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 일원으로 살면서 한 번쯤은 사는 일이 마음에 내키지 않아서, 혹은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그 일원에서 탈퇴하고 싶었던 생각을 누구나 해 보지 않았을까 한다.
우선 나부터 얼마나 깊은 수렁의 늪에 빠져서 그런 생각을 했던 나를 발견하지 않았는가. 가깝게는 사랑하는 이웃이 떠난 것에도 드러냈던 슬픔까지 툭하면 그런 생각을 해 보았던 기억이 있다.
힘들어서 세상을 떠나 보고 싶다고, 삶을 이쯤에서 접고 싶어 다른 세상의 삶에 기웃거렸던 경험은 누구나 있었을 것이다. 그 힘든 삶을 접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때부터가 이미 고통 없는 세상이란 것일까.
언제든 선택해 볼 수 있다는 여유로움이란 걸까. 그럼 천국일 것 같은 또 다른 세상으로 삶을 피해 떠난 사람들이 도착하게 되면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이며 그 다음에는 어디로 그들을 보내어 무엇으로 살게 하는 걸까.
천지창조이래 아무도 갔다가 돌아온 사람이 없는 허무맹랑한 질문과 답 앞에 놓여있다. 한 젊은 연예 종사자가 일전에 자신이 소속되었던 전속사의 계약 기간을 많이 남겨두고 극단의 선택을 해 다른 세상으로 전속사를 영원히 옮겨 갔다는 뉴스를 들었다.
처음과는 달리 누군가의 두렵던 자살 소리가 이젠 귀에 단련이 되어 새삼스럽지가 않다. 그러나 아직도 극단의 세상 문을 열고 뛰어내린 일은 세상 사람들의 가슴을 경악게 하는 일이다. 그녀가 선택한 극단의 세상은 정말 그가 원하는 만큼 보장이 되어 떠난 것일까.
무엇을 보장으로 그 길을 찾아 나선 것일까. 그가 원하던 세상에 무사히 잘 도착하였을까. 세상일은 아무것도 단정할 수 없다는데 그는 무엇을 믿고 삶을 단정 지은 것일까. 이 세상에서 주어진 시간을 위해 좀 더 머물다 보면 인생에서 그리워할 제목이 생겨 줄 수 있지 않을까.
어디서 왔는가를 모르듯 어디로 갈 것인가도 모르는 것이 운명 안에 있다는 마음으로 삶의 공부를 하다 보면 언젠가는 태어난 죄의 업보까지도 벗어내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쉽게 말해서 세상을 보고 배운다는 부대낌 하나면 행복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사람도 산천초목도 자연의 대상일 테니 어쩌면 가장 손쉬운 공부로, 인간으로서 머리를 채우고 난 뒤 내가 하려는 가슴의 공부가 언젠가는 바로 나였다는 것을 알 때까지 머물다 떠나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무슨 집착과 무슨 괴로움의 근원으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였는가에 대한 대답은 듣지 못하고 온통 추측이 난무하는 질문뿐이다. 숱한 악연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지구에서 뛰어내린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단 한마디가 없다. 자꾸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전부다.
그렇다면 나도 아무 연민도 동정도 받을만한 자격이 필요치 않은 사람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살고 있다는 공부 하나를 한 셈이다. 해답을 찾아가는 인생길에서 단독으로 탈퇴해버린 그런 사람의 영혼을 보고 또 누가 그 길을 선택할지 모르나 분명 쉽게 떠날 수 있는 길을 더 잘 기름칠로 닦아 놓은 것은 틀림이 없다.
누구라도 세상살이가 싫어지면 손쉽게 선택할 수 있게 여유로움을 남겨 놓여진 길이 생겼다. 그런 사람들에게 한마디 해도 괜찮을까. 아니 간절한 부탁이 나을 것 같다. 극단적인 생으로 삶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에게 간청한다. 제발 갈 때 가더라도 절대로 간 흔적을 남기지 마라. 떠난 티를 내지 말고 재주껏 쥐죽은 듯 떠나라. 인터넷이라는 세상으로 그건 불가능 할거라는 것은 그쪽 사정이다. 왜 극단을 선택한 사람의 사정까지 들어주어야 하는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소식을 어쩌다 주워듣는 일조차도 용서하기 싫다.
절대로 그럴싸한 이유가 아무리 분명해도 그 이유를 세상 사람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 선택 날을 잡았다면 바로 그날로 쥐도 새도 모르게 공중에서 분해되는 방법을 선택하여 티끌은 고사하고 미진한 먼지조차 남기지 말고 사라졌으면 좋겠다. 법적 서류상 행방불명으로 사라진 근거조차도 모르는 깔끔한 죽음인 거다.
그런 확실한 자신이 있어 그 길을 선택한다면 아무도 뭐라 하지 못할 것이다. 지구상에는 두 길이 있다. 나 하나 고통 참아서 여러 사람이 편히 갈 수 있는 희생이란 길이 있는가 하면 나 하나 편하면 될 일이라고 선택한 길을 떠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삶의 회의로 아파해야 하는 길이다.
후자의 길은 부끄러움도 죄의식도 없이 나 하나 안하무인의 존재가 되는 거다. 어느 고등학교 여학생들의 가정학습 설문지에서 "세상 살기 싫다. 죽고 싶다"라는 식으로 써낸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흔하게 여름날에 꽃피워 대듯 나왔다고 한다. 그런 학생들이 "나도 누구처럼 자살할 거다"라고 툭하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거라고 무슨 수로 장담을 할 것인가.
머지않아 꽃잎 같은 어린것들이 무수히 쌓여진 운동장을 낙엽 쓸 듯이 꽃잎의 주검들을 쓸어 낼 날이 오지 않을 거라고 누가 큰소리칠 수 있을 것인가. 이미 그런 학생들에게는 한쪽 발은 문안에 다른 한쪽 발은 문밖에 걸쳐놓고 혼란스럽게 반복되는 영혼이 자리 잡고 있다. 언제라도 선뜻 떠날 영혼이 잠재적으로 준비되게 한다.
그러나 떠나간 존재들로 상념 할 필요는 없다. 지금 이순간 내가 확실히 할 수 있는 말은 바로 그 트라우마에 대해서다. 어린 시절 시장길을 질러갈 때 보았던 광경이 나이 먹은 지금까지 나를 치유될 수 없는 트라우마 환자로 남게 했다. 살아있는 닭을 닭장에서 꺼내어 목을 비틀어 통에다 던지고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았던 것이 내 일생에 참혹한 후회다.
그 후 성장해 가는 나의 삶을 따라다니다 끝내 지금도 내 옆에 있다. 닭의 생목을 비틀어 숨통을 끊어내는 그 형상보다 더 두렵고 무서운 트라우마가 언제 또 누구에게 어디에서 피어날지 알 수가 없다.
[문경구]
미주한인크리스찬문학협회공모 수필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