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이 있고 향기가 넘치는 길을 걸으면 삶의 여유가 넘친다. 선재길이 바로 그 길이다. 살갗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숲에서 풍겨 나오는 향긋함, 그리고 잎 새를 헤집고 들어오는 햇살들의 짜릿함을 만나러 어느 가을날, 오대산 월정사로 향한다.
월정사 일주문에 들면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도열한 ‘천년의 숲길’이 산객을 반긴다. 평균 높이가 24m, 평균 수령 80년이 넘는 전나무 1,700여 그루가 길 양쪽으로 도열하여 월정사 금강교까지 이어지는 1km 남짓한 길이다. 월정사로 들어가는 ‘천년의 숲길’에서는 언제나 서늘하고 청신한 바람이 몸을 감싼다.
중국 오대산에서 유학하던 신라의 자장율사는 참선 중에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그가 지명한 이곳에 월정사를 세우게 된다. 그래서 오대산을 한국 불교 문수신앙의 성지라고 부른다.
‘선재(善財)’라는 이름은 문수보살의 깨달음을 쫒아 구도자의 길을 간 선재동자에서 유래된다. 본격적인 선재길은 월정사가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햇살은 기세가 한풀 꺾이고 계곡 사이로 부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돌다리를 지나 옛 선인들이 걸었던 선재길 속으로 들어간다.
선재길이 어떤 길이던가.
천년 이상 고승들이 수행한 발자취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길 아니던가.
해마다 삼보일배하는 고행으로 다듬어진 길 아니던가.
자신의 실체를 찾아 헤매던 숱한 수행자들의 눈물 밴 길 아니던가.
오대산은 산 자체가 법당이며 자연이 들려주는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가 법문인 그런 곳이다. 잡다하고 고단한 속세의 번거로움을 오대천 맑은 물에 헹구는 마음으로 산길을 걷다 보면 선재길이 자아내는 주변의 아름다움과 불국이 베푸는 가피로 몸과 마음이 정갈해진다.
길은 나란히 이어진 오대천 계곡을 여러 번 가로지르며 거슬러 올라간다. 오대천은 백두대간에서 오대산 비로봉을 감돌아 흐른다. 물길 따라서 바람 부는 대로 걸으니 육신조차 편안하다.
선재길 들머리에서 3㎞쯤 걸으면 사극에서나 볼 수 있는 섶다리가 나온다. 물푸레나무나 버드나무로 다리 기둥을 세우고, 소나무나 참나무로 만든 다리 상판 위에 나뭇잎이 달린 잔가지인 섶을 엮어 깔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만든다. 하천을 사이에 둔 마을 주민들이 매년 물이 줄어든 가을철에 다리를 놓았다가 이듬해 큰물이 지기 전까지 이용했는데, 여름 장마가 시작되면 금방 떠내려가는 바람에 ‘이별다리’라 불리기도 했다.
숲길은 외길인지라 잃을 리 없고 산은 육산인지라 발끝이 닿는 촉감이 사뭇 부드럽다. 발목에 스치는 이름 모를 풀포기들이 낯설지 않아 정겨운 서정의 한 자락을 떠올리게 한다. 개망초가 지천으로 널려있는 야생화 군락지를 지나니 산들바람에 여린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소리, 물소리인 듯 목탁소리인 듯 가물가물 들려오는 이런 저런 소리들이 기분 좋게 귓전에 머물다 간다.
선재길은 봄은 섬세함과 아련함으로, 여름은 호쾌(豪快)함과 장려(壯麗)함으로. 가을은 넉넉함과 숭려(崇麗)함으로, 겨울철은 털어내어 비어지는 공허(空虛)함으로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걷다가 가만히 귀 기울이면 전나무, 느릅나무, 피나무, 졸참나무, 자작나무로 가득한 숲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가슴 켜켜이 쌓은 지난날의 미련을 찬바람에 씻겨 버리라고.
바람이 매섭지 아니하고는 숱한 앙금을 털어낼 길이 없다고.
골이 깊을수록 산이 높듯, 고통이 깊을수록 희열은 높은 법이라고.
자신들처럼 자연 속에서 스스럼없이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라고.
쉼터인 오대산장을 지나 세조가 피부병을 고쳤다는 오대천 동피골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상원사까지 3㎞ 남은 길을 재촉한다. 숲길은 상원교와 출렁 다리로 이어지고 상원사가 가까워지니 다시 빽빽한 전나무 숲이 나타난다. 길은 상원사 입구에서 비로봉과 두로봉 방향으로 갈라지고 선재길은 여기가 끝이다.
여기까지 온 김에 상원사로 올라간다. 전각으로 가는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나이 많은 상원사 동종이 반긴다. 절집 마당 건너편으로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산그리메를 이룬다. 모두 절집 조망을 위해 마련된 듯싶다. 이윽고 법계 밝혀줄 종소리가 뜨락에 울려 퍼지니 여기가 바로 선계(仙界)가 아니던가.
오대산 중대(中臺)에 있는 상원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안치한 5대 적멸보궁 중의 하나다. 세조가 계곡에서 목욕을 하던 중 문수동자를 만나 악성 피부병을 치료받았다거나, 고양이에 의해 자객의 습격을 피할 수 있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등 사연을 안고 있는 세조의 원찰(願刹)이다.
산협 사이를 맵시 있게 휘어지며 돌아나가는 산 그림자가 속살같이 애틋하다. 월정사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절집을 나선다.
가을날 고요한 침묵 속에 고즈넉이 앉아 있는 산사 찾는 길에서는 주워올 것이 꽤나 많다. 망각 속에 묻힌 추억을 줍고 잃어버린 나도 찾는다.
내 속의 나를 찾지 못하더라도 어디든지 떠나고 싶을 때는 바랑 하나 걸머메고 오대산 선재길을 찾아볼 일이다.
여계봉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