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 3국은 비슷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다.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와 달리 중세 무렵 강성한 통일왕국을 건설하여 십자군의 동방 진출을 저지하고, 러시아의 서부 확장을 막아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동유럽의 맹주로 군림했던 나라.
역사가 있는 나라
유럽 농구 최강인 나라
눈보다 마음으로 느낄게 많은 나라
북유럽 4국과 발트 3국 여행지의 마지막 나라, 리투아니아로 떠나 보자.
리투아니아를 흐르는 양대 젖줄인 네무나스강과 네리스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카우나스는 인구 약 40만 명 정도가 거주하는 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이자 자유와 혁명의 도시다. 1972년 이 도시의 한가운데 중심거리 라이스볘스 알례야(Laisvės alėja), 즉 '자유로'에서 소련 체제에 염증을 느낀 한 청년이 분신자살을 한다. 이 사건으로 시민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은 불길처럼 퍼져나가 당시 체제를 뒤흔들게 된다. 암묵적인 자유를 얻게 된 카우나스에서는 당시 소련에서는 금지되어 있던 장발문화와 비틀즈 록 음악도 허용되고, 자유로는 자유화에 대한 갈망의 거리로 우뚝 선다.
리투아니아의 시초는 공국으로 출발한다. 13세기 중반 민다우가스가 즉위하면서 통일 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는 최초의 리투아니아 왕이자 최초의 기독교 세례를 받은 왕이기도 하다. 승승장구 하던 리투아니아 공국은 동유럽 최강 국가가 되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국이 되면서 사실상 리투아니아가 폴란드에 예속된다. 제1차 대전 직후 리투아니아는 최초로 독립을 이루었으나 폴란드에게 수도 빌뉴스를 불법 점령당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때까지 카우나스가 리투아니아의 임시수도가 되어서 현대사의 서곡을 알리는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기도 한다.
카우나스에서 트라카이 가는 길은 작은 구릉이 이어지는 언덕길이다. 발트 3국 중 위도가 제일 낮은 탓인지 자작나무는 덜 보이고 밀밭, 수수밭 농장, 사과밭 과수원들과 크고 작은 호수들이 계속 보인다. 구릉이 많다 보니 호수도 28만 개나 된단다. 타우나스를 출발한 지 1시간 만에 리투아니아 두 번째 수도였던 트라카이의 호숫가에 도착한다.
누군가 말한다. 트라카이(Trakai)를 보지 않고 리투아니아에 가보았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아침의 햇살이 갈베 호수 위로 퍼져간다. 고딕 양식의 붉은 벽돌로 지어진 트라카이 성은 빛의 삼원색 속에서 호수 가운데 도도하게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 모두가 동화 속 한 폭의 수채화다.
호수는 물을 담고 마음을 담는다.
호수는 아름다움이고 그리움이다.
호수 속의 성은 이제 흥망성쇠의 희로애락을 다 내려놓고 있다.
트라카이는 14세기 초 빌뉴스로 천도하기 전까지 리투아니아의 수도였다. 독일 기사단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케스투티스에 의해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1430년 그의 아들인 리투아니아의 영웅 비타우타스에 의해 준공된 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독일기사단들의 침략이 한풀 꺾이고 수도마저 빌뉴스로 옮겨지자 트라카이 성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되고, 그 이후로 수십 차례의 전쟁을 겪으면서 완전히 폐허가 된 채 역사 속에서 잊혀 진다. 하지만 20세기 초, 성 주변에서 다양한 중세 유물이 발견되면서 학계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1960년대부터 본격적인 복원과 발굴사업을 거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40대 초반의 핸섬하게 생긴 요트 선장은 침이 마르도록 자기 나라를 자랑한다. 200여개의 호수, 울창한 숲, 섬 가운데 붉은 성, 중세를 배경으로 한 여러 영화의 촬영지, 수심 40m의 호수 아래에서 올라오는 맑고 깨끗한 용천수, 유럽 최강 리투아니아 농구까지...
요트는 붉은 깃발이 힘차게 휘날리는 트라카이성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14~15세기에 걸쳐 세워진 이 성은 지어질 당시에는 지금보다 해수면이 2m나 높아서 섬이 세 개로 나뉘어져 있었다고 한다.
독일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요가일라 대공은 폴란드 앙주 왕조의 여왕 야드비가와 결혼해 폴란드와 동맹관계를 수립하고, 그 결과 튜튼 기사단을 무찔러 독일의 침략을 저지하지만 동맹 조건의 하나로 로마 가톨릭교를 수용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폴란드와 동맹을 못마땅하게 여긴 비타우투스와 갈등을 겪게 된다.
