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고언(苦言)

이태상

 

코로나 팬데믹으로 여러분 모두 얼마나 힘드십니까. 저는 19361230일 평안북도 태천에서 일정시대에 태어나 다행스럽게도 8.15 광복을 남한에서 맞고 6.254.19 그리고 5.16을 겪은 후 1972년 초 직장 관계로 한국을 떠나 영국과 미국으로 타향살이를 해온 지 50년이 되어 가는 80대 중반 노인입니다.

 

몸은 한국을 떠났어도 마음은 한시도 한국을 떠난 적이 없고 마치 산()이나 숲은 가까이에서 보다 멀리 떨어져 볼 때 그 모습을 더 잘 볼 수 있듯이 누구나 해외에 나오면 국내에서보다 더 애국애족자가 되는가 봅니다.

 

그래서 떠나 와야 고향이고, 떨어져 봐야 님인 것 같습니다. 물론 속담에도 있듯이 우리말로는 이웃사촌이라고 영어로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Out of Sight, Out of Mind’라고도 하지만 그 반대로 다시 영어로 표현해서 떨어지면 더 그리워진다. Absence makes the heart grow fonder’고 할 수 있겠지요.

 

현재 거주하고 있는 미국 뉴저지주() 테나플라이란 동네에서 오늘(1221) 아침 배달된 미주판 중앙일보를 보다가 눈에 띈 기사 셋에 마음이 꽂혀 삼가 이렇게 극히 외람되나마 여러분께 주제넘은 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중앙경제 섹션 제1케네디 연설에 감동한 소년, ‘국가 중심철학으로 우뚝이란 제목으로 미국 월스트리트 리더십 사모 펀드 칼라일창업자 루벤스타인에 관한 기사입니다.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으라.” 1961년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 취임 연설의 일부다. 이 역사적 문구는 당시 전 세계 인의 애국심을 자극했고, 수많은 미래의 공직자를 낳는 계기로 작용했다.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식이 미국 전역에 생중계되던 날, 소년 데이비드 루벤스타인도 연설을 듣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결심을 굳혔다.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공직의 길을 가겠다는 다짐이었다. (기사 첫 대목을 그대로 인용한 것임)

 

케네디 대통령의 이 유명한 문구는 실은 한국에도 많이 알려져 있는 예언자(The Prophet)’ [2014년 출간된 우생(愚生)예언자(The Prophet,1923)’와 그 후속편인 예언자의 뜰(The Garden of the Prophet, 1933)’ 한글 번역 합본(자연과인문 발행)도 있음] 저자인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83-1931)“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이란 말을 인용한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국가에만 해당하지 않고, 부모·형제, 이웃, 친구, 직장동료, 인종과 국적, 남녀성별, 사회계층 등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람과 우주 자연 만물에 해당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선인(先人)들이 일찍 밝혔듯이 피아일체(彼我一體)요 물아일쳬(物我一體)임을 우리 모두 깨닫는다면, 특히 우리 단군의 홍익인간(弘益人間)/ 홍익만물(弘益萬物)과 천도교(天道敎)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망각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쉽게 말해 내가 너를 해치거나 위하면 이는 곧, 나 자신을 해치거나 위하는 것이 되고, 우리가 사는 자연환경을 오염시키고 파괴할 때 이는 우리 자신의 자멸 자살행위(自滅自殺行爲)가 되고 있음을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심한 기후변화와 코로나 팬데믹 같은 질병과 비극으로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하나는 올해의 사자성어 아시타비(我是他非)’내로남불 한자로 옮긴 신조어라는 제목으로 정치권 등 남 탓만 무성한 한 해전국 교수 선정 2위는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기사입니다.

 

내년 2021년의 올해의 사자성어로는 아시타시(我是他是)’가 선정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빌고 바라면서 최근 코스미안 뉴스(www.cosmiannews.com)에 올린 졸문(拙文) 두 개 여러분과 나누고 싶어 아래와 같이 옮겨 드립니다. 연말연시 망중투한(忙中偸閑)으로 일독해 주십시오.

 

[이태상 칼럼] 코스미안대학 설립

 

기독교인들이 주기도문(主祈禱文) 외우듯이 청소년 시절부터 내가 불러오고 있는 신종(新種) 주기도문 별곡(別曲)이 있다독일 태생 스위스 작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데미안(Demian 1919)’에서 에바 부인은 사람이 그 어떤 무엇을 절대적으로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아쉬워하다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것을 찾아 얻게 될 때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고 필연인 것으로 다름 아닌 자신의 절절한 소망과 꿈이 갖다 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Just as Frau Eva in Hermann Hesse’s Demian says: “You must not give way to desires which you don’t believe inYou should, however, either be capable of renouncing these desires or feel wholly justified in having them. Once you are able to make your request in such a way that you will be quite certain of its fulfillment, then the fulfillment will come.”


우리말에 말이 씨가 된다입턱이 되턱 된다하지 않는가. We have a saying in Korea: “Watch your words. They become seeds. What you utter comes true.”  중국에도 이런 설화(說話)가 있다. 어떤 신령(神靈) 할아버지가 어느 시골 소년에게 신비(神秘)스런 붓 한 자루를 준다. 그 붓으로 그리거나 쓰는 건 다 사실이 된다.


미국의 만화 작가이자 아동 도서 삽화가 크로켓 존슨(Crockett Johnson, the pen name of the American cartoonist and children’s book illustrator David Johnson Leisk 1906-1975)해롤드와 보라색 크레용(Harold and the Purple Crayon, 1955)’이란 어린이 그림책이 있다. 해롤드가 그리는 것은 무엇이든 다 현실이 된다는 이야기다.


, 그래서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 (Anna Eleanor Roosevelt 1884-1962)도 이런 말을 남겼으리라.


미래는 자신이 꾸는 아름다운 꿈(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 사람의 것이다. (The future belongs to those who believe in the beauty of their dreams.)”

한국전쟁으로 잿더미 속에서 불사조처럼 일어난 한국이 그 좋은 예가 아니랴. 세계 최빈민국의 하나였고, 지게와 소달구지밖에 없던 나라에서 한국산 전자제품이 세계 각국 가정에 보급되고 한국산 자동차와 배가 전 세계 각국 도로와 오대양을 누빌 날이 있을 것을 그 누가 상상이나 했던 일인가.

