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열전 靑年 列傳] 다부진 소나무처럼 살고 싶은, 정다솔

삼척에서의 나비효과

39프로젝트의 1인이 되어보겠다고 결심했을 때와는 다르게, 막상 글을 쓰려니 막막했다. 그냥 자유롭게 나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면 된다는데 과연 여느 대학생과 다를 것 없는, 지극히 평범한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싶었다. 무엇보다 나는 우울해 있었다. 20대에 들어와 새로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큰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고, 정작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을 새도 없다보니, 잘하는 일이 곧 좋아하는 일이겠지 싶어 비교적 성과가 잘 나오는 전공 관련 활동을 닥치는 대로 했다.

 

그랬더니 나의 22살은 우울해져 있었다. 그렇게 나는 A4 한 장 분량에 나는 우울해요~’ 라는 소리만 주구장창 써놓고 원고 마감일 일주일을 앞둔, 무더운 7월의 중복에 가장 친한 친구, H와 함께 삼척으로 떠나버렸다.

 

고등학교 친구인 H와 내가 삼척으로 여행지를 정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우리는 조용하면서도 예쁜 자연이 있는 곳에서 최대한 여유를 만끽하고 싶어 했다. 여행지를 정할 당시에 우리 둘은 바쁘게 반복되는 학교생활에, 의미 없는 만남들에 참 많이 지쳐있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최대한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고 여유롭게 쉬다 올 수 있는 곳에 가고 싶었던 것이다.

 

사진으로 본 삼척의 고요함과 에메랄드 빛 바다는 그런 우리에게 최적의 여행지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5시간이나 걸려 삼척에 도착한 우리를 맞는 건 우중충하고 흐린 날씨에, 에메랄드빛이 아닌 흐리멍덩한 푸른색의 바다였다. 게다가 버스는 한 시간에 한 대 밖에 없었고, 다른 동네로 이동할 경우에는 2배의 금액을 내야하는 이상한 택시 요금제도가 있었다. 때문에 우리는 멀리 나가지도 못하고, 우리가 묵을 민박 근처에서 서성여야 했다. 물론 바다여행의 하이라이트인 회 먹기도 그 근처에서 해결해야만 했다. 회와 소주로 우리의 아쉬움을 달래기로 했다.

 

회에 매운탕까지 먹다보니 어느새 그 횟집에 손님은 우리 둘 뿐이었고, 사장님은 과묵한 모습으로 묵묵히 우리 뒤 테이블에 앉아 계셨다. 우리가 사장님께 매운탕이 너무 맛있다고 먼저 말을 건네자, 사장님께서는 맛의 비결을 이야기 해주시며, 서서히 입을 여셨다. 그 뒤로 우리는 사장님과 계속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우리 아빠보다 조금 더 연세가 많아 보이시는 사장님은 과묵해 보이셨던 첫 인상과는 다르게, 손녀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재미있고도 느긋하게 이야기를 하셨다.

 

우리가 바다 이야기를 꺼내면 바다를 찾아 무작정 떠났던 사장님의 청년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셨고, 우리가 연애이야기를 털어놓으면 어릴 적 좋아했던 소녀와의 풋풋한 에피소드를 들려주시면서 연애 코칭도 해주셨다. 또 우리의 결혼관에 대해 이야기하면 우리와 동갑내기 딸을 둔 아버지의 입장에서 말씀해주시기도 했다. 아마 이 날이, 내가 처음으로 아빠의 심정에 최대한 가깝게 간 날일 것이다. 때로는 당사자가 아닌 제 3자가 이야기를 해줄 때 그 마음의 크기가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인지 더욱 쉽게 와 닿으니 말이다.

 

사장님께서는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우리들에게 수박과 생맥주까지 내어주시면서 우리의 고민을 함께 나눠주셨다. H와 나는 낯선 곳에서 만난, 낯선 어른과 이렇게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오랜 시간 나눈 것이 아마 처음이었다. 세 시간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우리 때문에 가게 문을 닫지 못하고 계신 걸 뒤늦게 알아차린 우리는 급히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그런 우리에게 사장님은 구하지 못해 아쉬워했던 삼척해양레일바이크 표를 구해 줄 테니 내일 아침 일찍 다시 가게로 찾아오라고 하셨다. 사장님은 감사하게도 끝까지 친절을 베풀어주셨다.

