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프로젝트] 애드거 앨런 포의 공포저택 탐험기

심재훈


간절히 말하고 싶은 것들을 쓰고 싶다. 몽환적인 글쓰기를 해보고 싶었다. 사람들을 홀리는 글쓰기를 해보고 싶었다. 세상엔 수많은 감정들이 존재하는데, 단 한 번의 생을 살면서 그 모든 감정들을 다 경험할 수도 없는 법이다. 감정은 신비이다. 우리가 어떤 특정한 감정을 느낄 때에 그 감정들을 모두 안다고 확신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감정은 연결고리이다. 하나의 감정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다. 공포감은 짜릿함과 연결되어 있다. 공포를 통해서 우리는 마음속에 해묵은 감정들을 해소한다. 일련의 공포감이 끝나면, 우리는 안도감과 함께 안정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공포소설, 공포영화, 각종 귀신 이야기들을 듣고 보는 것을 즐긴다. 공포 매체를 통해서 나의 미세한 감정들을 꺼내어주고, 그 새로운 감정들을 발견함으로써 희열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공포는 새로운 행복을 가져오기도 한다. 공포는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공포라는 개념은 누군가 나를 위협할 때에 느낄 수 있다. 공포는 눈에 보이는 공포와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로 분류할 수 있다. 재난, 도난, 살인 등 신체적인 위협은 공간이라는 매개를 통해 전달된다. 위협의 도구가 되는 물체가 우리의 신체에 접촉할 때에 통증과 동시에 감정으로는 공포심을 느낀다. 심각한 문제는 여기서 부터다. 물체와 신체가 접촉하는 순간 이후에 남게 되는 그 순간의 기억이다. 접촉의 순간은 지나갔지만 기억은 감정 속에 그대로 간직된다.

이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인데 이 공포는 극도로 무섭다. 허상 속에 있던 애드거 앨런 포의 공포 저택이 눈앞에 현실화되는 것이다. 그 저택은 3층의 대칭형의 저택인데, 벽돌 자재로 이루어졌고, 옥상에서부터 거미줄처럼 이끼들이 아래로 뻗어 내리고 있다. 깜깜한 저녁에 장맛비가 내리고, 천둥이 내린다. 우리는 가끔씩 주말을 보내고 직장에 출근하지 않는 월요일에 일어나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면 괜히 모를 안도감을 느낀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처럼 우리의 몸도 나른해진다. 눈앞에 보이지 않지만 상상할 수 있는 공포저택에 앞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을 그릴 수 있다. 공포 저택 앞에 서 있는 나는 제 2의 자아 이다.

드디어 저택의 정문 앞에 다가선다. 갈색의 문은 약간 녹슨 손잡이가 있고, 2.5미터의 높이다. 상단 부분은 아치모양으로 폭은 내가 팔을 쭉 뻗었을 때보다 조금 더 길다. 문을 당기고 들어가면 양 옆으로 방들이 존재하고, 정면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이 보인다. 정면에 계단의 폭이 정면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면, 나머지 반에는 기다란 종 시계와 몇 권의 서적이 놓여 있는 서재가 놓여있다. 양 옆을 살펴보니, 왼쪽에는 주방과 상아 소재로 보이는 식탁이 있었다. 오른쪽에는 거실이었다. TV는 흑백이었고, 소파는 살색이었다. 소파 밑에는 카페트가 깔려져 있는데, 문양은 약간 동양의 용의 얼굴 모양처럼 보였다. 초록과 빨강이 뒤범벅되어 있어서 모양을 단정 짓기 힘들다. 계단을 올라가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나무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한다. 한 계단씩 올라갈 때마다, 나무속에 균열이 일어나듯이 삐걱삐걱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 소리에 놀랐다. 헤아릴 수 없는 정적과 함께 그 균열의 소리는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았다. 조화롭지 않았다. 누가 이런 표현을 쓰겠냐만 말이다. 그 부조화적인 소리는 마치 나의 프라이버시(Privacy)를 훼방하는 것 같았다. 나의 그 프라이버시적인 우주세계('I' universe)를 감히 건드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전에 이러한 감정들을 느껴보았지만, 발견하지는 못하였다. 충격을 견딘 파동소리가 찢어진다(spark). 그 상쇄되지 못한 합음들이 나의 일부를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 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나의 우주 세계를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고요함을 깨뜨리는 압력의 소리. 왠지 모르게 나는 그 소리에 친숙하다. 나무자재를 밟을 때에 삐걱삐걱은 마치 우리를 고대로 환생시키는 듯 감정을 부여한다. 그 소리를 통해 우리를 야만적이고 원초적인 모습으로 환생시킨다.