한국인 반기문이 유엔사무총장을, 김용이 세계은행 총재를 역임하리라고, BTS가 비틀스를 능가하는 세계적인 인기를 끌 날이 있으리라고, 한국의 영화가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최고의 작품상, 감독상, 주연상, 인기상 등을 타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고, 한국의 아리랑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로 선정될 날이 있으리라고, 현재 코비드19 방역에 있어서 한국이 모범국가가 되리라고, 세계인의 여행지 선호도에서 한국이 최우선이 될 날이 있을 것을 그 누가 꿈속에서라도 예측 예언할 수 있었을까.


지난 1988년 하계 올림픽 때 4강까지 오른 한국, 우리의 구호가 꿈은 이루어진다 (Dream Comes True)’였듯이, 앞으로도 우리 대망의 꿈은 계속해서 하나둘 이어서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그 선발주자(先發走者)로 지난 201875일 창간된 글로벌 인터넷신문 코스미안뉴스와 장차 노벨상을 능가할 올해로 제2 회째 코스미안상 공모, 그리고 지난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강원도 평창에 글로벌 온라인 코스미안대학 설립이 현재 추진 중이다. 그래서 세계 각국으로부터 한국으로 유학 올 날이 머지않았으리라.  

 

국가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나 한 사람의 개인적인 사례를 들어보더라도, 한국동란 때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일하면서 당시 미군부대 사령관의 입양과 뉴욕의 줄리아드 진학 제의를 사절했었고, 또 그 이후로 그 당시 대전에 있던 CAC(유엔의 한국원조 기구) 영국인 부사령관의 영국 옥스퍼드대학 진학 제의가 (술과 담배를 많이 해서였는지 영국으로 귀국 전에 부사령관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 수포가 되었었다.


하지만 세상일 정말 알 수 없어라. 내가 꿈도 꾸지 않았었고, 또 내가 어린 딸들에게 전혀 한 번도 언급조차 한 일 없었는데, 어쩜 아빠가 갈 뻔했었던 미국 뉴욕의 줄리아드 음대와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에 내 큰 딸 해아와 둘째 딸 수아가 가게 되었어라.


그뿐더러 우리 한국의 홍익인간과 인내천, 그리고 우리 동양의 피아일체와 물아일체 사상에 기초한 코스미안 사상을 전 세계 온 지구촌에 펼쳐, 종래의 인본주의(人本主義)와 자본주의(資本主 義) 물질문명(物質文明)의 약육강식(弱肉强食)의 패러다임(paradigm)을 어서 탈피해서 상부상조(相扶相助)의 상생(相生)과 공생(共生)을 도모하는 새로운 코스미안 시대를 열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현 코로나 사태로 도래하였어라.

지난 2018114일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격문] ‘변혁의 논리, 태서(泰誓)’를 옮겨보리라.


코스미안대학 설립

고대 중국 하나라 걸왕에게 은나라 탕왕이 띄운 격문, ‘탕왕의 호소를 빌어 아주 특별한 서약을 해봅니다.

사람들이여, 함께 생각해 봅시다.

우리 모두 하나같이 지구라는 이 작은 별에 태어나

잠시 살다 우주로 되돌아갈 나그네인

코스미안Cosmian’이 아닌가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이

모두 대우주의 축소판인 소우주라면

너를 사랑하는 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것이며

결국 온 우주를 위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그동안 잃어버렸거나 망각했던

우리 자신의 우주적 정체성과 본질을 깨닫고 되찾아

우리의 삶과 사랑을 나누는 일을 증진시키고자

기존 대학과는 전혀 다른

코스미안대학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적극적인 동참을 바랍니다.

우리 모두 각자는 이러한 코스미안으로서 각자의 신화(神話), 따라서 각자 자신의 사랑의 피와 땀과 눈물방울로 쓰여지는 인생 역정(人生歷程) 천지인화(天地人話)를 창조하는 것이어라.


So, as a Cosmian, each and every one of us is creating one’s own myth and thereby one’s own life journey written in one’s own blood, sweat and teardrops of love, worthy of the divinity of the Cosmos and of the humanity.

 

[이태상 칼럼] 우주, 영혼 그리고 사랑

인생은 네 의식(意識) 진화(進化)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경험을 네게 줄 것이다. Life will give you whatever experience is most helpful for the evolution of your consciousness.”

수용(受容/受用)하고 행동(行動)하라. 현재 이 순간, 마치 네가 선택한 것처럼 무엇이든 받아들이라. 언제나 현재 있는 것을 악용하지 말고 최대한으로 선용할 일이다. 네 적()이 아닌 네 친구, 우군(友軍), 우방(友邦)으로 삼으면 네 전() 인생이 기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Accept, then act. Whatever the present moment contains, accept it as if you had chosen it. Always work with it, not against it. Make it your friend and ally, not your enemy. This will miraculously transform your whole life.”

우주가 잠시 한 인간으로 표출(表出)된 것이 바로 너라는 사람이다.

 

You are the universe, expressing itself as a human for a little while.”

 

-에크하르트 톨레(Eckhart Tolle, 1948 - )

영적(靈的)인 스승으로 유명한 독일 태생의 캐나다인 에크하르트 톨레의 이 세 마디를 세 단어로 줄인다면 우주, 지구 그리고 나 (Cosmos, The Earth and I)가 되리라.

우주! 이 얼마나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무궁무진한 신비의 존재인가.

지구! 대우주 코스모스바다의 물방울 같고 모래사장의 모래알 같은 작은 별, 이 얼마나 슬프도록 아름다운 신비의 존재인가!

그리고 나! 소우주 지구의 소우주인 라는 존재, 이 얼마나 경이롭고 기적 같은 신비의 존재인가!

칼릴 지브란(1883-1931)의 우화집 '광인(狂人)'에 한 천문학자가 나온다. 이를 인용해 본다.

벗과 내가 사원 그늘에 혼자 앉아 있는 장님을 만났다. 벗이 말하기를 이 땅의 제일가는 현자(賢者)를 보라.” 나는 장님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잠시 후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제부터 앞을 못 보셨습니까?” 그는 태어나면서부터라고 대답했다. 내가 다시 묻기를, “어떤 지혜의 길을 따르십니까?” 그러자 그가 말하기를, “나는 천문학자라오.” 그는 손을 가슴에 얹고 말하기를, “나는 저 모든 해들과 달들과 별들을 본다오.”

 

Cosmos, The Earth, and I

 

‘Cosmos’: What an infinitely mysterious entity absolutely and utterly beyond human imagination!

