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코스미안뉴스 자료]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 것에는 결이라는 게 있다. 바위에도 바람에도 나무에도 결이 있다. 사람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결이 수없이 많다. 예컨대 마음결, 살결, 머릿결, 숨결 등 사람은 안 밖으로 거의 모든 것이 결이다. 그중에서도 숨결은 참으로 다양하다. 조용히 정좌한 체 명상이나 좌선을 하며 내 쉬는 숨, 등산하거나 달리며 내쉬며 헐떡이는 숨, 산을 오르며 가쁘게 몰아쉬는 숨, 근심 걱정으로 가슴을 짓누를 때 나오는 깊은 한숨, 서로 사랑을 하며 내쉬는 숨, 사람은 평생을 이런 숨결과 함께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내쉬는 숨결은 우리의 삶에 따라 온갖 모습으로 그 사람과 함께하는 것인 만큼 숨결을 통해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가늠하기도 한다. 죽는 날까지 온갖 의미를 가진 숨을 쉬며 살아가는 것이다.
숨을 쉰다는 것은 동물이나 사람의 생명 파동이자 살아있음의 확실한 표시다. 호흡은 늘 현재에 있지 과거도 미래도 없는 것이기에 숨을 멈추는 날이면 우리는 이 세상과 영원히 이별해야 한다. 사람이 숨 쉬는 모습은 세월 따라 다르다. 갓난아기 때는 배로 숨을 쉬다가 나이가 들어가며 가슴으로 숨을 쉬게 되고 세월이 더 지나면 어깨로 숨을 쉰다. 그러다 세상과 이별을 할 때가 가까워지면 목구멍으로만 숨을 쉬다 마지막에는 숨을 쉬지 않는다. TV 사극을 통해 본 것이지만 옛날 왕이 숨을 거둘 때 어의(御醫)가 코에다 얇은 종이를 갖다 대어 종이가 움직이지 않으니 신하들이 엎드려 통곡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이런 숨결 말고도 또 다른 결들이 있을 것인데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나는 어떤 결을 가진 사람일까. 삶의 결 같은 것 말이다. 내 모습을 내가 볼 수 없으니 알 수는 없겠지만, 그리 부드러운 결은 아닐 거라는 생각은 하고 산다. 그래도 누군가에게는 거칠어 보일 수도 있겠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부드럽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사람이 나이 들어가며 자신의 결 따라 산다는 것이 얼마나 보기 좋은 모습인지 모른다. 아흔이 다된 나이에도 자신의 결 따라 사는 사람을 보면 부럽기만 하다. 그리고는 저 모습을 나의 거울로 삼으리라 다짐하는 것이다. 살다 보면 결을 거슬러 살다가 인생이 망가지는 것을 수없이 보고 살았다. 그런 삶은 언제나 얻는 것 보다 잃는 게 훨씬 더 많다. 사람이 결대로만 살 수 있다면 그때는 우리가 믿는 종교마저도 필요 없을 것이다.
그보다 내가 진정으로 궁금한 것은 내가 쓴 글은 어떤 결을 가졌을까를 생각하는 일이다. 그 사람의 문체라는 말도 좋지만, 결이라는 말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글 안에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서는 이런 생각이 든다. 글은 나의 삶이 각기 다른 질감으로 하나의 직물을 짜듯 올올이 얽혀 완성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하기에 내가 완성한 직물(글)이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치고 평가받을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작가로서의 궁금증이다. 글 쓰는 삶을 살아가며 바라는 게 있다면, 내가 쓴 글의 결은 삼배처럼 거칠기도 하고, 모시처럼 깨끗하고 단아하기도 하고, 때로는 비단처럼 부드러운 결이었으면 좋겠다.
작가라는 게 뭐 별것인가.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작가의 글은 절대 현학적이지 않다는 것과 생각은 소박하고 단순해서 명쾌한 논리로 물 흐르듯 글을 쓴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도 그렇다. 노자의 물처럼 말이다. 물은 때로는 계곡을 굽이치며 흐르다 떨어지는 폭포가 되고 가다 가로막는 게 있으면 부딪쳐 물보라를 일으키다 돌아간다. 큰 웅덩이를 만나서는 뒷물을 기다려 다시 흐른다. 유유히 흐르는 큰 강을 만나서는 구름도 싣고 바람에 이는 잔물결에 물비늘도 반짝인다. 그러다 밤이면 달과 별을 드리우고 바다로 흘러가는 것이다.
내가 쓰는 글도 넓고 깊은 강의 소리 없이 흐르는 물결처럼, 그렇게 쓰고 싶다.[글=이홍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