성 구경을 마치고 타타르인들의 전통요리 키비나스를 먹기 위해 호숫가 식당으로 이동한다. 성을 방어하기 위해 용병으로 이곳에 이주해 온 터키계 타타르인들은 이 지역의 주거와 음식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트라카이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빌뉴스(Vilnius)의 구시가지를 '향기 나는 도시'라고 부른다. 붉은 벽돌로 휘감긴 고풍스러운 바로크 양식들이 주를 이루는 빌뉴스의 역사 지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고, 폴란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 주변 국가들의 문화적 중심지로 활약하던 중세시대부터 이어진 역사의 숨결이 골목마다 남아 있다. 구시가지의 입구는 새벽의 문을 통해 은밀한 향기를 내품으며 우리를 유혹하는 600여 년 전 중세 도시로 들어선다.
빌뉴스의 올드타운은 중세시대의 건축물들이 약 1,500개 이상 남아 옛 향취를 물씬 뿜어낸다. 시가지는 대부분의 지역이 거미줄 같은 좁다란 골목길들로 이루어져 있다. 수백 년의 세월을 머금었을 법한 골목의 붉은 벽돌 처마 밑에서도 역사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빌뉴스 역사지구는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신고전주의 등의 다양한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이색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특색으로 인해 유럽의 모든 건축 양식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귀중한 장소로 평가받고 있다.
구시가지 중심에 위치한 빌뉴스대학교는 빌뉴스의 고풍스러운 향기를 감상하기에 가장 적절한 동유럽 지성의 산실이다. 리투아니아 화폐 100리타에 새겨진 이 대학을 이 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대학 건물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해리포터에 나오는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모델이기도 하다.
리투아니아 독립 100주년 기념 이니셜인 ‘#LT100’ 이 걸려 있는 대통령궁. 과거 대주교와 이 지역 사령관이 거주하였으며, 러시아로 원정 가던 나폴레옹이 숙박한 곳이다. 현재 리투아니아 여성 대통령이 근무하고 있다.
700년 동안 리투아니아인들의 신앙적 중심지였던 빌뉴스 대성당은 원래 원주민들의 제단이 있던 곳이었는데, 가톨릭이 들어오면서 허물고 그 위에 성당을 지은 것이다. 소련 시절 인물화 박물관으로 개조되는 역사의 상처를 입기도 한다. 대성당 광장은 리투아니아인들이 참여한 역사적인 ‘발트의 길’ 시작점이기도 하다. 성당 앞의 바닥에 동판으로 새긴 ‘스테부클라스(Stebuklas, 기적)’라는 표지판을 설치하여 무혈혁명을 기념하고 있다. 옆의 종루는 빌뉴스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건물인데, 종탑에 오르면 빌뉴스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빌뉴스 공항에 도착하니 잔잔한 감동의 연속이었던 북유럽 4국과 발트 3국과의 작별 시간이 다가왔음을 비로소 실감한다.
뉘하운 운하 파스텔톤 고풍스런 집 옆을 자전거 타고 지나면서 유람선에 손들어주던 코펜하겐의 여학생.
수많은 폭포와 빙하, 바다에서 바로 우뚝 솟은 눈 덮인 산, 유람선에서 본 장엄한 피오르드. 눈을 감아도 대자연의 잔상들이 망막에서 지워지지 않아 뜬눈으로 밤을 샌 노르웨이 래르달.
멜라렌 호수 여신의 치마폭에 담긴 스톡홀름 시청사 잔디 정원에 나들이 나온 시민들 모습에서 하필이면 서울 시청 광장에서 머리띠 하고 확성기 든 사람들 모습은 왜 떠올랐을까.
백색 거탑으로 우뚝 선 헬싱키 대성당에서 비릿한 갯내음 따라 내려간 마켓 광장. 영화 ‘카모메 식당’ 주인공 사치에가 야채 사러 간 가게를 찾아 시장을 잠시 헤매기도 했었지.
통한과 절망의 늪에서도 고유의 문화와 언어를 지켜낸 발트 3국과 암울한 식민지 시대를 극복한 우리나라, 그들의 ‘발트의 길’과 우리의 ‘촛불 항쟁’이 서로 오버랩 되면서 느끼게 된 시공을 초월한 공감.
그동안 발트 3국의 하늘을 뒤덮었던 검은 구름은 물러나고, 눈 보다 더 하얀 구름이 하늘을 채우리라.
여계봉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