‘The Earth’: What a stunningly and sorrowfully beautiful entity of pure mystery, a droplet of (or mist over) the Sea of Cosmos, or a grain of sand at the beach thereof!

 

‘And I’: What a breathtakingly wonderful entity of pure miracle, as a micro-cosmos of The Earth, the micro-cosmos of Cosmos, the macro-cosmos!

 

There is ‘The Astronomer’ from <THE MADMAN: His Parables and Poems (1918)> by Kahlil Gibran (1883-1931).

IN the shadow of the temple my friend and I saw a blind man sitting alone. And my friend said,

 

“Behold the wisest man of our land.”

 

Then I left my friend and approached the blind man and greeted him. And we conversed.

After a while I said,

 

“Forgive my question, but since when hast thou been blind?”

 

“From my birth,”

 

he answered.

 

Said I,

 

“And what path of wisdom followest thou?”

 

Said he, “I am an astronomer.”

 

Then he placed his hand upon his breast saying,

 

“I watch all these suns and moons and stars.”

우주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리고 우주의 본질이 영혼(靈魂)이라면 영혼이란 무엇일까? 영혼이 대체 무엇일까. 영혼의 개념은 동서양 문화권마다 다르고 사람마다 다 다르다. 동아시아에서는 혼()은 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람이 죽으면 육체가 썩어 없어지듯 이 영혼도 하늘에서 흩어진다고 생각했다. 혼백(魂魄)이 영혼과 같은 뜻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원래 혼백 중에서 혼() 만 영혼과 비슷한 뜻이고, ()은 육체에 가까운 개념이다.


내가 다섯 살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관속에 누워계시는 아버님의 모습은 여느 때와 같았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한동안 궁리(窮理)와 고심(苦心)을 거듭한 끝에 내가 얻은 결론은, 숨을 쉬는 동안은 살아 있는 것이고 숨쉬기가 그치면 죽은 것이다. 그렇다면 숨이 곧 생명이고 영혼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영혼을 영어로 'soul'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고대 독일어 ‘See’에서 유래한 바다 'sea'라는 뜻으로 생명과 영혼이 바다에서 왔다 가 바다로 돌아간다는 믿음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그리고 10 세 기 경부터 이 'soul'에서 죽은 사람의 넋이라는 의미의 'spirit'이란 말이 처음 생겼다. 'spirit'13세기 중반부터 고대 불어에서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라틴어에 뿌리를 둔 말로 '' '신의 숨결'이란 뜻이다.


프랑스의 비행작가 앙투안느 드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g-Exupery1990-1944)'어린왕자(The Little Prince)'는 잠시 지구별에 착륙했다가 사막에 사는 독사의 도움으로 육신의 탈을 벗고 제 별로 돌아갈 수 있었다. 우주에는 수많은 별과 은하계가 있다. 이 무한한 공간의 은하계들이 파도처럼 출렁이면 코스모스바다가 된다. 그 코스모스바다의 마음인 해심(海心)이야말로 나 자신을 포함해 우주만물의 본질이 아닐까. 그것을 신()이라고 하든 귀신(鬼神)이라고 하든, 영혼(靈魂)이라고 하든 혼백(魂魄)이라고 하든 상관없다. 아니면 숨, () 또는 생명(生命)이라고 해도 된다.

 

! 그래서 나는 그 어린 나이 열 살 때 '바다'라는 동시(童詩)를 지었고, '해심(海心)'이란 자작 아호(雅號)를 갖게 되었나 보다.

바다

영원과 무한과 절대를 상징하는

()의 자비로운 품에 뛰어든 인생이련만

어이 이다지도 고달플까.

애수에 찬 갈매기의 고향은

출렁이는 저 파도 속에 있으리라.

인간의 마음아 바다가 되어라.

내 마음 바다가 되어라.

태양의 정열과 창공의 희망을 지닌

바다의 마음이 무척 부럽다.

순진무구한 동심과 진정한 모성애 간직한

바다의 품이 마냥 그립다.

비록 한 방울의 물이로되

흘러흘러 바다로 간다.

What is the soul? One has to wonder.

The concept of the soul may vary, from the East to the West, from a person to another.

In East Asia, it’s generally understood that the soul consists of breath, which will be scattered into the sky as the dead body turns into dust.

When my father died, I was five years old. When I looked at him in the coffin, his physical appearance, alive or dead, was the same to me.

Then what’s the difference between the two, I started wondering. After much thought, I concluded that as long as one keeps breathing, you’re alive, and that as soon as one stops breathing, you’re dead. If so, then we have to say that breath, life and soul are one and the same. Isn’t it?

The English word ‘soul’ is said to have come from an old German word ‘See,’ meaning the sea, based on the belief that life arises from and returns to the sea. And from about the 10th century, it’s also said that the word ‘spirit,’ meaning the soul of a dead person as God’s breath, has come into use.

No doubt, we all are like The Little Prince of Antoine de Saint-Exupery(1900-1944), who happened to land on the planet Earth as a brief sojourner and returned to his star, getting rid of his physical body with the assistance of a snake in the desert.

There are innumerable galaxies and stars, universes and multi- verses in the cosmos. When all these cosmic waves rise and fall, they become the Sea of Cosmos. Wouldn’t the core, the Heart of the Sea, be the very essence of us all in the Cosmos? It wouldn’t matter whether it’s called ghost, phantom, spirit, soul or God. Would it?

Ah ha that’s how and why I must have composed this little poem as a ‘little prince’ myself at the tender age of ten, giving myself a new name ‘해심’ in Korean and ‘海心’ in the Chinese characters, meaning ‘the heart of the sea.’ I have been using it as my pen-name ever since.

The Sea

Thou

Symbolizing

Eternity, infinity and the absolute

Art

God.

How

Agonizing

A spectacle is life in blindness

Tumbled into Thy callous cart

To be such a dreamy sod!

A dreamland of the gull

Of sorrow and loneliness full

Where would it be?

Beyond mortal reach would it be?

May humanity be

A sea of compassion!

My heart itself be

A sea of communion!

I envy Thy heart

Containing

Passions of the sun

And

Fantasies of the sky.

I long for Thy bosom

Nursing

Childlike enthusiasm

And

All-embracing mother nature.

Although a drop of water,

It trickles into the sea.


그렇다면 또 영혼의 본질은 무엇일까?

2015년 말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양 국간 합의에 최종적이며 비가역적인 해결이란 단서에 사용된 이 비가역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변화를 일으킨 물질이 본디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일로 되돌릴 수 없다는 뜻이다.

