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텐 밥그릇과 국그릇은 이젠 쓸 일 없다며 아이들 돌 때 받은 옥식기까지 비닐포대에 잔뜩 넣어 어머님이 버리려고 내놓았다. 작은 대접과 옥식기는 주방으로 얼른 갖다놓고 포대화상처럼 불룩한 걸 무겁게 들어 여차하면 노인정에 갖다 주려고 현관 앞에 옮겨놓았다. 예전 시골 살 때 둥글이나 솔가리 등을 태운 아궁이에서 나온 헛간의 재를 묻혀 짚으로 닦던 놋그릇과 녹슬지 않는 27종 스텐이라고 도시로 나오자마자 바꾼 친정엄마가 좋아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별 쓸 일 없어도 버리기 싫은 건 뭘까. 내 아집이 빚어낸 욕심일까? 아님 집착일까? 그도 저도 아니면 친정에 대한 아련한 추억 때문인가 싶어도 선뜻 버리고 싶지 않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어머님은 불룩한 포대를 볼 때마다 대문 앞에 갖다놓으라고 지청구해도 며느리가 미적거림을 더는 못 참아 기어이 여든을 훌쩍 넘긴 당신이 손수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내놓자마자 누가 잽싸게 가져갔다. 제대로 임자를 만났다고 딴은 생각하니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일 년에 네다섯 번 쓰이는 각종 제기도 있고. 매일 삼시 세끼 받아먹는 그릇도 있다. 흔히 사람의 마음가짐 됨됨이나 인품의 척도를 그릇에 비유하곤 한다. 그릇이 커야 포용력 있고 이해심도 많아 아량과 도량이 넓어 자비롭고 지혜롭다 한다. 속이 좁은 사람을 밴댕이 소갈머리에 간장 종지 같다고 한다. 화 잘 내는 사람을 양은냄비에 비유해 물이 퍼뜩 끓고 쉬이 식는 것처럼 성질이 들쑥날쑥 갈피를 못 잡고 오뉴월 날씨처럼 변화무상하다고 한다. 또 앞에 돌이 놓여있어도 돌아가지 않고 발로 차는 성격을 가진 사람은 순간 울컥 올라오는 화를 못 참고 붉으락푸르락 안색을 바꿔가며 성질이 괴팍하다 한다.
또 그보다 더 급한 성질을 가진 사람은 가랑잎에 불붙는다고 한다. 뒤끝은 없어도 땡고함 지르며 버럭 화 잘 내는 성격 가진 사람하고 살려면 천둥, 번개 치며 놋날처럼 쏟아지는 소나기 피하듯 그 순간 잠시 그 자릴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또 변덕이 죽 끓듯 이랬다저랬다 손바닥 뒤집듯이 말을 상황 따라 달리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사람은 철면피 같다고도 한다. 골고루 내리는 비도 그릇에 따라 담긴다. 재료에 따라 다루기 까다로운 것도 있고 쉽고 편리한 것도 있다.
내 그릇의 크기는 과연 얼마나 될까?
내 그릇의 질은 대체로 괜찮은 편일까?
내 그릇의 쓰임새는 다용도일까?
내 그릇의 가치는 있기나 있을까?
내 그릇의 수명도 언젠가 다할 날 오겠지.
내가 시집 온 이후로 시조모를 비롯해 층층시하 더군다나 남편이 젊은 나이에 뇌수술로 인해 오랫동안 불편한 몸 때문에 별로 대접 받은 적 없이 살아왔다. 입때껏 당신 아들이 아픈 건 며느리의 팔자 탓으로 좀 돌려야만 그나마 마음이 좀 풀리는 모양. 허구한 날 시난고난한 당신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들다고 하셔도 오히려 잔병치레 없던 아버님이 재재작년에 먼저 돌아가셨다. 요즘은 돈이 양반이라며 부의 척도에 따라 자식의 서열도 차별하는 것이 당연지사처럼 여기는 우리 집 형편에. 정작 당신 아들이 쓰러져 더더욱 힘들 때 손주들까지 외면하려 들었다.
소처럼 비빌 언덕도 친정의 재력도 그 무엇 하나 번듯하게 내세울 만한 의지가지가 없는 천둥벌거숭이 신세가 되어도 모진 세상풍파 감당한 청상과부가 된 시조모처럼 육남매 홀로 키운 친정엄마처럼 주어진 팔자대로 그렇게 살면 된다고 했다. 집안 경조사에는 가게 일 제쳐두고 그 시절 가뜩이나 길 막히던 앞산순환도로를 타고 일찌감치 와서 일 하도록 어머님의 끈질긴 담금질과 가르침 덕에 마지못해 허드레로 막 쓰일 수 있는 그릇처럼 이리저리 굴리고 채이고 닳아 이젠 누가 거들떠보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대해도 화도 별로 안 나고. 원망하는 마음도 차츰 사그라졌고. 게다가 뭔 욕심을 내봤자 어느 누구도 내 편 들어주지도 않을 뿐더러 또 형편이 형편인지라 남 탓으로 돌리고 싶은 구차히 변명하는 마음도 생길 틈이 없어 접은 지 오래다.
