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생각하면 나는 젊은 시절 참 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돌했다. 아직은 결혼 전인 스물 셋인 나이에 추석을 맞이하려고 고향에 내려갔는데 친구가 나를 껴 안으며 시집을 간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렇지 않아도 어둠이 내리고 있는 느티나무 밑이 캄캄해 보였다.
“뭐 시집을 간다고? 어이 살려고 아이도 낳고 그래야 하잖아! 자신 있어?”
무척이나 놀란 내 표정에 당황스러워 하는 친구의 눈동자가 아직도 내 눈에 선하다. 친구가 시집가기 전에 나와의 마지막이라고 친구 집으로 가자고 했다. 친구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친구의 어머니는 그동안 딸의 혼수 감으로 마련해 둔 것들을 방안 가득히 펼쳐 놓으며 압력 밥솥 사용법과 시집가서 친정 신구 욕을 안 얻어먹으려면 잘하고 살아야 된다고 신신 당부를 하고 있었다. 친구는 어머니 말을 잘 듣고 있었지만 나는 도통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아 시집가서 잘 지내라는 말 한 마디 없이 그 집을 나와 버렸다.
그 때 나의 철없음은 결혼하면 설레임도 없고 반가울 것도 끝이 난 줄 알았다. 인생이 끝난 것이라고 그렇게 믿어 버렸다. 여자가 시집을 가면 꿈이 없을 것이라고 나는 왜 그렇게 단정을 짓고 말았을까? 길을 가다가도 배부른 여자를 보면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그 여자의 배를 바라보았다. 저 여자는 무슨 재미로 살까? 꿈은 없어졌겠지. 맨 날 밥하고 설거지 하고 그게 그것인데 왜 아줌마의 길을 선택했을까? 미련 곰탱이, 나는 절대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살림에 지치고 아이들 뒷바라지에 헝클어진 머리는 아줌마의 길이 얼마나 지친 것인지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기에 나는 배부른 여자를 보면 거부감 부터 들었다. 그런데 사람일이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게 몸부림치도록 아줌마의 길을 걷기 싫었는데 나도 모르게 그 길을 걷고 있음이었다.
변명을 하자면 외로워서 그랬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줌마가 되면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을까? 좋은 책을 읽을 수 있을까? 그런 쓰잘데기 없는 걱정은 어디로 가 버렸다. 그냥 젊음 하나로 버티었던 지난 시절은 오래 지나지 않았다. 배가 점점 불러오는 아내에게 남편은 혼인신고 할 것을 종용했다. 아이를 낳으면 의료보험 카드를 만들어야 되는데 왜 혼인 신고를 하지 않느냐고 남편은 퇴근만 하면 나를 졸랐다.
‘혼인신고를 해 버리면 내 인생은 없는 거야. 아이를 낳아 놓고 나는 나갈 거야!’
뱃속에서 한 생명이 꿈틀거림에도 엄마로서 자질을 갖추어야 할 준비는 하지 않고 어디론가 도망갈 생각에 나는 불량 아줌마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뱃속의 아이가 8개월이 넘었는데 남편은 혼인신고를 하지 않겠다는 아내를 이해 못 하겠다고 이유가 뭐냐고 불끈 화를 냈다. 참을 만큼 참았다는 표현이었다.
“아이 낳고 나갈 거야.”
나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남편은 긴 한숨을 내 쉬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는 남편 물음에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되려면 준비도 있어야 하는데 아무런 절차도 없이 불러 온 배를 보며 꿈 많은 가슴을 접어야 함에 나는 얼마나 방황했는지....
그렇게 하루 밤을 꼬박 남편과 실랑이를 하고 나서 배부른 나를 인정 아닌 인정을 했다. 혼인 신고하러 동사무소에 갔다. 내 꼴을, 내가 이십대 초반에 바라보았던 그 꿈 없음으로 사는, 재미가 없음으로 보여 진 나, 그 자체였다. 인생을 완전히 포기한 상태, 우주보다 더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 나의 배, 마구잡이로 빗어버린 머리가 꿈이 없음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동사무소에 혼인신고를 하고 확인으로 등본과 주민등록증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자가 혼인신고를 하면 호주도 바뀌고 본적지도 바뀐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나는 그만 울고 말았다. 서러워서 정말 서러워서 가지고 있던 꿈마저 버렸는데 우리 아버지 이름 아래 살았는데 갑자기 다른 사람의 이름아래 살아야 된다니, 서러움보다 슬픔이었다. 동사무소 직원들이 내개 달려오듯 했고 어찌나 서럽게 울었던지 동장님이 다가오셔서 왜 우느냐고 물었다.