201618일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의 저서 나의 투쟁(Mein Kampf, 1925)’이 절판 70년 만에 재출간됐다. 이 책은 192536세의 히틀러가 뮌헨 폭동으로 투옥됐던 당시 나치즘의 사상적 토대를 정리한 자서전이다. 그간의 출간 금지는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과는 달리 뉘우칠 줄 아는 독일 양심의 상징처럼 묘사돼 왔는데, 이 악명높은 책이 다시 나오게 되자 세계 언론에선 나치즘을 제대로 비판하기 위한 조치라고 합리화하며 미화했다.


일본군이 우리 윤동주를 비롯해 수많은 한국인과 중국인을 생체 실험했다지만 독일도 1904년 식민지인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땅을 뺏기 위해 헤레로족(Herero people)과 나마족(Nama people) 수만 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생존자 2,000여 명을 강제 수용소에 쳐넣고는 생체실험을 한 후 시체는 연구용으로 썼다지 않나.


그런데도 독일은 거듭되는 나미비아(Namibia) 정부의 사과 요구에도 100년이 지난 2004년에야 학살 사실을 인정했지만 그것도 총리가 아닌 경제 개발 장관이 연설을 통해 한마디 한 것이 전부이고, 경제적 배상은 계속 거부하고 있다. 그런데 독일은 왜 유대인에게 만 고개를 숙이나. 말할 것도 없이 미국 내 유대인의 영향력은 크 고 강하지만 나미비아인은 미약하고 무시할 만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불편한 진실은 국제사회 인간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자연계에서도 항상 통용되고 있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자연법칙이 아닌가. 우리가 가축을 사육해서 잡아먹고, 의료약품이나 미용에 필요한 화장품 개발을 위해 동물생체실험을 하고있는 것이 아닌가.


어디 그뿐인가. 물질문명의 개발로 자연생태계를 파괴하면서 기후변화를 초래해 지상 모든 생물의 멸종 현상을 재촉해 오지 않았는가. 어쩜 현재 창궐하고 있는 코로나19 범유행 역병이 급기야 자연의 자가 치유의 자정 능력이 발휘되고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뭣보다 인간이 먼저 멸종되어야만 한단 말인가?


그 해답의 열쇠는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게 아닐까. 그야말로 반신반수(半神半獸)라 할 수 있는 인간이 불가역적짐승으로 전락해 버릴 것인가 아니면 가역적으로 신격(神格)으로 우리 인격(人格)을 높여 볼 것인가 하는 선택지가 있지 않는가. 영어로 개를 ‘dog’이라 하지만 이 단어를 거꾸로 보면 신() ‘god’이 되듯 이 말이다.


실존과 당위를 뜻하는 말로 독일어로는 자인(sein)’졸렌 (sollen)’이 있고, 영어로는 투비(to be)’옷트투비(ought to be)’란 기본 동사가 있는데, 주어진 본능대로만 살아야 하는 짐승의 삶이 전자라면 본능을 사랑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인간의 삶은 후자이리라.


우리 냉철히 한 번 깊이 생각 좀 해보자. 우선 가역, 불가역 할 때 ()’이란 한자 거스를 을 바꿀 으로 대치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동물처럼 바꿀 수 없는 불가역(不可易)의 삶을 살지 않고, 창조적 가역(可易)의 자유라는 엄청난 특전을 받은 우리 인간이라면, 이보다 더한 축복이 있을 수 있을까.

이야말로 인간에게 부여된 권리이자 의무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선택받은 인간으로서의 우리 실존 ‘What We Are’가 조물주가 우리 인간에게 준 선물이라면, 우리의 당위 ‘What We Become’은 우리가 우리의 조물주에게 바치는 우리의 선물이 돼야 하리라.


몇 년 전 미국 CBS 방송은 당시 49세의 구글의 컴퓨터 엔지니어 토드 화이트 허스트(Todd Whitehurst) 씨가 매사추세츠주() 케이프 코드(Cape Cod)에서 자신의 정자 기증으로 태어난 생면 부지 8명의 자녀들과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만난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자녀들을 번갈아 껴안은 후 매우 경이로운 순간이라며 비록 내가 현재 이 아이들의 (법적이고 사회적인) 아버지는 아니지만 나 역시 앞으로 이 아이들의 삶에 대해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1998년 스탠퍼드대학과 대학원 재학 시절 젊은 남성의 정자를 구한다는 교내 광고를 접한 뒤 정자기증을 결심했다. 젊은 백인이자 명문대 재학 중인 학생의 정자는 특히 인기가 높았기에 그는 4년간 같은 클리닉을 통해 약 400회 정도 정자를 기증했다. 정자 기증은 철저히 익명으로 실시됐으며 그에게는 기증자 아이디(ID)가 주어졌다.

정자를 제공받는 여성 역시 기증자의 나이나 인종, 출생지 등 기본적인 정보만 제공받았다. 화이트허스트와 8명 자녀들의 만남은 그의 자녀 중 한 명인 사라(Sarah, 당시 20)정자기증 출생 형제자매 찾기(The Donor Sibling Registry)’를 통해 생물적인 아버지와 형제들을 찾으면서 추진되었다.


이 뉴스를 접하면서 나도 그럴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소년 시절부터 자위행위로 허무하고 헛되게 내쳐버린 수많은 내 정자들! 심히 후회스럽고 안타깝게 아쉽지만, 다시 좀 생각해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아닐 것 같다.

내 생리적인 씨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더 중요한 게 내 정신적 또는 내 영적(靈的)인 씨라면, 지난 84년간 살아오는 동안 사랑으로 내 쉰 숨 하나하나, 내뱉은 말 한마디 한마디, 내디딘 한 걸음 한 걸음, 써 재낀 글 한 줄 한 줄, 내 언행 하나하나가 모두 다 내가 뿌린 씨들이 아닌가.

 

좋은 씨도 나쁜 씨도, 잘 뿌린 씨도 잘못 뿌린 씨도, 비옥한 땅에 아니면 가시덤불 또는 모래밭이나 자갈밭에 떨어진 씨도 있었겠지만, 얼마만큼이라도 열매를 맺게 된다면 그 열매를 내가 직접 거두게 되든 아니든 더 할 수 없이 다행스럽고 감사할 일이다.

어떻든 사랑의 씨를 뿌리면 사랑의 열매가 맺힐 테고, 많이 뿌릴수록 수확도 커지리라. 따라서 생리적이든 아니든, 성적(性的)이든 아니든, 우리 모두 사랑의 대자녀(godson/ goddaughter of love)’ 그리고 사랑의 대부모(godfather/ godmother of love)’가 되어 보리.


