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또렷한 눈꺼풀에 힘을 빼고 살포시 눈을 감아보면 감회가 새롭다. 지나고 보면 짧은 순간들의 연속이자 연장선일 뿐이지만 그 단일의 나날들을 들여다보면 모두가 각자의 개성과 특징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는 그런 시간. 그 백 일이란 시간은 바람이 우리의 곁을 소리 없이 스쳐가듯 그렇게 슬며시 지난 발자취를 따라 나의 곁에 산들바람처럼 다가왔다.
소리도, 형체도, 흔적도 없이 지나쳐간 탓일까, 이 시간 속에 ‘나’란 존재가 담겨져 있는 것인지 약간의 의심이 든다. 너무 가벼워서 그 안에 어떤 삶의 무게가 담길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 마저 생긴다. 그래서 조용히, 은밀하게 다가왔듯 보낼 때도 조용히, 소리 없이 보내야만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과거의 그림자를 스쳐온 이 바람을 그냥 없었던 듯이 보내기엔 뭔가 아쉽다.
아무리 짧은 시간이고 한없이 가벼운 시간이더라도 백 일의 기억과 추억을 조금이라도 머금은 것이라면 잠깐 정도는 얼마든지 바람의 속삭임에 집중할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난 잠시 눈을 감고 지난 99일과 지금 현존하는 이 하루, 그리하여 총 백일이란 시간을 향해 천천히 그리고 다시 한 번 걸어보려 한다.
막막함. 이 모든 생활의 출발점에 선 순간부터 이곳에서 백 번째 흔적을 남기는 순간까지 줄곧 머리를 맴돌았던 감정을 요약하자면 이 단어가 적합할 것이다. 사실 요약할 것도 없다. 마치 휑한 것으로는 모자라 사방에 아무것도 없는 모래벌판에 혼자 남겨져 어딘지도 모를 결승선을 찾아야 할 때의 막막함처럼 막연한 기다림이 내가 가졌던 감정의 전부였다. 어쩌면 내가 지금껏 지내온 시간보다도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이 해답 없는 문제로 인해 괴로워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 꼭 애써 쌓아 올린 종이 탑에 물 한 방울의 불청객이 더해져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지켜보았을 때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그런 한숨만 입 안을 가득 메울 뿐이다.
하지만 나의 손가락 하나조차도 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작은 촛불 하나만 주어진다면 탈출구를 어림짐작이나마 할 수 있듯이, 모래바람뿐인 벌판에 홀로 남겨진 나에게도 작은 희망이 있었다. 뒤늦게야 늘상 잔잔한 춤사위만 보이던 바다는 고양이처럼 사나운 발톱을 감추고 있었단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바다의 가면 속 모습을 들춰 보기 전까지만 해도 바다에 대한 무지로부터 피어나는 위험천만한 로망과 함께 바다라는 공간을 항상 열망하고 있었다.
그 열망은 결국 나를 해양경찰의 길로 이끌었고 오랜 시간을 기다려 마침내 도달한 부둣가. 그 곳은 그야말로 밤하늘의 은하수 너머 외계와도 같은 신비로움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이 미지와의 첫 만남은 달에 최초의 걸음을 내딛는 한 우주인이 느꼈을 강렬함과 통하는 순간이었다. [글=엄지환]
이해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