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찬의 두루두루 조선 후기사]
제20화 종교생활
한국에 국교가 있을까요? 신라 때 들어온 불교는 고려에도 뒤이어 흥왕해서 불교 신자가 많았지만, 조선에 들어와서는 유학을 받아들여 국가의 이념으로 했기에 유학자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나라가 망한 후 일제 암흑기에는 천도교를 비롯해 신흥종교가 나라를 잃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광복 이후에는 기독교가 들어와 맹렬한 기세로 퍼져 861만명의 개신교도와 515만명의 카톨릭 인구가 되었으니 오늘날 기독교는 한국을 대표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전국의 명소에 절이 있고 사월 초파일 하루에만 절에 가서 연등을 다는 사람을 포함해 불교를 따르는 이가 많고 아직도 많은 집에서 제사를 지냅니다. 제사를 풍습이라고 하지만 지내는 방식을 보면 조상신을 모시는 엄연한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원불교, 천도교 등 신흥종교와 함께 곳곳에 卍자 깃발을 내걸고 미래를 예언하는 무교가 자리 잡고 있으니 한국은 온갖 종교가 용광로처럼 뒤섞여 끓는 특이한 나라입니다.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 중에는 우리의 조상은 원래 제례를 담당하는 계파였기에 신기(神氣)가 풍성하고 종교적 의미가 있는 흰옷을 즐겨 입는 것이라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때 종교는 물론 시베리아, 만주에서 유래된 샤머니즘입니다. 샤머니즘 즉 무교를 외래종교 불교, 유교, 기독교가 처음에는 비하하고 배타성을 보였지만 무교는 한민족의 원초적인 본성이기에 결국은 동화되어 거꾸로 외래 종교가 샤머니즘화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외래 종교는 토착 종교인 무교와 섞여야만 겨우 생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무교는 신라, 고려 때까지는 큰 박해를 받지 않았는데 조선을 건국한 유학자들은 불교와 함께 무교(巫敎)를 음사라고 부르며 박해했습니다. 굿당을 불태우고 무당과 불교 승려들을 사대문 밖으로 쫓겨났지만 그래도 무교와 불교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근엄한 유학자 남편을 둔 부인은 집안의 평안을 빌며 절에 올라가 불공을 드리거나 무당을 찾아가 굿을 했기 때문입니다. 왕실의 여자들도 불교나 무당을 가까이하고 후원했으니 유학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불교와 무교를 말살하려고 해도 끝내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우리 정신으로 뿌리내린 믿음은 쉽게 없애지 못하는 것입니다. 유학자들이 무당을 천시하든 말든 그들은 민중의 비호 아래 끈질기게 살아남았습니다. 폐쇄된 시골에서 무당은 그 지역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습니다. 집안의 식구가 아플 때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점을 통해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카운슬러 노릇을 하거나 가뭄이 들었을 때 하늘에 비를 내려주기를 기원하는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마을의 화합을 위해 대동굿을 벌이며 춤과 노래 등으로 주민을 즐겁게 해주는 연예인이기도 했습니다. 또 그들은 같이 박해받는 불교 승려와 한패가 각종 역모 사건에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승려들은 떠돌며 수행하는 것으로 꾸며 연락을 하고 무당은 유언비어 등을 퍼뜨리는 일을 했습니다. 심지어 탄압하는 유학자에 공동 대처하기 위해 절에 굿당이 들어가 공존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시대 어떤 박해에도 꿋꿋한 생명력을 가진 무교에 개화 세상이 되자 새로운 도전이 있었습니다. 구한 말 기독교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무당을 볼 때 미신으로 본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당을 찾아가서 열심히 기독교와 예수에 대해 전도했습니다. 코가 높고 눈이 파란 서양인이 정열적으로 예수를 찬양하는 말에 무당은 깊이 감동해서 앞으로 예수를 모시겠다고 합니다. 일주일 후 선교사가 다시 무당을 찾았습니다. 여전히 굿당이 남아 있자 선교사가 따집니다. 예수님을 모시기로 했지 않느냐고요. 그러자 무당은 예수님이 그려진 무신도(巫神圖)를 보여주며 몸주를 예수님으로 바꿨다고 해서 아연실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무당에게 예수는 수많은 신 중에 한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예수님이나 마리아를 모시는 무당이 여럿 있습니다. 이렇게 한국은 토착 종교와 외래의 종교가 큰 갈등 없이 공존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