2013년 개봉된 미국영화 월터 미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에 나오는 노래 스페이스 오디티 (Space Oddity)’1986년 개봉된 영화 미숀(The Mission)’에 수록된 스타맨(Starman)’글램록(Glam rock)’의 전설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 1947-2016)가 불렀다.

수천 마일 떨어져 있는 사물들, 벽 넘어, 그리고 방안에 숨겨져 있는 사물들, 접근하기 위험한 사물들을 보고 놀라워하기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목적이다.”

“To see things thousands of miles away, things hidden behind walls and within rooms, things dangerous to come toto draw closerto see and be amazed

이 문구는 월터 미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속 배경이 된 미국의 유명 잡지 라이프(LIFE)의 모토다. 월터 미티는 라이프 잡지에서 필름을 관리하는, 마흔이 넘도록 결혼은커녕 여자친구도 없지만 다른 부서에서 일하는 셰릴을 짝사랑하는 남자이다. 도무지 용기를 내지 못하는 그는 상상으로만 그녀에게 다가간다.

평생을 살면서 뭔가를 제대로 해본 적도 없고 어딘가를 가본 적도 없이 상상만 해오던 그에게 늘 그와 같이 작업하던 사진작가로부터 필름이 배달된다. 라이프는 오프라인 잡지를 폐간하고 온라 인 회사로 거듭나기 위해 구조조정에 들어가고, 경영진은 전설의 사진작가 숀 오코넬의 사진으로 마지막호의 표지 사진을 장식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숀이 필름 가운데 삶의 정수를 담고 있다는 필름은 어디에도 없다. 월터는 그 필름을 얻기 위해 숀을 찾아 나선다.


개봉 당시 이 영화의 홍보문구 꿈꾸기를 멈추고 살기 시작하라 (Stop Dreaming, Start Living)’가 이 영화가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상상이 현실이 되게 하려면 행동의 삶 곧 모험을 감행하라는 뜻이리라.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존 오도노휴(John O’Donohue 1956-2008)2004년에 나온 책 아름다움: 모든 걸 품는다 (Beauty: The Invisible Embrace)’아름다움을 축복함(A Blessing for Beauty)’이란 기도문이 있다.

아름다움을 축복함


네 자연의 신성(神性)을 네가 볼 수 있도록,

네 삶의 아름다움이 네게 잘 보이기를.

지상의 모든 경이로움이

네 모든 작은 비밀의 감옥으로부터

너를 불러내 가능성의 초원으로 인도하기를

하루가 얼마나 큰 기적인지 볼 수 있도록

동트는 새벽빛이 네 눈을 뜨게 해주기를

황혼의 저녁 기도가

네 모든 두려움과 어둠을

편안함으로 감싸주기를

어려움을 겪을 때면

기억의 천사가 지난날의 수확을

뜻밖의 선물로 갖고 널 찾아주길

네 가슴속 희망의 촛불을

어떤 검은 구름이 꺼버리지 않기를

너 자신에게 너그럽고

네 삶을 하나의 큰 모험으로 여기기를

외부의 공포와 절망의 소리가

네 안에 메아리치지 않기를

절실한 네 정신의 지혜를

네가 언제나 따를 수 있기를

네가 한 모든 선행과 사랑 그리고

네가 겪은 모든 고통이 깨우침으로

네 삶을 천만 배로 축복해주기를

그리고 사랑이 네 문을 두드리거든

온 세상이 새벽을 반기듯

네가 그 찬란한 빛을 받아들이기를

네 영혼에 닿는 신()의 입김을 느끼면서

너를 영원토록 빚고 지켜주며 부르는 네 영원성의 기쁨을

네가 고요와 정적 속에서 찾을 수 있기를

혼란과 걱정과 공허함이 있다 해도

네 이름이 하늘에 적혀 있음을 알기를

네 삶이 네가 조용히 바치는 성찬으로

네 주위로 베풀어져 의심이 경외심으로

거북함과 긴장됨이 우아함과 고상함으로

좌절된 희망이 날개를 달고 고뇌가 마침내

평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기를

신성한 아름다움이 너를 축복해주리


A Blessing for Beauty

May the beauty of your life become more visible to you,

that you may glimpse your wild divinity.

May the wonders of the earth call you forth from all your small, secret prisons and set your feet free in the pastures of possibilities.

May the light of dawn anoint your eyes that you may behold what a miracle a day is.

May the liturgy of twilight shelter all your fears and

darkness within the circle of ease.

May the angel of memory surprise you in bleak times

with new gifts from the harvest of your vanished days.

May you allow no dark hand quench the candle of hope

in your heart.

May you discover a new generosity towards yourself,

and encourage yourself to engage your life as a great adventure.

May the outside voices of fear and despair find no echo

in you.

May you always trust the urgency and wisdom of your

own spirit.

May the shelter and nourishment of all the good you have

done, the love you have shown, the suffering you have

carried, awaken around you to bless your life a thousand times.

And when love finds the path to your door may you open

like the earth to the dawn, and trust your every hidden color towards its nourishment of light.

May you find enough stillness and silence to savor the kiss of God on your soul and delight in the eternity

that shaped you, that holds you and calls you.

And may you know that despite confusion, anxiety and emptiness, your name is written in Heaven.

And may you come to see your life as a quiet sacrament of service, which awakens around you a rhythm where doubt gives way to the grace of wonder, where what is awkward and strained can find elegance, and where crippled hope can find wings, and torment enter at last unto the grace of serenity.

May Divine Beauty bless you.


아름다움이란 어떤 것인지 우리 생각 좀 해보리라.

아름다움이란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이요.

아름다움이란 꾸밈없이 자연스러움이요.

아름다움이란 억지 없는 순조로움이요.

아름다움이란 오해 없는 이해심이요.

아름다움이란 조건 없는 베풂이요.

아름다움이란 악의 없는 선심이요.

아름다움이란 거짓 없는 진심이요.


이상의 일곱 마디를 한마디로 줄인다면 진() () ()는 셋이 아니라 같은 하나이며 셋중에 그 으뜸은 미()인데, ()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이리라.

여성미, 남성미, 인간미, 자연미, 나체미, 의상미, 조형미, 통속미, 풍속미, 미숙미, 성숙미, 열정미, 노련미, 내성미, 외향미, 정물미, 동작미, 반전미(反轉美), 역전승패미(逆轉勝敗美)의 미() 등 부지기수(不知其數)이리라.