 

그렇게 우리는, 좋은 인연을 만났다는 기쁨과 감사함을 느끼며 민박집을 향해 걷는 동안, 사장님을 만나기 전과 후로 삼척 여행에 대한 만족도가 달려져 있음에 크게 공감했다. 사장님을 만나기 전에는, 삼척의 고요함과 여유로움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다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서 그다지 만족스러운 여행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장님과의 오랜 대화를 끝마치고 나서부터는 삼척에 와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족스러워했다.

 

어쩌면 H와 내가 한참,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회의감을 느끼고 있던 참이라 사장님과의 만남이 더욱 소중하고 의미 있게 다가온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 날 나는 처음으로 좋은 사람이 가진 힘과 영향력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달은 날이었다.

 

나에게 어른은 딱 두 부류로 나뉜다. ‘닮고 싶은 어른닮고 싶지 않은 어른’. 전자를 보면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고, 후자를 보면 나는 늙어서 저렇게 되지는 않아야지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동안 일상 속에서 닮고 싶지 않은 어른의 모습을 더 많이 보아왔다. 지하철에서 쩌렁쩌렁 이야기를 나눈다던가,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 등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그들의 모습이다.

 

하지만, 당연히 사장님은 나에게 있어 닮고 싶은 어른이었다. 사장님은 세대를 아우르는 소통의 힘이 있었다.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내가 아빠에게서조차도 느꼈던 세대차이의 어쩔 수 없는 거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사장님은 우리의 이야기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눈높이에서 들어주셨다. 그래서인지 아빠 앞에서 털 어 놓지 못할 이야기를 사장님께는 스스럼없이 털어놓았고, H도 나밖에 모르는 자신의 고민에 대해 사장님께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젊은 세대들의 고민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주고 이해해주는 어른의 모습이 참으로 멋져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사장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또한 좋은 사람임을 깨닫게 하셨다. 삼척에서의 마지막 날, 어떻게 해서든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는데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아이스크림 한 봉지를 건네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러자 사장님은 자신 역시 아무 손님하고 밤새 이야기하지 않는다며, 우리가 아무나가 아니었으니 그랬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좋은 사람의 입을 통해 나 또한 충분히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니, 그 때의 기분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좋았다.

 

뭔가 그 때의 기분 좋음은 평소 내가 무언가를 성취했을 때의 기분 좋음과는 약간 다른 감정이었다. 내가 나의 목표를 이루어 나 스스로 자랑스러울 때, 나는 자주 허탈감을 느끼곤 했다. 그 때는 그 허탈한 감정이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도통 감 잡을 수 없었는데, 사장님을 만나고 느낀 기분 좋음덕분에 이제는 알 것 같다. 기분 좋음은 나를 더 이상 허전하게 만들지 않고, 속이 꽉 찬 느낌을 가져다준다.

 

이로써, 인간에게 좋은 사람과의 관계 맺기, 그리고 그로부터 얻는 감정들이 가장 중요하고도 궁극적인 것이고, 성취의 기쁨은 그것들이 없으면,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부수적인 것임을 깨달았다.

 

사장님과의 시간 덕분에 H에게서도 좋은 사람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랑 가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이런 생각이 떠올랐었다. ‘왜 사람들은, 저 말을 누구에게나 똑같이 증명된 진리마냥 이야기 할까?’ 솔직히 나에게 저 말은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칠 때처럼 번쩍이며 크게 다가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당연히 국내여행보단 해외여행이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았고, 아시아여행 보단 유럽여행이 더 좋아보였다.