때론 나에게 봇물처럼 쏟아지는 모진 말들이 너무 억울하고 비수가 되어 그 말로 상처가 난 자리에 한이 맺히고 응어리져 갈비뼈가 마치도록 숨을 못 쉴 정도여서 그러다가 어린 자식들 두고 나까지 죽을 것만 같아 어른들의 사고와는 정반대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발등에 불끄기 바쁜 난 여기 없는 사람. 나의 고집과 생각을 조금씩 죽이기로 했다. 아니면 나하고는 친분관계가 전혀 없는 분들인데 저렇게나마 잘 되라고 꾸중하고 도와주니 감사하고 고맙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미안하고 덜 슬펐기에. 어떻게든 매사에 비굴하리만치 왜가리 목청 같은 내 속에서 나오는 불만의 소리는 숨기고 왜가리 깃들처럼 보드랍고 공손한 척 공치사하는 말로 대신했다.
처음엔 스스로도 양심을 속이고 속과 겉이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다고 여겼지만 그것도 자꾸 반복하다보니 습관처럼 습이 붙어 그런 익숙함이 어쩌다 도가 지나쳐 이젠 골수에 겸손이 몸에 밴 듯. 풀죽은 우리 애들이나 나만 보면 억새 잎처럼 서걱대며 속새처럼 빳빳이 또는 풀 먹인 삼배처럼 뻣뻣한 시어른들의 서슬 퍼런 모습 앞에 입에 혀처럼 굴며 연한 배처럼 싹싹하고 곰살갑게 내 의견은 없애고 사니까 정말 투명인간처럼 여기면 어쩌나 쓸데없는 착각도 더러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오죽하면 그렇게 날 대했을까도 싶기도 하다. 엄청난 큰아들의 존재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진 괴리감에 그 애증의 표현을 도저히 감추지 못하고 경제력이 부족한 날 싸잡아 나무란 것은 어쩌면 천부당만부당한 알은 아니지 싶다.
시집와서 처음으로 어머님 말에 반기 들 듯 앙세게 대들지는 않아도 스텐 그릇을 버리라는 말엔 열 손 재배하듯 코대답만 해놓고 즉각 행동에 옮기지 않을 정도로 이젠 환갑이 지났다고 슬며시 배짱까지 부릴 줄 알 정도로 뱃심도 좀 두둑해졌나 싶다. 막상 남편이 쓰러지고 5살부터 세 살 터울로 삼남매 키우며 살기 힘들 때 함께 살자고 아무리 매달려봤자 공허한 메아리와 푸념으로 들리는 하소연에 불과했다. 남들은 시집에 들어와 살기 싫다는데 넌 왜 자꾸 같이 살자고 하느냐며 당신 눈에 흙이 들어가지 않는 한 같이 살기 싫다고 한사코 도리질했던 어머님. 하긴 아버님도 마찬가지로 너희들 보고 내 숟가락 들어달라고 안한다고 그러시더니. 7년 전부터 두 어른이 번갈아 아파서 하는 수 없이 합가를 했다. 돌아가실 때까지 며느리가 밥 떠먹여드리면 고맙다고 수고가 많다며 어눌한 목소리로 울먹이시더니 임종도 맏며느리 혼자 마지막 가는 길 지켜보며 두 눈 쓰다듬어 감겨드렸다.
잘 깨지지 않는 가벼운 수입품 그릇을 아버님 돌아가신 얼마 뒤 당신 손수 대형마트에서 구입한 후론 구형 스텐 식기를 아예 무용지물로 취급하듯 버리는 것이 왠지 싫었다. 꼭 남편이 아픈 바람에 갖은 구박과 천대를 받아온 나를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정작 힘들 때 도와달라고 애걸복걸하다시피 매달려도 도와주기는커녕 매몰차게 내치던 그 때처럼 승승장구 잘나가던 자식 사업자금은 대줘도 우리에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외면하던 지난날이 떠올라 은근슬쩍 부아가 치밀어 어머님의 말을 무시하려는 속셈이 엿보여 부끄럽긴 했다.
평소에 몸 불편한 아들 꼴 보기 싫다며 땅이 꺼지도록 한숨지으시더니 말년엔 그 몸 성치 않은 아들이 먹을 것 사다 나르고 방청소해주는 걸 왜 진작 몰랐을까 싶다. 부모 앞에 아픈 것도 죄고 불효라고 홀대하던 큰 아들의 아들인 장손이 이젠 할머니 모시고 벌초도 가고 명절날 성묘 가는 날이 왔건만.
지금 돌이켜보면 아마 우리 어머님은 너무나 고집이 세고 속이 좁아터진 날 원만하게 고치려고 또 한없는 자비심을 다해 내 인내심을 테스트하느라 한편으론 내가 분심을 일으켜서라도 뭔가를 깨닫게끔 선지식으로 인연 된 까닭을 곰곰이 생각해보는 계기로 만든 그릇을 통해 더욱 더 그러함을 믿어지기까지. [글=염경희]
이해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