 

영원 속에 찰나 같은 순간,

우주 속에 티끌 같은 세상,

우리 모두의 덧없는 인생,

모든 게 더 할 수 없이

한없이 가슴 아프고

저리게 슬프도록

아름다움이어라.

 

김소월의 시 못 잊어의 셋째 구절

그러나 또한긋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나지요?”


이 시의 첫구 그러나 또한 긋이렇지요를 빌려서 아름다움이란 보는 사람 눈 속에 있다(Beauty is in the eye of beholder)는 서양 속담처럼 사랑이란 색안경을 쓰고 보면 다 이뻐 보이지 않던가.

 

그렇다면 사랑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일까.

2016년 미국에서 출간된 과학서적 치유: 육체를 지배하는 정신 과학탐구(A Journey Into the Science of Mind Over Body)’의 저명한 영국의 언론인으로서 과학서적 저술가인 저자 조 마천트(Jo Marchant, 1973 - )는 서론에서 기존 서구 의학계의 상반되는 대표적인 두 가지 이론을 대치시켜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한쪽에는 육체가 기계와 같아 질병 치유에 사상이나 신앙이나 감정이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다는 것이고, 다른 쪽에는 모든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이며 통속적인 재래식 대체민간요법 등을 열거한다. 그러고 나서 유전학과 의료미생물학박사 학위 소지자인 저자는 최근에 와서 서양의 학계에서도 인정하게 된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를 예로 든다.


마취도 하지 않은 모의외과수술(fake surgery)’이 시술되는가 하면, 아무런 약성분이 들어있지 않은 가짜약도 그 알약의 크기가 작은 거 보다 큰 게 더 효력이 있고, 먹는 약이 진짜가 아닌 플라시보임을 환자가 알고 있을때에도 그 효력이 발생하며, 심지어는 플라시보가 단순히 환자의 주관적인 심리상태를 반영해 주지 않고 인체 내 면역체계(immune system)에 영향을 주고 있음 이 여러 실험을 통해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이것이 돌팔이 사기극이나 희망 사항 또는 모든 게 생각 나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약품의 효과와 같이 구체적인 물리적 효과라고 플라시보 효과의 생물학적 근거를 저자는 설명한다. 우리가 복용하는 어떤 알약이든 약이라기보다는 이 알약을 삼키면 내 병이 나을 거라는 하나의 믿음만으로도 우리가 실제로 약을 먹었을 때처럼 우리 몸속에서 자연적으로 엔도르핀 (endorphins)이나 도파민(dopamine) 같은 화학성분 물질이 분출된다는 얘기다.


이렇게 플라시보효과를 검토한 후, 저자는 사람들이 느끼는 만성 피로감이나 소화기능장애나, 신체적인 고통 등을 어떻게 정신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지를 최면 혹은 인지행위요법, 의식요법, 심리 요법, 아니면 가상현실 등 여러 분야의 연구조사 리서치를 통해 다루고 있다.

 

결론적으로 내가 이 책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몸 상태가 좋다 안 좋다의 차이는 내가 어디에다 신경을 쓰고 정신을 어디에 다 쏟느냐, 몸이 아니라 맘이라는 것이고, 아픈 사람에겐 사랑 이상의 약()이 없다는 거다.


그렇다면 앞에 제기한 물음: ‘사랑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일까로 돌아가 보리라. 사랑은 몸에서 생기는 것일까. 아니면 맘에서 생기 는 것일까. 맘과 정신은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영혼이 맘과 정신과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영혼이 있다면 몸 안에 아니면 몸 밖에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영혼이 몸 안에 존재한다면 몸 어디에 깃들어 있을까.

고대 이집트인들은 영혼이 가슴 심장 속에 있는 것으로 믿었고, 중세 유럽에서는 머릿속에 있다고 생각해 영혼을 찾겠다고 두뇌를 절개하기도 했다. 심장이식수술까지 하게 된 오늘날에 와서는 세포기억설(Cellular Memory)’이란 것도 있는데, 장기세포에도 기억 능력이 있어 이식수술 시 기증자의 개성적인 특성이 따라간다는 이론이다. 세포기억설의 창시자 게리슈워츠(Gary Schwartz, 1944 - )박사는 지난 20여 년간 70여 건의 사례를 기록해 놓았다.


이탈리아의 신경외과전문의 세르조 카나베로(Sergio Canavero, 1964 )는 미국의 신경과학회 콘퍼런스에 참석해 사람의 머리를 다른 사람의 몸에 이식하는 계획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렇게 머리 이식수술이 머지않아 현실화한다면 그야말로 몸과 머리가 뒤바뀌는 전설이나 신화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201412월에 출간된 나의 역서(譯書)로 독일작가 토마스 만 (Thomas Mann 1875-1955)의 중편소설 뒤바뀐 몸과 머리(The Transposed Heads, 1940)’에서처럼 말이다.

몸과 맘과 정신과 영혼이 같은 것이든 아니든, 어떻든 인간 그리고 더 나아가 우주의 본질은 사랑임이 틀림없어라.

      

끝으로 세 번째는 유승준 방지법? 제가 공공의 적이냐는 제목과 유승준 유튜브서 거칠게 항의라는 부제목의 기사로 가수 유승준(미국명 스티브 승준 유)이 더불어 민주당 김병주 의원이 발의한 이른바 유승준 방지법에 대해 제가 공공의 적이냐며 반발했다는 기사입니다.

 

국민 여러분께서 해량(海諒/海量)해 주시리라 굳게 믿고, 솔직한 제 심정(心情)을 좀 피력해보겠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병역의무에 관한 한 국민정서가 어떠할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이제는 우물 안 개구리도토리 기재기식의 화석화된 고정관념에서 졸업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저는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한국에서 자라던 청소년 시절 함석헌 선생님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를 탐독하고 우리 한민족의 역사의 흐름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부터 잘못되지 않았는가 저 또한 비분강개(悲憤慷慨) 했었지요.

 

그러다 대학 진학 때 어떤 전공과목을 선택할까 생각하다가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대학 과정은 하나의 교양과정에 불과할 것이다. 앞으로 일생을 살아가는데 학문적인 기반, 경제적인 기반, 사회적인 기반, 다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정신적인 기반을 닦는 것이 급선무라고.