삐걱삐걱은 규칙적이고, 균일한 현대사회 속에서는 거의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규칙적이고, 정기적이며, 바르며, 고우며, 조화로우며, 완벽하며, 균일하며, 반듯반듯한 시대는 나무 파편 음 같은 소리를 배척한다. 자연 그대로의 소리는 원초적인 우리의 모습을 소환시키고, 인위적인 모습들을 가려내고, 순수했던 우리의 모습을 묘사한다. 원초로의 회귀(In the beginning), 그 감정들을 사모하게 되어 자연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공포적인 환경은 우리의 뜻밖의 원초적인 의식들을 되살리고, 어두움 속에서 자연적인 감각들을 회생시킨다. 바쁜 생활 속에서 놓쳐버리고 마는 사소한 감정과 일상을 발견하게 해준다. 전시관, 영화관, 극장, 연주회에서 전시물과 스크린, 배우, 인물, 합창단, 오케스트라들을 제외하고 관객들은 어두움과 고요함 속에서 시선을 집중하게 된다. 극장과 관객 사이에서 미묘한 감정기류가 생기게 된다. 그 안에는 분노, 행복, 여유, 경이로움과 같은 감정들이 파생된다.

감정은 규칙적이기보다는 불규칙적이다. 지속적이기보다는 가변적이다. 감정은 변덕쟁이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던 감정의 세계는 공포를 만남으로써 단번에 깨진다. 공포의 침투가 규칙을 깨뜨릴 때에, 우리는 무엇인가 불안정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일시적으로 나만의 세계가 깨어진 느낌이다. 살아오면서 생겨난 삶의 철학 같은 것들이 단번에 무너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공포를 회피하게 된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찾아온다.


내가 인식하고 있던 세계 밖에 다른 세계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이다. 우주 속에 인간만이 유일한 영장류라고 단정했던 전제가 거짓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그것이다. 지구 속에 존재했던 철학을 넘어서는 다른 철학을 할 때임을 계시해주는 느낌이다. 가까운 일본에서 초대형 쓰나미(Snaummi) 재난 블록버스터를 보고 있으면 우리의 삶이 금방이라도 깨질 수 있는 작은 존재임을 느끼게 된다. 공포는 어떤 현상으로든지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


그러므로 공포는 가시적이든지 비가시적이든지 현재의 현상을 파괴함으로써, 인간의 과거로의 회귀 본능을 자극한다. 일시적인 감정세계의 뒤틀림은 현재를 사는 우리 안에 고대인(ancient people)의 원초성과 야만성이 열렬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입증해준다.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원초적인 인간, 그것이 첫 번째 인간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야릇한 상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공포를 통해 첫 번째 인간의 원형을 더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고대세계에서는 개인에게 요구하는 사회의 제약이 현재만큼 없었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는 더 많았을 것이다. 지구는 둥그렇고, 중력의 법칙에 따라 무게만큼 중력도 커지지만, 분명 어느 때엔가 그 법칙도 깨질 수 있다는 두려움은 종말론을 연상시킨다.

공포는 개인의 탄생과 죽음을 연상시키면서도 우리가 머무는 세계의 시작과 종말에 대해서도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법칙과 규칙이 사라지는 시대가 올 수 있을 것이란 예측을 해보게 된다. 앨런 포의 저택에서 2층으로 나무계단을 걸어 올라가면서 들었던 삐걱거림은 개인의 삐걱거림에서부터, 지역의 삐걱거림, 세계의 삐걱거림, 우주의 삐걱거림으로 확장할 수 있다. 이제 불규칙이 규칙의 일부인 시대는 지나가고, 불규칙이 주인이 되는 시대가 도래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17~18C 고전주의 시대를 통과하며 이성주의가 발달하였고, 현대사회는 과학과 기술이 더욱 발전하고 있다. 지구의 종말론에 대해 여러 가설들이 존재하지만, 미래학 분야에서 체계적인 종말론을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가까운 미래에 특히 중동지역의 분쟁문제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방국가들에 의해 구획된 중동의 영토와 종교 문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멜팅팟(melting pot)이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간도 그 삐걱거림 옆에서 살아간다. 그 삐걱거림을 발견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누군가 그 삐걱거림을 발견하였다면 또 다른 외계를 발견한 것 같아 놀라겠지만, 이상하리만큼 한편으론 희열감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글=심재훈]


전명희 기자

 

 

 

 

 

 

 


이해산 기자
작성 2020.11.07 09:47 수정 2020.11.07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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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