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트로트 열풍이 분다. 유행가의 르네상스다. 공중파 방송이 선도하고 지상파 방송매체들이 유사한 프로그램으로 뒤따르는 기이한 현상이다. 공자가 말한 세상과 통하는 노래는 난세에는 분통터지는 가락과 노랫말로 세상에 질펑거린다. 트로트 광풍이 활활거리는 이유를 들어보자. 세상살이가 각박하고, 풍무(風舞)하다. 너는 내편인가, 제 편인가. 설익은 세상, 생경한 떠벌이 꾼들의 구호외침, 갑갑한 보건환경. 노래보다 가수가 좋다, 내 가수는 누구인가. 오라는 데도 없고, 나서기도 망설여져 집구석 콕콕. TV가 감흥의 백신. 흘러온 옛 노래, 흘러갈 새 노래. 인기 역주행과 고공행진. 오선지 밖으로 튀어나온 육감(六感) 포털 무대연출. 소리가 눈에 보이고, 색깔이 귀에 들리는 가객들의 기예(技藝). 내가 좋아하는 가수와 내가 좋아하는 노래의 융합. 팬과 팬이 어우러진 팬덤, 나는 어느 가수의 팬덤인가. 이런 난세에 떠오르는 노래가 <팔도기생>이다.
<팔도기생> 노래는 1968년에 제작된 김효천 감독의 사극영화 주제곡이다. 김진규‧김지미‧윤정희‧문희‧남정임‧태현실‧전양자 등이 출연하였고, 태창흥업이 제작하여 국제극장에서 개봉했었다. 영화 스토리는 조선왕조 10대 임금 연산군(1476~1506) 대를 풍자한 것이었다. 그 당시 팔도의 미색(美色) 3천여 명을 모아 운영하던 궁중의 흥청(興淸)을 패러디한 사극이다. 이 흥청이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고 하여 흥청망청(興淸亡淸)이라는 말이 생겨서 오늘날까지 통용되고 있다.
팔도기생 https://www.youtube.com/watch?v=35ksVfn1TGE
달빛 실은 가야금에 풍월 짓던 선비님아/ 유랑강산 팔도명기 정을 두고 떠나가오/ 죽장망에 단봇짐에 일락서산 해 저문데/ 녹수청산 풍류 따라 가락찾아 가는구나/ 가지마오 가지마오 이별 두고 가지마오// 청사초롱 불빛 따라 시를 읊던 선비님아/ 칠보단장 애가 타던 팔도명기 내 아느냐/ 이화 공산 우는 두견 풍월마져 외로운데/ 일구월심 상사 북엔 어느 누가 알아주랴/ 가지마오 가지마오 이별 두고 가지마오. (가사 전문)
<팔도기생> 영화는, 연산군으로부터 시작된다. 폭정을 한 임금으로 다시 왕자로 전락한 연산군은 9대 성종임금의 맏아들 융(㦕)이다. 어릴 적 이름은 백돌이다. 그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는 후궁들과의 반목질시의 틈바구니에서 사약을 받아 마시고, 피를 토하면서 죽는다. 아들 백돌이의 8세 전후다. 그때 어미는 모시 적삼에 피를 토하면서, 아들 융이가 자라면 이 피 묻은 적삼을 보여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그 아들이 자라서 19세에 왕이 되고, 어머니가 마지막 남긴 그 피 적삼을 보고서 폭군정치를 편다. 그중 하나가 팔도기생을 불러 모은 흥청이다.
영화는 이 흥청과 당시 유행한 팔도시리즈가 모티브다. 패러디된 줄거리는, 우리나라 창(唱)을 후세에 전수하고자 풍류객 박효천(김진규 분)으로 하여금 팔도강산을 다니면서 숨은 명창, 명기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잔치를 열게 한다. 그리고는 박효천에게 장악원의 악사장(樂士長) 벼슬을 내린다. 하지만 본시 풍류객인 박효천은 벼슬을 마다하고 풍류 길을 떠난다. 그 당시 유행한 팔도시리즈는 1967년 홍보영화 <팔도강산>의 흥행 덕분이다. <팔도 사나이>, <팔도식모>, <팔도여군>, <팔도항구> 등이 이때 파생된 것이다. <팔도기생> 영화 속에서 팔도기생은 김지미‧전양자‧태현실‧유하나‧최인숙 등이었다. 이들을 상대하는 풍류객 박효천은 김진규다.
장악원(掌樂院)은 장악서로도 불렀다. 조선시대 궁중음악 및 무용에 관한 일을 맡은 관청이다. 이원‧연방원‧함방원‧뇌양원‧진향원‧교방사‧아악대 등으로 불렸고, 조선 초기 장악서와 악학도감을 전승한 음악기관으로 1897년 교방사로 개칭될 때까지 사용된다. 본래 예조 소속 독립기관으로서 관상감‧전의감‧사역원 등과 같은 정3품 아문(衙門)의 관청이었는데, 1895년(고종32) 기구개편으로 궁내부 장례원 소속이 된다. 음악은 악공‧악생‧관현맹‧여악‧무동들에 의해 연주되었다. 악공은 우방에 소속되어 연향(宴享, 국빈 잔치)때 쓰인 향악과 당악을 주로 연주했고, 악생은 좌방 소속으로 제례의식 때 사용된 아악 연주를 맡았다. 내연(內宴)행사 때에는 악공과 관현맹이 음악을 연주했고, 무동(舞童)과 여기(女妓)가 춤을 추었다.
1895년 궁내부의 장례원으로 옮겼고, 1897년 명칭이 교방사로 바뀌었다. 그 뒤 1907년 장악과로 되었고, 아악대라는 명칭 아래 겨우 명맥만 유지했다. 아악대는 그 뒤 조선총독부에 의해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로 개칭되어 8‧15해방 이전까지 쓰였다. 해방과 함께 이왕직아악부는 구왕궁아악부로 개칭되어 장악원의 전통을 이어오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50년 대통령령 제271호로 국립국악원이 공포되고, 1951년 4월 9일 부산에서 국립국악원이 설립됨으로써 이왕직아악부의 전통이 국립국악원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신라‧고려시대에도 음성서‧대악서‧관음방 등의 음악 담당 기관이 있었다.
필자는 한국대중가요 100년사와 관련하여 여러 책을 출판했다. 1988년부터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여, 2014년 <한국대중가요100년사>·2019년 <한국대중가요100년, 유행가가 품은 역사>·2020년 <한국대중가요100년, 유행가가 품은 역사>·<트로트 열풍, 남인수에서 임영웅까지>·<트로트 열풍, 윤심덕에서 송가인까지>. 어려움이 많았다. 자료를 존안하고 관리하는 국가기관도 미진하다. 유행가가 품은 우리나라의 역사는 무한한데, 잊혀 지거나 묻혀 진 보물들이 너무 많다. 시급하다. 한국대중가요의 보전과 진화·승화·강화를 위한 국가차원의 시스템강구가 절실하다. 늦었다. 상업적이거나 친정권적이지 않은 역사적·가치적인 측면에서 그렇다. 우리나라는 고대로부터 조정에서 관제조직으로 편성하여 운영했던 음악담당 국가기관이 있었다. 음성서·대악서·관음방·장악원으로부터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시절 쪼그라들었던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까지.
[유차영]
문화예술교육사
트로트스토리연구원장
전명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