은 것이 건강한 것입니다. 그러면 조선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얼마나 되었을까요? 1906년에서 1910년 통계로 24세입니다. 1930년 통계에도 다섯 살 미만에 죽는 일이 41%이라고 하며 60살이 넘는 사람이 전체 인구의 5%라고 하니 조선 시대 때에는 더욱 수명이 짧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태어난 지 일년이 되지 않은 경우는 호적에 올리지 않았고 다섯 살이 넘어야 겨우 안도했습니다.
어린이 말고 산모가 애를 낳다 죽는 예가 많았는데 서너 명에 한 명꼴로 사망했기에 아이를 낳는 것은 목숨을 내거는 일이었습니다. 아이 낳을 때 피를 많이 흘리거나 오염이 되어 죽은 것입니다. 이렇게 죽을 고비를 넘겼어도 60살까지 사는 이가 드물었기에 환갑을 맞으면 크게 잔치를 벌였습니다. 하지만 가끔 80살이 넘어 백세까지 사는 희귀한 일도 있었습니다.
영조임금은 83살까지 산 조선 최장수 왕입니다. 왕은 최고의 의료혜택을 보고 있지만, 업무의 막중함으로 오래 사는 이가 드물었습니다. 그러나 영조는 무명옷을 입고 질박한 음식을 먹는 데다 영약인 인삼을 장복했기에 그리 오래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병이 났을 때 어떻게 치료를 했을까요?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는 병이 났을 때 치료할 수 있는 약초가 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선 세종 이전까지는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해서 써야 했기에 아주 부유한 계층이 아니면 약 한 첩 못 써보았습니다. 그러나 백성을 사랑하는 임금이신 세종이 수입한 약초를 전국 곳곳에 심어 약초의 국산화를 꾀했습니다. 그 결과 일부 약재만 빼고 자체 공급이 가능했습니다만 그래도 여전히 약초는 값비싼 물품이었습니다.
서민들은 침과 뜸 그리고 한증막에 의존했습니다. 침과 뜸의 원조는 북방유목민족으로 약초를 구하기 어렵기에 돌을 갈아 만든 침으로 급소인 혈(穴)을 찌르거나 약쑥을 태워 병을 낫게 했습니다. 지금도 침뜸의 효능은 인정받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달리 선택할 것이 없었습니다. 약을 살 수 있는 사람은 한약방을 찾았고 의학을 공부한 양반은 처방전을 만들어 약을 사와 직접 대려 먹기도 했습니다. 일반 서민을 위한 혜민서도 있었지만, 가난해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나라에서 만든 활인서에서 증기찜을 통해 병을 치료했습니다. 이곳에는 무당도 배속되어 활동했는데 환자의 정신을 위로하는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의료혜택이 어려운 시골에서는 떠돌이 의원들이 환자를 보기도 했고 책을 보고 의학을 익힌 식자층에 의해 침을 시술하거나 약 처방을 지어 받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열악한 의료환경이니 오래 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특히 어린 아이와 산모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체념도 빨랐습니다. ‘죽고 사는 것은 다 팔자다.’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전쟁은 말할 것도 없고 전염병이 돌면 순식간에 한 동네가 몰살했는데 주로 천연두와 콜레라였습니다. 천연두는 궁궐에까지 침투해서 왕자나 공주들의 희생도 많았고 나아도 얼굴에 흉터를 남겼습니다. 얼마나 지독했는지 얽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길가에 더 많이 나돌아다닐 정도였다고 합니다. 콜레라는 물을 끓여 먹고 위생만 깨끗이 하면 예방될 수 있음에도 그런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래도 여러 번 겪자 전염병이 돌면 마을을 폐쇄하거나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몸을 피했습니다. 호열자라고 불렸던 콜레라는 깨끗이 닦고 석회물로 씻어내 예방했고 천연두는 우두접종을 통해 막는 방법을 알아내 많은 사람이 천연두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