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의 대중가요로 보는 근현대사]

화류춘몽

이화자의 <화류춘몽>

1940년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이화자 노래

 

화류춘몽(花柳春夢), 노래 이름부터 감성불꽃이 피어오른다. 꽃버들의 봄꿈이라. 제목에 함의 된 꽃버들은 기생을, 봄꿈은 그녀들 가슴속에 품은 삶의 회한이다. 1940년 오케레코드에서 발매한 이 노래는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조명암이 노랫말을 짓고, 김해송이 곡을 엮어서 이화자의 목청에 실었는데, 곡을 지은 사람이 김해송·김령파·김부해라는 설도 분분(紛紛)하다.

 

 꽃다운 이팔청춘 울려도 보았으며 / 철없는 첫사랑에 울기도 했더란다 / 연지와 분을 발라 다듬는 얼굴 위에 / 청춘이 바스라진 낙화일세 / (마음마저 기생이란) 이름이 원수로다 // 점잖은 사람한테 귀염도 받았으며 / 나이 젊은 사람한테 사랑도 했더란다 / 밤늦은 인력거에 취하는 몸을 실어 / 손수건 적신 적이 몇 번인고 / (이름조차 기생이면) 마음도 그러냐 // 빛나는 금강석을 탐내도 보았으며 / 겁나는 세력 앞에 아양도 떨었었다 / 호강도 시들하고 사랑도 시들해진 / 한 떨기 짓밟히운 낙화 신세 / (마음마저 썩는 것이) 기생의 도리냐.’


▶ https://youtu.be/0wDKUuFWIxE

 

노래는 기생들의 삶의 애환을 상황별·시간대별·상대하는 신분계층별로 적확(的確)하게 묘사했다. 그래서 대중가요를 시대의 서사라고 하며, 축소된 인류학적 잣대라고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팔청춘·연지와 분·철없는 첫 사랑·바스라진 낙화·밤늦은 인력거·금강석 다이아몬드·겁나는 세력 등 구절마다 가슴이 저려온다. 노랫말에 ()로 부분은 토크멜로디라서 더욱 귓전에 쟁쟁 울린다. 노랫말 중 시대상황 어휘는 연지와 분·인력거다.

 

연지(臙脂)는 화장을 할 때 볼에 바르는 붉은 색 재료다. 이때 이마에 동그랗게 칠하던 것을 곤지라고 한다. 연지기록은 BC 1150년경, ()나라 주왕(紂王) 때부터라고 하니, 31백여 년 전이다. 우리나라는 신라여인들이 연지화장을 했단다. 연지는 궁중 후궁들이 생리기간 표시로 뺨에 발랐다는 설도 있고, ()나라 손화(孫和)의 부인이 뺨에 난 상처를 치료하려고 흰수달피 분말에 옥과 호박가루를 섞어서 발랐는데, 다른 여인들이 모방하였다는 설도 있다. 연지 재료는 잇꽃(홍람·홍화)과 주사(朱砂, 붉은 광물질)이다. 신라에서는 잇꽃으로 연지를 만들었고, 고구려에서는 주사로 만들었단다.

 

 

()은 얼굴이 희게 보이도록 바르는 화장품으로 백분(白粉)과 색분(色粉)이 있으며, 일반적으로 흰 가루분을 가리킨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용한 것으로 보며, 692년 일본에서 연분(鉛粉)을 만든 승려가 신라 출신이었단다. 우리나라 개화기에 사용되었던 연분은 박가분·서가분·장가분·서울분·설화분 등이 있었다.

 

인력거(人力車)는 사람을 태우고 사람이 끌고 가던 수레. 두 개의 바퀴 위에 사람이 앉을자리를 만들고 포장을 씌운 것. 인력거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894(고종31) 일본인 하나야마(花山帳場)10대를 수입하여 서울 인천에 운행한 것이 시초다. 초기 인력거꾼은 일본인이었으나 뒤에 우리나라 사람으로 바뀌었다. 이 인력에 술에 취한 몸을 의탁하고 밤거리를 누비던 기생들은 신분은 천민(賤民), 표면의 삶은 양민(良民), 마음 속내는 황막한 벌판이었다. 1930년대 신문사 같은 곳에는 자가용 인력거를 두었었다.

 

1911년 우리나라 인력거는 1,217(당시 자동차 2, 객마차 110), 1923년에는 4,647대로 늘어났으며, 서울에서 371,816대가 운행되었단다. 1924년 자가용인력거는 1,509대인데, 소유자는 한국인(936일본인(482프랑스인(77기타 외국인순이었다. 1908년에는 인력거영업허가·인력거꾼자질·운임·속도·정원·교행법 등을 명시한 인력거영업단속규칙이 공포되었었다. 이는 해방광복 무렵 서울에서는 자취를 감추었으나 지방에서는 6.25전쟁 이후까지 운행되었단다.

 

대한제국은 1909년에 관기제도(官妓制度)를 폐지했다. 이때 생활의 근거지였던 관가(官家)를 잃은 기생들이 삼삼오오 서울로 모여들었다. 1913년 서도출신들이 다동조합을, 서울과 남도출신들은 광교조합을 구성하였다. 이후 생겨 난 것이 한성·다동·대동·경천·조선권번. 권번(券番)이라는 명칭은 1914년부터 사용했다.

 

이 노래가 발표된 1940년대 조합원 기생은 2천여 명, 그 시절을 전후하여 불려 진 기생노래는 산 팔자 물 팔자·꼬집힌 풋사랑·하룻밤 풋사랑·평양기생·홍등가의 여인·홍도야 우지마라·댄스의 순정·에레나가 된 순이등이다. 권번에는 1·2·3번수들이 있었으며 한 살 위면 언니, 두 살 위면 형님, 다섯 살 위면 아주머니라고 불렀다.

 

기생은 삼국시대 유녀(遊女)에서 비롯되었으며, 조선은 개국과 함께 중앙집권체제를 마련하면서 중앙·지방 관아에 기녀를 배치하였다. 이들은 천민에 속했지만 시····(····)에 능하여, ‘천민의 몸, 양반의 머리라고 일컬었다. 조선시대에는 공창제도(公娼制度)는 없었는데, 경술국치(庚戌國恥) 19163월 데라우치 총독이 도입하여 공창제도로 공포했다. 이것은 19471014<과도정부 법률제7>에 의하여 폐지되었다.

 

이 노래를 부른 이화자는 본명이 이순재(1916~1950). 그녀는 기생이 아니라 부평지방 주막집 주모였다는 설도 있다. 생멸연도도 자료마다 차이가 난다. 이 음반이 발매되었을 때 기생들의 반응은 대단했단다. 자신들의 신세타령 애환을 담은 노래였기 때문이다. 이 노래를 들은 기생들이 자살소동을 벌이기도 했다니 짐작이 간다.

 

1930년대 인기가수 투표결과를 보면 기생출신이 많다. 왕수복·선우일선·김복희·이화자 등. 왕수복과 선우일선은 포리돌 소속 전속가수. 당시 6대음반사(빅타·콜럼비아·포리돌·오케·시에론·태평)는 경쟁적으로 가수발굴에 힘을 쏟았다. 타킷은 주로 기생가수들이었단다


유차영 선임기자 / 한국콜마 상무이사/ 솔깃감동스토리연구원장


 



편집부 기자
작성 2018.09.11 16:13 수정 2018.11.14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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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