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찬의 두루두루 조선 후기사]
제33화 사냥꾼
조선은 쌀, 보리 등 곡류와 무, 미나리 등 채소를 주식으로 했기에 단백질이 부족했습니다. 삼면이 바다라 생선을 많이 먹었으리라 짐작하지만, 지금과 달리 그물이 무거워서 먼 바다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소는 경작해야 했기에 함부로 잡을 수 없었고 돼지는 인간과 같은 음식을 먹어야 했기에 기르기에 부담되었습니다. 이래서 부족한 고기를 야생 동물에서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올무나 덫을 놓아 잡기도 했지만, 요행수에 의존했기에 전문적으로 사냥만 하는 ‘꾼’이 필요했습니다. 험악한 산에는 호랑이 같은 맹수도 있었으나 고기로 팔 수 있는 멧돼지나 사슴, 노루도 많이 있었으니 전문생업으로서 할 만했습니다.
사냥꾼은 짐승을 쫓아다녀야 했기에 오랫동안 산속에서 살아야 했고 호랑이 같은 맹수에 물려 죽는 일도 있었기에 유목민의 피가 흐르는 백정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조총이 들어오기 전에는 창과 활을 이용해 짐승을 잡았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총을 개량한 화승총으로 사냥했습니다. 사냥이 어렵고 때로 위험하기도 했지만 성공하면 많은 이득이 있었습니다. 사슴의 뿔은 녹용이라고 해서 고가로 매매되었고 곰에게서는 타박상에 특효라는 웅담을 채취해 고가에 팔 수 있었고 맹수인 호랑이는 아름다운 호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냥꾼들은 호랑이에게 물려가 먹이가 되는 사람이 속출하자 착호군으로 선발되기도 했습니다.
고려 때까지만 해도 일반 사냥도 없었지만, 호랑이 사냥은 아예 없었습니다. 지금도 오래 된 절에 남아 있는 산신각에 모셔진 그림을 보면 눈썹이 흰 호랑이를 탄 신선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호랑이를 죽여 피해를 줄인다는 생각보다 그저 엎드려 호랑이 처분만을 기다렸기에 이런 그림이 그려진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하자 백성을 해치는 호랑이에 대한 적극 대응책으로 착호군이 결성되었습니다. 호랑이는 다른 짐승과 달리 두 발로 선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늙어 기력이 떨어진 호랑이가 사냥하기 쉬운 인간을 먹이로 하기 시작해 식인 호랑이가 된 것이고 그렇기에 가끔 힘 빠진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은 무용담도 나오는 것입니다.
착호군은 모집한 군인 등으로 되어 있지만, 전문 사냥꾼이 호랑이를 잡는 예가 많았습니다. 호랑이를 잡으면 상금도 받지만, 고가의 호랑이 가죽을 두고 사냥꾼과 조정에 바치려는 고을 사또 간에 다툼이 많았습니다. 녹용이라고 불리는 사슴뿔도 효능이 뛰어나서 몇십 년 전에 우리나라 최고령으로 126살까지 산 할머니는 13살 때 사냥꾼인 아버지가 먹인 녹용에 일주일 동안 혼수상태였다가 깨어난 뒤로 웬만한 장사하고 팔씨름해서 져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도 전해 오고 있습니다. 또 겨울잠을 자는 곰을 사냥해서 그 창자로 순대를 만들어 먹었더니 맛이 일품이라는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덫으로 사냥하는 사냥꾼들과 총으로 사냥하는 사냥꾼들은 서로 경쟁하는 사이로 사이가 나빴다고 하며 사냥꾼들은 오래된 기와집 마루에 쌓인 먼지 흙을 채취해서 성능이 좋은 화약을 만들어 사용했기에 돈을 주고 샀다고 합니다.
이렇게 흥미진진한 이야기 소재를 가진 사냥꾼은 프랑스군의 강화도 침공 때에 그 실력을 뚜렷이 보여 주었습니다. 당시 전등사 정족산성 전투에서 평안도 사냥꾼은 겨우 유효사정거리가 50미터였고 프랑스군의 총은 250미터였지만 이런 열세에도 놀라운 전투력으로 이들을 격퇴했습니다. 이렇게 뛰어난 사격술을 가진 사냥꾼들은 나라가 위기에 빠지면 총을 들고 나와 적과 싸웠으니 구한말 침략해 온 일제와 싸우는 의병(義兵)의 주축을 이루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평안도 포수 출신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을 조직해 1920년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 120명을 사살하는 공을 세웠고 뒤이어 청산리 전투에서도 김좌진 부대와 합류해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사냥꾼들은 생업으로 시작한 사냥 기술을 나라를 지키거나 독립을 위해 싸웠기도 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