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찬의 두루두루 조선 후기사]
제19화 거리의 꾼
지금은 ‘꾼’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꾼을 예전에는 광대, 딴따라 등으로 비하했지만, 지금은 존경받는 연예인이나 만인의 우상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꾼은 신분상 천민계급에 속하고 경제적으로도 빈곤했기에 업심받았지만, 약방의 감초처럼 꼭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조선은 유교 국가 이념으로 세운 나라입니다. 공자, 맹자로부터 발전한 유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꼭 한 가지 빠진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악(樂)이었습니다. 마음의 즐거움 대신 엄숙함이 들어앉았습니다. 물론 아악이나 궁중무용이 있었지만, 그 테두리를 벗어나 인간다운 즐거움을 만끽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음주가무의 피가 흐르고 있지 않습니까.
꾼을 만드는 ‘끼’는 기생들의 교방무나 창으로 이어왔다면 길거리를 떠도는 꾼들은 서민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습니다. 요즘은 개인기라고 부르고 성대모사라고 하는 것을 예전에는 구기(口技)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의 목소리나 갖가지 짐승의 소리를 흉내내는 기술이지요. 이것을 심심풀이로 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 앞에서 돈을 받고 보여주니 연예인이지요. 입으로 거위, 닭이 우는 소리를 묘사하는 것은 물론이고 피리, 거문고 연주까지 흉내 내어 구기자가 개 짖는 소리를 하면 동네 개들이 모두 따라 짖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구기자의 기능이 발전해 성대모사에 그치지 않고 스토리를 만들어 일인다역의 연기까지 공연하곤 했습니다. 이들은 주로 길가에서 하기도 했지만, 기예가 뛰어난 사람은 기생집에서 공연했고 사대부 집에 불려 가 공연하기도 했다고 하니 그 기능이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또 기존에 알려진 창이나 민요 대신 창작 노래를 지어 떠돌아다니며 노래를 불러주고 돈을 받는 걸인에 가까운 꾼도 있었고 수준 높은 재담으로 나중에는 소설로 엮을 정도의 재담꾼도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 재담꾼으로 이름난 사람으로 김옹이 있었는데 김씨 성의 늙은이라는 말이지요. 별명이 설낭(說囊) 즉 이야깃주머니라고 할 정도로 재미있게 말을 했는데 그 안에는 번뜩이는 사회풍자가 숨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황새결송’은 돈을 받고 재판을 부당하게 하는 관리를 새들의 목소리 경연으로 풍자하는 내용으로 이 재담은 소설로도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 김옹과 동일인물로 추정되는 김중진은 오이무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젊은 나이에 이가 빠져 오이를 우물거리며 먹는다는 말에서 입 주위가 오물거려 웃기는 모습이라는 데서 나왔다는 말도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외양에서부터 웃기는 사람이 따로 있었던 모양입니다.
거리의 꾼이라면 전기수(傳奇叟)를 뺄 수 없습니다. 전기수는 길에서 소설을 읽어주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조선 후기에는 남녀노소 양반, 천민 가리지 않고 소설 읽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혼자 읽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듣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소설이 한문으로 되어 있기에 글을 모르는 문맹자는 읽기 어려웠고 책값이 비싸 사거나 빌리기도 어려웠습니다. 이래서 소설 속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전기수라는 직업이 탄생한 것입니다. 전기수는 자기 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청중들에게‘춘향전’‘심청전’이나‘삼국지’등을 구성지게 읽어내려갑니다. 모두 귀를 쫑긋하고 듣고 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는 입을 딱 다뭅니다. 전기수 앞에 놓인 항아리에 엽전이 가득 차야 다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전기수의 활동지역은 시장 귀퉁이나 청계천 다리 근처 공터도 있었고 규모가 큰 담뱃가게였습니다. 사대부의 집안에서도 이들을 초빙했는데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부인네들이 발을 치고 마루에 앉으면 마당에 멍석을 깔고 전기수가 소설책을 읽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출장을 가는 전기수들 중에는 ‘서유기’처럼 분량이 많은 소설을 통째로 외워 낭송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