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는 숲과 호수의 나라다. 중앙아시아에 살던 핀(Finn)족이 정착한 땅(Land)이 스웨덴어로 핀란드이고 핀란드어로는 수오미(Suomi)다. 울창한 침엽수로 덮인 숲과 10만 개가 넘는 호수를 지닌 나라. 자유가 넘치는 이 숲과 호수에서 소박하면서도 평화로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
대형 크루즈선 실자라인은 오후 4시 45분 스웨덴 스톡홀름 항을 출발하여 핀란드 옛 수도 투르쿠 항을 향해 항해를 시작한다. 배가 스톡홀름 항을 빠져 나오니 수오멘린나 요새가 보인다. 유네스코 세계 유산 목록에 등록되어 있는 이 요새는 18세기 중반 스웨덴의 주도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지어졌는데, 19세기 제정 러시아 시절에는 헬싱키를 지키는 수도 방위 전진기지 역할을 하게 된다. 섬과 연안에 작은 배와 별장들이 연이어서 보인다. 그러다가 이런 모습들이 시야에서 사라지면 발트 해 한가운데로 나온 것이다.
배 안에서는 탑승권 한 장으로 모든 게 해결된다. 객실 키, 저녁과 아침 식사 쿠폰, 심지어 면세점에서는 여권과 할인 쿠폰 역할도 한다. 바와 클럽이 여러 군데 있어서 취향대로 술과 춤을 즐길 수 있다. 물론 돈은 좀 들지만. 카지노 룸도 있고, 지나는 길에 가볍게 배팅할 수 있도록 복도에 배열된 기계들이 여행객들을 유혹한다.
바다를 보며 식사할 수 있는 7층 뷔페의 창가는 이미 만원이다. 우선은 연어와 햄, 새우 등 해산물로 식사를 시작한다. 청어절임은 대략 여덟 종류가 있는데, 한국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음식이어서 두 접시나 비운다. 얇은 크리스피 브레드나 크래커에 버터나 마요네즈를 살짝 바르고 청어절임 한 조각을 얹은 후 다진 양파를 조금, 그리고 레몬즙 한 방울을 뿌린 후 와인 한 모금을 먼저 마시고 입으로 쏘옥 넣는다. 소문대로 별미다. 청어절임이 비리고 시큼하다고 남들은 피하는데, 물기가 그대로 남은 우리 청어 과메기와 비슷하다.
투르쿠에 도착해서 하선한 후 헬싱키행 버스를 탄다. 버스가 투르쿠 시내를 벗어나자 차창 밖으로 간간히 이어지던 건물들은 끊어지고 누렇게 물든 넓은 밀밭이 이어진다. 비에 젖어 더욱 색이 짙어진 황금빛 밀밭 뒤로 작고 예쁜 농가들이 여러 채 서있고 그 뒤로 숲이 우거져 있다. 물기를 머금은 구름이 숲 위로 살며시 내려앉는다. 이런 풍경은 헬싱키에 도착하는 2시간 동안 반복해서 연출된다. 하늘은 맑다가도 갑자기 광풍이 일고 검은 구름으로 뒤덮여 버리기도 한다. 이 광경은 폭풍이 몰아치듯 격정적으로 시작하여 감미롭고 서정적인 선율로 끝맺는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를 연상시킨다.
헬싱키 외곽으로 들어서니 일요일 아침거리는 한산한다.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 집들은 하나같이 심플하면서도 멋지다. 절제된 미학의 건축물을 보는 듯싶다. 시내 중심지 거리도 한산하기는 마찬가지다. 간간히 산책하는 사람들, 아침을 달리는 사람들, 큰 가방을 끌고 다니는 여행자들도 눈에 띈다. 외곽에서 중심으로 가면서 오래된 집들이 많이 눈에 띈다. 그 사이로 노면 전차가 지나간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비는 완전히 그쳤다.
핀란드만으로 돌출한 반도에 위치한 수도 헬싱키는 1550년 현 위치에서 북쪽에 스웨덴의 구스타브 1세 바사가 한자동맹 도시인 에스토니아의 탈린을 견제하기 위해 건설한 것이 도시의 시초다. 헬싱키의 입구에 수오멘린나 해상 요새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헬싱키는 오랫동안 해안의 작은 도시에 불과했다. 1812년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가 스웨덴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 러시아 자치령인 대공국 핀란드의 수도를 투르쿠에서 헬싱키로 옮기면서 도시는 급속히 성장한다. 근대적 건축물이 전통적인 교회 건축물과 잘 조화되어 청결한 도시 헬싱키는 2012년 세계 디자인 수도(WDC)로 선정된다.