인생은 망망대해에 떠도는 일엽편주(一葉片舟) 같다지만 그런대로 내 나름의 방향감각을 갖고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항해해 보기 위해서는 나침반 같은 인생관을 무엇보다 먼저 확립해 봐야겠다고. 그래서 선택한 과목이 종교철학이었습니다.


대학 시절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반대, 돈키호테처럼 일인거사(一人擧事)’를 도모했다가 수포가 된 데다, 설상가상으로 첫인상이 코스모스 같았던 아가씨와의 첫사랑에 실연(失戀)당해 나는 동해에 투신까지 했었지요.

1910829일 한일 합병 조약에 의해 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 빼앗긴 우리나라 국치(國恥)의 한일합방(韓日合邦)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군에 가담하셨다가 만주로 떠나신 뒤 1945815일 해방이 된 다음에도 아무 소식 없는 외할아버지와 외삼촌들 이야기를 듣고 자라서였을까, 어려서부터 나는 내가 좀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나도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 못지않은 애국 투사가 되었을 텐데 하면서 어린 두 주먹을 꼭 쥐고 작은 가슴을 쳤습니다. 또 그러다 보니 나는 4.19세대가 되었습니다.

대학 다닐 때 선거 운동을 좀 한 것이 주목되었었는지 오래전에 고인(故人)이 되셨지만 당시 야당인 민주당의 중진급 국회의원이던 모 인사께서 나보고 자기 비서로 일해 달라는 청을 사절하고 독불장군처럼 나는 엉뚱한 일을 남모르게 혼자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앞으로 우리 세계는 정치, 경제, 문화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국제무대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외국어를 아는 것이 현대인의 필수적인 상식에 속할 것으로 판단하고, 나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영어는 물론 일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까지 자습했고, 지금은 거의 다 잊어버렸지만, 대학에서는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러시아어, 중국어, 아랍어까지 배웠습니다.


그래서 대학생 시절 나는 영--프랑스-스페인어를 다른 대학생들과 군 장성 및 회사 사장님들에게 개인교수도 했지요. 때는 자유당 말기, 이승만 대통령이 독선적인 자아도취에 빠져 부정 선거를 통해 영구집권을 꾀하고 있었습니다. 초대나 2대만 하고 물러나셨다면 미국의 조지 워싱턴처럼 대한민국의 국부가 되실 텐데 자신의 남은 여생을 그르치고 한국 역사의 바람직한 흐름을 망쳐 놓고 계신 것이 아닌가. 젊은 혈기에 나는 분통이 터졌습니다.

미숙하고 설익은 나이 탓이었겠지만 남자로 태어나서 갖지 못할 직업이 세 가지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지요. 첫째는 비서직, 둘째는 대변인직, 셋째는 대서나 대필업으로 얼마나 못났으면 제 일을 못 하고 남의 심부름이나 하고, 제 말을 못 하고 남의 말이나 옮기며 제 글을 못 쓰고 남의 글이나 대신 써주랴 싶었습니다.

그러니 국회의원이라면 몰라도 국회의원 비서직은 직업으로 여겨지지도 않았을뿐더러 이왕이면 대통령 비서 노릇을 해보리라. 그것도 대통령 비서직이 탐나서가 아니고, ‘호랑이를 잡자면 호랑이 굴게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그 누구를 암살이라도 하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없었죠.

세간에 나도는 얘기로는 이 대통령께서 간신배, 모리배, 아첨배 무리들의 인()의 장막에 가려 민의(民意)와 세정(世情)을 제대로 살피시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니 내가 측근자가 되어 사심 없이 직언(直言)을 해보리라.


그래서 지금은 청와대라 하지만 그때는 경무대로 불리던 대통령 비서실의 의전비서가 되기로 마음먹고 당시 유력한 고위층 모모 인사의 천거까지 받았습니다.

한편 만일 계획대로 나의 간언(諫言)이 주효하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 나는 학생운동에도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 종로에 있는 고려당 빵집에 들렸다가 우연히 나는 한 아가씨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 아가씨는 너무도 코스모스처럼 청초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뒤를 밟아 신촌까지 따라가서 인사를 나누고 그 후로 우리는 몇 번 만나 식사도 하고 영화도 보고 음악 감상실에도 갔었죠.


아가씨는 경남여고를 나와 이화여대 약학과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1959년 겨울 방학으로 부산에 있는 집에 내려가면서 아가씨가 내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단테의 신곡 (Divine Comedy)’ 원서 한 권을 나는 받았습니다.


내가 추진하는 일이 성사되는 대로 부산으로 내려가 아가씨의 부모님을 찾아뵙겠다고, 만일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개학해서 아가씨가 상경한 후 다음 해 214일 성() 발렌타인 축일(St. Valentine’s Day)호수 그릴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진 며칠 후 나는 증발되고 말았습니다.


갖은 고초를 겪고 구사일생으로 은신하면서 나는 나의 코스모스 아가씨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약속된 시간과 장소에서 만나볼 수 없게 되었지만 나를 꼭 기다려 달라는 간곡한 편지를 그냥 종이에 다 펜과 잉크로 쓰기는 성의가 부족한 것 같고 성()에 안 차 나는 주사기로 피를 한 대접 뽑아 붓으로 창호지에다 혈서(血書)를 써 소포로 부쳤습니다.


이 혈서를 받아보고 질겁을 했는지 코스모스 아가씨에게서 자기를 잊어달라는 짤막한 답장이 왔습니다. 목숨을 걸고 무모하게 꾀하던 일이 틀어져 나락을 헤매면서도 코스모스 아가씨에 대한 사랑으로 간신히 버티어 오던 나에게 이 마지막 희망의 불빛이 꺼지자 너무도 깜깜 절벽 절망뿐이었습니다.


더 이상 살아 볼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어려서부터 미리 짜 놓았던 마지막 코스 밟기로 나는 결심을 했습니다. 마지막 코스란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최선을 다한 결과, 최악의 경우에 직면해서 내가 취할 수밖에 없는 최후 조치였습니다.


시험이고, 사업이고, 연애이고 간에 무슨 일이든 시작할 때 미지수(未知數)인 결과에 전전긍긍(戰戰兢兢)하다 보면 불안감과 초조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사람 꼴이 안 되는 것 같아, 물론 최선의 결과를 희망하고 기대하며 어떤 일이든 시작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처음부터 최악의 경우까지 각오해 놓으면 밑져 봤자 본전격으로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최악의 사태보다 더 나쁠 수는 없지 않겠나 하는 발상에서 나온 조치였지요.

