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임진왜란 전적지 답사

벽파진해전 현장 답사

사진=벽파진에서 바라본 감부도


정유재란 당시였던 1597년 음력 7월 15일(이하 날짜는 음력)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거의 전멸했다. 이때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이 8월 3일 선전관 양호로부터 선조의 교지를 받고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순신은 8월 19일 경상우수사 배설로부터 장흥 회령포에서 남은 배 12척을 인수한 후 장차 명량에서 일전을 치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순신함대가 진도 벽파진에 진을 치고 있던 1597년 9월 7일 오전 일찍 탐망군 임중형으로 부터 적선 55척 중 13척이 어란포(전남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날 오후에 일본 함선 13척이 벽파진으로 접근하자 우리 배들이 닻을 올리고 나아가 맞서 공격했다.

적은 아군의 기세에 눌려 도망쳤다. 먼 바다까지 추격하였으나 바람이 역풍이고 조류도 역류인데다 복병이 있을 것같아 추격을 중단하고 되돌아왔다. 이순신 장군은 그날 밤 반드시 야간 습격이 있을 것이라고 하고 전 장병들에게 대비하도록 했다.


예상했던대로 밤 10시쯤 적은 함포사격을 하며 기습공격을 해왔다. 이순신 장군은 엄한 군령을 내리고 손수 최전방에 나서서 지자총통으로 응사하면서 반격을 가했다. 적은 네차례나 일진일퇴하면서 포를 쏘아대다가 밤 12시가 넘어서 완전 퇴각했다. 벽파진에서 이순신이 적의 야습을 예견하고 이를 물리치자 병사들은 비로소 장군을 믿고 사기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 때 계절은 이미 겨울로 접어들어 해상의 날씨는 점차 거칠어지고 추위가 엄습해 오고 있었다. 벽파진 해전 이틀 후인 음력 9월 9일은 중양절로 명절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제주도로부터 점세라는 어부가 갖고 온 소 5마리를 잡아 춥고 배고픈 병사들에게 나누어주고 다가올 명량해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사진=벽파진이충무공전첩비


전남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있는 벽파진 언덕 위에 서면 바로 앞에 감부도라는 섬이 하나 있다. 벽파진해전이 있기 전 적의 정탐선이 와서 달밤에 섬 그늘을 타고 몰래 정찰활동을 했던 섬이다. 벽파진 언덕 위에는 벽파진이충무공전첩비가 우뚝 서있다. 노산 이은상이 글을 짓고 소전 손재형이 글씨를 썼다. 벽파진해전은 1597년 9월 16일에 있었던 명량대첩의 전초전이었다.


이순신전략연구소장 이봉수





이봉수 기자
작성 2020.10.12 16:46 수정 2020.10.14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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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