“보세요. 여기 좀 보라고요. 여기는 전남 곡성에서 충남 금산으로 바뀌었고요. 여기는 우리 아버지 이름 대신 시아버님 이름으로 바뀌었잖아요. 왜 그래야 돼요. 으으흑” 서러움에 복받쳐 우는데 동장님은 차 한 잔 마시자며 나를 동장실로 들어가자고 했다.
“모르셨어요? 결혼하면 다 그래요. 우리나라 관습법에 따라 그런 거예요. 아휴, 아이엄마 될분이....”
동장님은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다. 동장님이 마련 해 준 차 한 잔을 마시고 안정을 찾았고 그저 말없이 인사를 하고 동장실을 나오고 있을 때 중년쯤 되어 보이는 여직원이 요구르트 하나를 건네주며
“에이, 엄마 될 거잖아요. 울길 왜 울어요. 웃어요. 네” 하는데 그 때 눈물어린 내 눈에는 그 중년 여인이 신고 있는 스타킹에 줄이 나가 있는 것이 보였다. 저 모습이 아줌마모습인데 그렇게 아름답기만 한 여자의 작품을 왜 저렇게 삭아빠진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는가, 나중의 내 모습이 아닌가? 어쩌자고 이 길을 걷고 있는 걸까? 나를 되찾기까지 한참 시달렸다.
얼마나 어이없고 철없음이었는지. 그저 철없음으로 젊은 것 하나로 무기 삼아 나이 듦에 가소로운 눈초리만 보내고 있었을 뿐 내가 그 길을 걷고 있으리란 생각조차 해 봄이 없었으니 말이다. 철없고 당돌하기만 했던 내가 오랜 산고 끝에 세상을 맞이한 딸아이는 방긋방긋 웃었다. 딸아이의 재롱에 사는 맛이 났다. 세월은 거침없었다. 아들아이도 낳아 키웠다. 젊음은 소리 없이 지나가고 불혹 속으로 나는 들어서고 있었다. 아이들의 치다꺼리에 나는 나 자신을 잃을 뻔 했다. 내가 아닌 아이들의 엄마로 불러지는 나 자신, 그래도 서러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이들이 자라 무엇이 되어 줄까? 라는 꿈에 눈 맞춤이 되어 있었다.
지천명도 넘었다. 벌써 나이 타령이냐고 건방지다고 하겠지만 배가 불러 있던 그 때, 출산의 아픔에 쓰디쓴 인생에서 달디 단 열매가 열리더라고 그래서 딸과 아들을 낳아 키웠으며 나이 듦에도 인생이 있더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그저 인생이 답답하고 힘이 들것 같지만 배부른 아줌마의 모습에서도 즐거운 음악에 가슴이 설레이고 아이들을 향해 교양 없이 소리 지르는 엄마의 모습에서도 인생이 있고 준법정신이 있고 도전 정신이 있더라 이 말이다. 어떤 줄의 인생이서도 한 번 살아 볼 만하더란 이 말이다. 나이 들면 캄캄하다 생각했지만 또 다른 인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년의 중후한 모습이 나이 듦에도 있었다. 그것도 가슴 설레는 빈공간이 있었다. 배부른 재미없음이 질컥대고 구질고 현실에만 충실하게 살아 온 인생에는 나이 듦의 여유이다. 그래서 쉴 만한 의자를 찾는 중이다. 지금까지 살아 온 이야기를 서슴없이 할 수 있어서 좋음이다.
고향 느티나무 아래에서 친구가 시집을 간다는 말에 별 놀라울 것도 없었는데 지금 그 친구는 어떤 모습으로 나이 들어갈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혼인신고 하러 가서 퍽퍽 울었던 지난날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꽃 한 송이 사야겠다. 나이 듦에도 흔들리지 않는 내 나이에 감사하다.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 볼 줄 아는 눈이 뜨였고 젊음보다 더 깊은 세상에서 여유롭게 살아 갈수 있는 나이에 흔들리지 않는 나 자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꽃 한 송이 사야겠다.
나이 듦에 대한 나의 깨달음에 소중한 터득을 할 수 있게 해 준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여유로 살아가기를 나 스스로 지키면서 마음에 소중한 꿈을 한 번 더 키우면서 나이 듦의 여유를 베풀어 보자 이 말이다. [글=신영순]
전명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