북유럽 스타일은 미니멀하고 실용적인 디자인이 인기를 끌면서 주목받기 시작한다. 핀란드 사람들은 자연친화적이고, 아날로그적인 것을 소중히 여기며, 일상의 소소한 행복과 삶의 질을 무엇보다 중시하며 살아왔다. 그들의 삶 한가운데 디자인이 있다. 사용자 중심의 편리하면서도 소박한, 그러나 들여다볼수록 아름답고 실용적인 디자인은 핀란드 사람들의 사는 모습과 닮아 있다. 그래서 수도 헬싱키는 몇 년째 ‘모노클’, ‘뉴스위크’, ‘포브스’ 등 유수의 잡지 서베이에서 ‘세계에서 살기 좋은 도시’ 선두권 랭킹을 유지하고 있다. 2018년에는 노르웨이를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 1위로 올라선다.
알바르 알토는 20세기 건축과 디자인에 관한 한 핀란드의 국제적인 위상을 최고로 올려놓은 주인공이다. 만네르헤임 거리에 있는 그의 대표적인 건축 작품 ‘핀란디아 홀’은 세계적인 건축물로 유명하다. 핀란디아 홀에서 서북쪽으로 약 500m 정도 떨어진 호숫가 숲에는 시벨리우스를 기념하는 공원이 있다. 핀란드 여류 조각가 엘리아 훌티넨이 시벨리우스 사후 10주년을 기념하여 1967년에 제작한 것으로, 기념비 형상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파이프 오르간을 연상하게 하는 형상은 시벨리우스의 웅장하고 신비로운 음악 세계로 인도해주는 듯하다.
교향시 ‘핀란디아’를 비롯하여 조국에 대한 사랑과 민족의식을 주제로 한 곡들을 다수 작곡해 핀란드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온 시벨리우스. 핀란디아를 작곡한 1899년 당시 핀란드는 제정 러시아의 압제에 시달리는 속국이었다. 자치권과 언어의 자유를 억압당한 핀란드 민중들은 곳곳에서 러시아에 저항하는 독립 운동을 일으키는데,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이 바로 시벨리우스가 작곡한 ‘핀란드여 일어나라(Suomi herää)’다. 핀란드의 아름다운 자연을 장엄하게, 때로는 심금을 울릴 정도로 애절하게 표현한 곡이다.
바람소리와 새소리가 들리는 시벨리우스 공원에서 이 곡의 첫 구절을 머리에 떠올려본다.
Oi, Suomi, katso, sinun paivas’ koittaa,
Yon uhka karkoitettu on jo pois.
오, 핀란드여. 보아라, 너의 날이 밝아오는 것을.
험난한 밤의 장막은 이제 걷히었도다.
핀란드는 노르웨이나 스웨덴과는 또 다른 느낌을 지닌 나라다. 핀란드로 넘어오면서 시차도 1시간 생겼고, 다른 나라들과 달리 어디서나 유로가 통용되며, 수더분하고 수수한 사람들이 많이 산다. 오랜 기간 러시아의 지배를 받아 그런지 사회주의 잔영이 남아있다. 그래서 이런 곳을 ‘디자인의 나라’라고 부르는 게 살짝 이해가 되지 않기도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들의 수수한 삶과 세련된 디자인이 절묘하게 어울려 공존하고 있는 곳이 바로 핀란드다.
템펠리아우키오 광장 근처에 위치한 템펠리아우키오 교회는 1969년 수오마라이넨 형제 건축가의 설계로 바위산 위에 자연 환경과 조화를 이뤄 세워진 루터교 교회다. 천장과 외벽 사이에 원형으로 된 창을 만들어 최대한 자연광이 들어오도록 설계되었고, 천연 암석의 느낌을 그대로 살린 건물 내부가 인상적이다. 내부 암벽에서 이끼가 자라고 있어 자연미와 생동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오랫동안 스웨덴 지배하에 있던 핀란드가 러시아로 소유권이 넘어가서 세워진 헬싱키 대성당은 헬싱키 시가지의 구심점을 이루는 원로원 광장에 있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이다. 이런 연유로 헬싱키 곳곳에서 스웨덴과 러시아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특히 헬싱키 대성당 앞에 펼쳐진 원로원 광장 한가운데에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동상이 아직도 그대로 세워져 있다. 핀란드가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것은 1917년 12월 6일, 그 후 4개월간 내전을 겪고 완전한 주권국가가 된 것은 1918년 5월이다. 그러니까 핀란드는 100년 역사의 신생국인 셈이다.
