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아가면서 사랑은 종종 찾아오기도 하고, 오랜 공백기를 두고 가뭄에 콩 나듯 오기도 한다. 작은 도마뱀처럼 슬며시 왔다가 가는 그런 감정도 있고(그럴 땐 그것이 뜨거웠는지 차가웠는지도 모른 채 지나친다.), 과녁에 꽂힌 화살처럼 가슴에 선명한 멍자욱을 남기는 것도 있다. 보통 내가 남에게 쏜 것과 남이 나에게 쏜 것으로 구분되는데 흔히들 내가 쏜 화살은 부드럽게 날아가 살포시 상대의 심장에 안착할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실상은 내가 쏜 것이든, 타인이 쏜 것이든 매한가지다.
쏜 사람은 몰라도 맞은 사람은 아프고 심장뿐 아니라 그것을 연결하는 오장과 육부에까지 전해져서 살갗에 티 안 나게 자라난 솜털까지 아리게 한다. 사랑은 불꽃을 일으킨다고는 하지만 실제 그 스파크는 보이지 않는 엄청난 화염과 그에 따른 열병을 몰고 온다. 해리가 샐리에게처럼, 보라와 일범의 관계처럼 그리고 테레스가 캐롤에게로, 에니스와 잭의 감정처럼.
이처럼 사랑의 이동은 국경선을 넘나드는 여행자처럼 자유롭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여행자의 배낭처럼 무겁지도 않으며, 오래된 여권의 겉표지처럼 낡지도 않았다. 사랑은 깃털처럼 가볍지만 결코 나약하지 않으며, 주름살 없는 이십대의 피부처럼 탄탄함을 가졌다.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은 누구이건, 무엇이건 간에 언제나 아기 숨소리처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몇 번의 짝사랑도 경험하여 보고, 상호 간에 합의된 사랑도 겪었으며 어떤 형태로도 결말을 알 수 없는 동거의 덫에서 사랑도 하였다. 그러면서 그 틈으로 무한한 행복을 느꼈고, 동시에 선명한 슬픔도 맛보았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매 순간의 사랑은 연습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나고 나면 왜 그랬을까, 다음에는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 그 땐 누구의 잘못이 더 컸을까에 대해서 복기해 보거나 후회하지만 다른 사랑이 찾아오거나 찾으려 할 땐, 이전의 사랑에서 얻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교훈들은 모두 순간 삭제되며 ‘해왔던’ 낡은 사랑의 ‘방식’만을 고수하며 답습하게 된다. 사랑에도 여행을 떠나기 전처럼 준비가 필요한 걸까. 하긴 그것 또한 타인의 마음을 알아가는 긴 여행일 수 있으니. 하지만 당일치기나 충동적으로 떠나는 여행처럼 무엇을 먼저 준비하고 무엇을 나중에 생각해야 하는지, 무엇이 더 현명한 판단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용기 있는 행동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일찍이 사랑에는 특정한 공간도 필요 없으며, 여행허가서에 적힌 국적이나 경계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호한 감정의 선을 넘을 수도 있고, 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사랑에 빠진 사람들 모두 새로운 감각에 울고 웃는 이방인일 뿐이다. 상대방의 생김새나 목소리도 중요하지 않다. 목요일의 사랑은 파랗고, 어제의 사랑은 노랗다. 내일의 사랑은 희고, 무지개 너머의 사랑은 적도의 색감과 닮았다. 섬의 사랑은 초콜릿처럼 달콤하기까지 했다. 아무리 오뚝한 코도 사랑을 나눌 때에는 그럭저럭 오를 만하며, 오히려 낮으면서 둥글거나 조금 비뚤어진 코를 만나기도 했다. 그래도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오해의 무게는 이불 속에서 만큼은 속옷보다 가벼웠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행위도 아름다운 사랑이다. 하지만 특별한 시공간을 여행하는 것도 다른 의미에서 사랑의 종류가 될 수 있다. 바로 장소에 대한 사랑, 토포필리아(Topophilia)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상과의 불필요한 싸움이 필요 없고, 감정의 소모도 줄일 수 있다. 오직 일방적이고, 지고지순한 사랑의 감정만 유지할 수 있다면 모든 상상이 가능한 것이다. 장소에 대한 연민과 사랑은 나에겐 각별하다. 첫 해외 여행지였던 도쿄가 그랬다. 오밀조밀하면서도 아사쿠라 후미오(Asakura Fumio)의 조각에 나타난 고양이들의 조용한 왕국, 그 자체였다.
그리고 4년이라는 가장 오랜 시간 머물렀던 인도네시아의 마카사르 또한 마찬가지다. 도쿄와 마카사르 사이의 지리적 거리는 멀지만 가깝고, 그곳에 대한 나의 그리움도 같은 크기다. 두 도시는 내게 하나의 장소, 하나의 사랑에 대한 다른 이름인 것이다. 둘 모두 섬나라이며, 때문에 바닷바람을 원 없이 느낄 수 있는 곳. 특히 마카사르 사람들의 리드미컬한 억양은 마치 가볍게 어깨를 흔들며 다가오는 무희들의 몸놀림처럼 나의 청음을 사로잡았었다. 가믈란(Gamelan) 연주보다 더 청아한 운율의 지역 방언은 이방인의 뇌리에 또렷이 각인되었던 것이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도쿄와 마카사르의 이름에 설레고, 남겨진 사람들의 삶을 궁금해 했으며, 여전히 사랑하고 그리워한다. 지유가오카 골목길 한가운데서 터줏대감처럼 반쯤 누워있던 작은 회색 고양이를, 마카사르 뒷골목 잘란 뚜빠이(Jalan Tupai, 다람쥐 길)의 조용한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인기가수 라이사(Raisa)의 발라드 음악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소박한 동네미술관 옆 낮은 담장 위의 청결한 일본 고양이는 이미 도도하고, 짧은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카페에서 나에게 진한 아라비카 커피를 내려주던 인도네시아 여직원은 지금쯤 다른 일을 구했거나 학업을 계속해 나가고 있을 테지. 나는 다시 도쿄로, 마카사르로 돌아갈 상상을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필요가 없다. 장소는 사람의 마음처럼 쉽게 변심하거나 토라지지 않으니 말이다. 사랑하지만 잠시 동안 서로에게 숨 쉴 공간을 허락하는 연인들처럼, 만날 수 없는 시간만큼 애간장 녹이는 첫사랑처럼. 나는 꼭 그만큼의 사랑에 목말라 있다. [글=신정근]
이해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