사사건건 일마다 최악의 경우를 각오하는 것보다는 몰아서 한꺼번에 해두는 것이 더 유유자적(悠悠自適)하듯 마음의 여유가 생길 것 같아 나는 최악 중의 최악을 각오했습니다. 하다 하다 안 되면 자폭하면 되지 않겠나? 살다 살다 못 살겠으면 죽어버리면 되겠지만, 그것으로도 충분치 않다고 할 때, 가령 내세가 있다고 가정해서 지옥하고도 그 지옥 맨 밑바닥까지 갈 각오만 되어있으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지요.

그렇다 치고, 그럼, ‘최악 중의 최악의 경우 어떻게 자살을 할 것인가? 나는 그 구체적인 방법까지 강구해 두었었습니다. 배라도 한 척 구할 수 있으면 인생 자체에 비유되는 망망대해로 노를 저어 가는 데까지 가다 죽으리라. 그렇지도 못하다면 그냥 바다에 뛰어들 어 헤엄쳐 가는 데까지 가다 죽으리라.

이것이 내가 선택한 나의 죽는 방법인 동시에 나의 사는 방법이었습니다.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나의 최선을 다 해보겠다는 나의 결심과 의지였지요. 이렇게 해서 마치 오래 비장했던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를 뽑듯....


미치고 못난 놈이라 욕하셔도 바다 코스모스의 품에 뛰어 들겠습니다

이런 유서(遺書)코스모스 아가씨에게 띄우고 나는 동해바다에 투신했습니다. 정말 인명은 재천이었을까. 구사일생(九死一生)이 아닌 구십구사일생(九十九死一生)으로 목숨을 건져 척추 디스크 수술을 받으며 서울에 있는 메디컬 센터에 내가 입원해 있는 동안 4.19가 났습니다.


하루는 신문에서 코스모스라고 한 4.19 의연금 기부자가 명단에 있는 것을 보고 틀림없이 코스모스 아가씨, 내가 4.19운동에 관여 동참했다가 희생된 것으로 알고 나를 생각하는 추모의 정()이라고 단정, 나는 감읍(感泣)했습니다.

이 순간 죽어도 한이 없을 만큼 나는 행복했지요. 이 행복감을 만끽하면서 나는 영원히 잠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 수술 받고 괜 찮은 몸을 꾀병을 앓아 두 번, 세 번 수술을 더 받았습니다. 수술을 받다가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제일 좋겠고, 다시 깨어난다 해도 코스모스의 추억만으로 나는 남은 여생,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요. 그러자면 내가 차라리 성불구가 되는 것이 편리하지 않겠나 하는 속셈에서였지요. 척추 수술을 받으면 성불구가 된다는 말을 나는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자나 깨나 코스모스를 생각하면서 일 년 가까이 입원해 있던 어느 날, 다시 신문에서 이대 졸업반 학생들에게 앙케이트로 설문 조사한 여학생들의 결혼관에 대한 기사를 나는 읽게 되었죠. 나의 코스모스도 졸업반이었으니까요. 그 가운데 결혼하지 않겠다는 몇몇 학생의 말이 내 눈에 띄었습니다. 또 그중에서 남자의 생애가 너무도 모질고 비참한 것 같아

이 말이 내 가슴을 무섭게 쳤습니다. 이렇게 내가 살아 있는데 죽은 줄만 알고 나를 못 잊어 결혼도 안 하겠다고 하는구나. 내가 참으로 못 할 짓을 하고 말았구나. 한시라도 빨리 이 끔찍한 고통에서 코스모스를 해방시켜야겠다고 생각하니 나는 또 자신이 없었습니다. 혹 내가 이미 성불구자가 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내가 코스모스앞에 나타날 수 없지. 성불구가 아니라도 아빠 구실, 아빠 노릇을 하는 아빠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심히 미심쩍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정충(精蟲) 정자(精子) 검사까지 해보고 나서야 안심하고 나는 코스모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1961214호수 그릴에서 만나자고. 이날은 집안 어른들도 그 자리에 나오시도록 한 터라 학교로 보낸 나의 편지를 코스모스가 받아보았는지 확인하려고 이대로 찾아 가보았더니 편지를 수신자 본인이 찾아가지도 않은 상태였습니다. 나는 그 편지를 되찾아 코스모스가 서울에서 거처하는 주소를 물어 찾아갔지요.


그야말로 착각은 자유, 망상은 바다라고 만나보니 내가 그동안 너무도 크게 착각, 얼토당토 않게 터무니없는 망상, 망념에 사로잡혀 온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코스모스는 나와 헤어진 후 교제하는 다른 남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진심으로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고 돌아오는 나는 허탈감과 공허감에 빠져 눈앞이 아찔했지요.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꺼지는 듯했습니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세상에 (죽었다가) 새로 태어난 것처럼 말할 수 없는 희열과 희망에 차 코스모스와 함께 할 한없이 보람되고 복된 아름다운 우리의 앞날을 꿈꾸었었는데


스웨덴의 정치가로 국내 정치 무대 진출이 여의치 않자 국제 정치 무대에서 활약 196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전 유엔사무총장 닥 함마슐트(Dag Hammarskjold 1905-1961)처럼 나도 외교관이 되어 우리나라의 명실상부한 자주독립과 우리 민족의 숙원인 평화적인 남북통일을 위해 힘써 보리라는 포부와 야심으로 전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고등고시용 법률책들을 한 보따리 사 놓고 몸도 추스르고 요양할 겸 설악산에 있는 어느 절에 가서 행정고시 준비를 하기로 했었는데

나는 자포자기 끝에 코르셋을 한 몸으로 자원입대, 의병 면제된 병역 의무를 사서군대 생활을 했습니다. (고시 공부하려던 책들은 다 불태워 버리고.)


6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돌이켜 보면 나의 첫사랑이 이루어졌더라면 평생토록 코스모스를 그리워하면서 키워온 코스미안 사상과 철학도 싹트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래도 저래도, 얻어도 잃어도, 다 좋고 괜찮다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가는 길이 오는 길 되고, 오는 길이 가는 길 되며, 저 바다의 밀물과 썰물처럼 말입니다.

 

한두 자 적는다는 게 길어지고 말았습니다여러분 아무쪼록 이 코로나 역병 위기를 잘 극복하시고 부디 건강히 새해를 맞아 많은 복을 만들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망언다사(妄言多謝) 

이태상(李泰相) 드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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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희 기자

전명희 기자
작성 2020.12.24 10:51 수정 2020.12.2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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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