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힘으로 돈을 벌기 전부터 가졌던 막연한 욕망이었는데 직장생활의 공허함이 더해지면서 현재 내 상황에서, 내가 가진 상상력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선의 판타지가 여행이 된 것이다.
시드니에 가기 전, 그곳을 떠올렸을 때 내 머릿속을 떠다닌 단어는 오페라 하우스, 캥거루, 러셀 크로우 그리고 영화 스크림 여자 주인공(이름이 시드니)이었다. 여행 루트를 짜면서 몇 권의 책을 읽긴 했지만, 직장인 여행 기간의 한계와 특성상 장거리 여행은 효율적인 워밍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여행경력도 제법 쌓였으니 이번만큼은 나만의 완벽한 '판타지'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여배우가 광고했던 여행 관련 사이트에 들어가서 '현직 전문직 직장인과 함께 하는 로컬처럼 4시간 보내기'를 시드니 여행 첫날로 예약했다. 혼자 가는 여행이라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제목에 있는 전문직과 직장인이라는 단어에 신뢰감과 공감대가 훅 들어왔다. 그리고 이미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들이 칭찬 일색이라 안심하고 예약했다.
가이드님이 어떻게 호주에서 지내게 된 건지 내가 먼저 물어보았고, 이런저런 얘기 끝에 수능 얘기까지 번져 자연스럽게 우리가 동갑내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는 곳은 달랐지만, 또래이다 보니 고민이나 상황이 비슷해 쉽게 친근감을 느꼈고 진짜 수다스러운 여행이 되었다. (감히 말하면) 4시간 동안 대화를 통해 내가 느낀 가이드님은 학창 시절 공부를 열심히 했고, 일하는 시간 외에는 여행 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모범생스러운 범위 안에서 자유와 일탈을 누리는 그 삶의 패턴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만 그는 혼자 낯선 곳에서 (그야말로 독립적으로) 본인만의 삶을 개척하고 있으니 멋있는 걸로는 저만치 앞에 있다는 것이 나와 달랐다. 4시간의 일정 중 가장 기억에 남은 건 가이드님이 사는 동네 맛집에서 브런치를 먹은 것과 러셀 크로우가 살았다는 아파트 옆을 지나간 것과 가이드님이 중간중간 찍어 준 내 인생 샷들이다. 그리고 그다음의 내 여행 일정에 대해 나누다가 나온 이 이야기다.
“ 내일이랑 모레 블루마운틴과 포트스테판을 가보려고 해요. 액티비티로는 스카이다이빙이랑 하버브리지 클라이밍을 미리 예약했어요. (마침 하버브리지가 보여) 혹시 하버브리지 클라이밍 해보셨어요?”
“네. 회식으로요.”
“네? 회식이요? 아... 저녁때 올라가면 정말 멋있었겠네요. 그런데 해지고 올라가기에는 좀 무서울 것 같은데.”
“아니요. 낮에 갔어요. 저녁에 회식을 하면 아무도 안 오거든요.”
혼자 놀 때 미술관에 가는 것은 내게 꽤 특별한 이벤트다. 그림도 못 그리고, 그림을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 건지는 사실 잘 모른다. 그냥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할 뿐이고, 내가 모르고 바라봐도 그림은 나에게 틀렸다고 한 적이 없을 뿐이다.
친한 언니와 수다를 떨다가 우연히 데이비드 호크니란 화가를 알게 되었다. '세계에서 최고가로 작품이 낙찰된 현존 작가'란 타이틀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 시점에, 그의 그림을 만날 운명이었는지 마침 서울에서 그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평일의 여유라는 호사를 누리고자 하루 연차까지 썼지만, 미술관은 사람들로 엄청 붐볐다.
1. 무엇을 그릴 것 인가
천재적 영감을 주체하지 못했을 것 같은 그도 젊은 시절 무엇을 그릴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니 그 사실이 왜 그리 반가웠는지 모르겠다. 내가 처음으로 본 그의 그림은 그가 즐겨 마셨다는 차(tea) 그림이었다.
그는 '무엇'을 그릴 것인지 고민했다지만 예술에 있어서 결국 '누가, 어떻게'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아이디어와 표현방법으로 인해 그 '무엇'이 더 의미 있게 느껴졌다. 내가 좋아하는 '쓰기'를 결심한 이후 요즘 나도 '무엇'을 쓸까? 엄청 고민하고 있다. 머릿속 한가득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을 어찌할 줄 모르다가 어렵게 한 단어 한 단어를 연결하여 겨우 문장을 만든다. 지금은 무엇을 쓸지 고민하기도 벅차지만, 나도 내가 즐겨 하는 것을 쓰면서 나만의 글투를 갖게 되길 바라본다.
2. identity를 찾아서
갈 길을 잃어버린 일상 탓인지, 요즘 유독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사람들을 보면 몹시 부럽다. 누군가는 그것을 찾을 필요성을 못 느끼거나, 누군가는 평생 그것을 찾으려고 애써도 못 찾곤 한다. 그런데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것도 모자라 그것을 이 세상 단 하나의 것으로 표현하는 예술가를 대면하면 범인(凡人, ordinary man)의 질투심은 끝을 모르게 된다.
알 수 없는 검은 물체에 눌려 고개가 꺾여버린, 인형 소년은 화가가 고민한 정체성의 무게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케 해주는 작품이다. 뭔가에 눌려 꺾여 있는 게 꼭 회사에서의 내 모습 같기도 했다. 일은 그저 일일 뿐이라는데 먹고사는 곳에서 정체성까지 찾으려는 것 자체가 과한 욕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이 겹쳐지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오랜 시간 기대했었다. 정체성에 대한 그의 고민은 결국 그에게 그림을 그리게 했는데, 나의 고민은 나에게 사표를 그리게 할지도 모르겠다.
3. 공간에서 영감을 얻는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을 보면 그가 갔거나 머물렀던 공간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낯선 공간이 주는 느낌과 거기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생각,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표현하는 일련의 과정에 대해 굉장히 흥미로워한다. 그래서인지 내가 유독 시간을 들여 감상한 작품들은 그가 로스앤젤레스, 베이루트, 멕시코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들이었다.
데이비드 호크니란 사람은 여행 중 새로운 공간에서 이런 것을 느끼는구나, 화가는 그것을 그림으로 이렇게 표현하는구나. 등등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으로 둘려 싸여있는 공간을 여행하는 동안 나도 새로운 영감을 얻었다.
1937년에 태어나신 분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생을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도전하여 예술의 영역을 확장한 데이비드 호크니. 관람을 마치고 전시장을 나오는데, 그의 말로 마무리되는 오디오 가이드의 마지막 멘트가 끝까지 여운을 남겼다.
“나는 향수에 잠기는 타입이 아니다. 그저 현재를 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