 

하지만, 처음 삼척에 도착해서 기대했던 파도의 모습을 보지 못했어도, 사이트에서 보았던 깔끔한 민박의 모습이 아니었어도, 버스가 하루에 3번 밖에 운행하지 않음을 알게 됐을 때도 H와 나는 황당함에도 불구하고 서로 마주보며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낙엽이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던 사춘기 시절처럼 그 모든 상황을 웃음으로 넘겨 버렸다. 지금까지의 나는, 생각과는 다른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보단 불평하기 바빴다. 그랬던 내가

너그러워 질 수 있었던 것은 내 태도에 변화가 생긴 것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사람과 내가 만난 사람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저 문구에 몇 마디를 더 추가하고 싶다. ‘여행은 어디를 갔고 무엇을 했느냐보다, 누구랑 갔고 그 곳에서 누구를 만났느냐가 더 중요하다. 이렇게 사장님과의 만남을 통해 깨달은 것들을 하나하나 써 내려가다 보니 나비효과가 생각났다. 사장님은 나에게 마치 한 마리의 나비와 같았다. 사장님의 이야기, 배려, 행동 등의 작은 날갯짓은 나의 가치관을 뒤흔들 정도로 강력했다. 이제껏 내 인생의 목표는 앞으로 내가 갖게 될 일과 관련된 것이었다.

 

무엇으로, 어떤 모습으로 성공할 것인지를 항상 고민했고 더 좋은 일을 가지려 욕심을 부리기도 하고, 계속해서 어떠한 결과를 성취하려 했다. 그 성취의 과정이 너무나 힘들고 지침에도 언젠가 올 미래에 대한 욕심 때문에 그 끈을 자꾸 놓지 못했다. 지금은 힘들어도, 언젠가는 이 끈이 나를 행복으로 데려다 주리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끈을 놓아도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비로소 사장님과의 만남을 통해 깨우친 것 같다.

 

내 옆에는, 사장님에게서 느낀 나의 감동을 함께 느끼고 있는 H가 있다. 이것은 마치, 내가 굉장히 감명 깊게 읽은 책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 역시도 재미있게 읽었다며 그 책에 대해 오랫동안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결국, 이런 사소한 행복이 이제는 결코 사소하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임을 깨달은 덕분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내 인생의 목표를 일과 관련된 것이 아닌, 사람에 대한, 사람을 향하는 것으로 바꾸고자 한다.

 

그렇게 된다면 이제 나는 더 이상 행복한 인생의 모습을 좋은 직장과 좋은 집에서 찾지 않고,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고, 그들로부터 배워서 성장하는 나의 모습에서 찾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삼척에서 찾은, 앞으로 내가 행복해지는 방법이다.

 

삼척에서 돌아오자, 나는 더 이상 우울해하지 않았다. 삼척에 가기 전에는, 해가 갈수록 점점 진실된 나의 사람들이 줄어든다는 사실이 너무나 허탈하고 회의감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허한 마음이 들기보다는 오히려 지금까지도 내 옆에 있어주는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 더 집중할 수 있고 그 사람들과 더 깊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하다. 더 이상 떠나가는 인연들이 아쉽지 않고, 얕은 관계들에 깊게 의미부여하고 싶지 않다. 이런 생각에까지 도달하자 나는 39프로젝트를 통해 어디에선가 옛날의 나처럼, 새롭게 맺은 관계들로부터의 혼란스러움과 회의감에 힘들어하고 있을 또래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바로 노트북을 열어 떠나기 전에 썼던 글들을 모조리 지우고 삼척에서의 기억을 다시 더듬어갔다. 그들이 내 에피소드를 통해 조금이라도, 얕은 관계들에 마음 아파하며 연연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치관이라는 것은 참 바꾸기 어려운, 견고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바꾸기 어려운 가치관을 한 번 본 사람을 통해 바꿀 수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세상은 누굴 만나고 누구와 함께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을 바꿀 수 있고, 또 많은 것이 달라 보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과거의 나와는 다르게 세상을 보고 있다. 좋은 사람 덕분에, 세상에 더욱 쿨해질 수 있었던 22살의 여름이라, 시원했다. 시원한 여름을 선물해준 사장님과 H에게 이 글을 바친다.


전명희 기자
작성 2018.09.09 14:20 수정 2018.09.16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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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산님 (2018.09.09 15:00) 
젊음의 향연
신선하고 아름다운 글입니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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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