핀란드와 러시아 사이처럼 핀란드와 스웨덴 두 나라 사이에도 민족적 갈등이 존재한다. 그 정도는 한국과 일본 관계보다 골이 더 깊다.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복지 정책으로 경쟁하고, 가장 합리적인 시민의식으로 견제하는 두 나라를 보는 시각은 제3자적 관점에서는 색다르고 흥미롭다.
원로원 광장에서 항구 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나오는 마켓광장은 현지인들도 많이 이용하는 곳이다. 채소, 과일, 생선, 그리고 각종 기념품과 액세서리까지 다양한 상품을 팔고 있다. 그리고 즉석에서 만든 음식들을 만날 수 있는데, 화롯불에 직접 구워 조리한 무지개송어나 순록 소테 같은 전통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마켓광장에 오니 어떤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2007년 개봉된 ‘카오메(갈매기) 식당’에서 주인공 사치에가 미도리와 함께 식당에서 쓸 생선과 야채, 과일을 사러 나오는 곳이 바로 여기다. 이 영화는 그냥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을 그려낸 전형적인 일본영화다. 마켓광장 근처 모퉁이에서 무작정 일본식당을 시작한 주인공 사치에는 헬싱키로 여행 온 미도리와 마사코를 우연히 만나 세 여자가 식당을 같이 하면서 일어나는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낸 슬로우로 전개되는 수필같이 담백한 힐링 영화다. 주인공 사치에는 소소한 것을 즐긴다. 즐거운 삶이란 결국 소소한 만남과의 일상이다. 그녀의 삶에 대한 담담한 태도는 상처 하나 쯤은 안고 사는 관객들을 위로해 준다. 일상이 짜증날 때 이 영화를 보면 행복해 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시장 근처에는 이 영화를 직접 촬영한 식당이 아직도 ‘카오메 식당’ 간판을 달고 영업 중이다. 음식 맛은 별로라고 소문났지만 영화를 잊지 못하는 일본과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원로원광장에서 10분 거리인 헬싱키대학교 근처의 한식당으로 이동해서 북유럽 여행 중 처음으로 우리 쌀밥에 육개장, 잡채, 호박전, 김치 식단의 황홀한 식사를 즐긴다. 음식이 정갈하고 입맛에 딱 맞을 뿐 아니라 양도 푸짐하다. 아르바이트로 서빙하는 늘씬한 핀란드 미녀가 우리말을 너무 잘해 연유를 물었더니 아버지가 한국으로 파견 근무 하는 동안에 가족들과 서울에서 몇 년 간 살면서 우리말을 배웠다는데 너무 반갑고 한편으로 대견스럽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건축 1001’에 속하는 헬싱키 중앙역은 비교적 짧은 경력의 건축사 엘리엘 사리넨이 공모전에서 우승하여 화제가 된 건축물이다. 당시 유행하던 유겐트슈틸 양식인데, 스칸디나비아판 아르누보로 해석하면 무리가 없다. 핀란드 주요 도시와 연결되고, 공항철도와 트램도 운행하며, 국제철도노선을 타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경유해서 모스크바까지 갈 수 있다. 역 앞에는 헬싱키 최대 백화점인 스톡만과 마리메꼬 매장, 그리고 핀란드 건축계의 거장 알바 알토가 설계한 아카데미아 서점이 있다.
이제 북유럽 4국의 여행은 종지부를 찍고, 중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또 다른 미지의 땅, 발트 3국으로 떠난다. 그 첫 나라가 발트해의 보석, 에스토니아 탈린이다.
핀란드의 숲과 호수 못지 않게 마음이 끌린 것은 이곳 사람들이다. '느림의 미학'을 즐기듯 여유로운 그들을 보면 알레그로가 지나고 안단테에 들어갔을 때의 감동처럼, 이국적 정서, 엑조티시즘(exotism)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또 그들은 검소하지만 결코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 않지만 고상하다.
여계봉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