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임진왜란 전적지 답사

이순신 장군의 어란포해전지를 가다

사진=코스미안뉴스 / 어란포해전지는 현재의 전남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이다.


정유재란 때인 1597년 음력 7월 15일(이하 날짜는 음력) 거제도 북단의 칠천량에서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을 궤멸시킨 왜군은 전라도 점령을 위해 수륙병진으로 서진을 계속하였다. 왜 수군은 남원성 공략에 육군과 함께 동참하여 1597년 8월 16일에는 남원성을 함락시킨 후 다시 해상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때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 장군은 8월 3일자로 진주 손경례의 집에서 삼도수군 통제사로 다시 임명된 후 조선수군 재건에 나섰다. 섬진강을 건너 구례, 곡성, 옥과를 거쳐 순천에서 일부 무기를 수습하고 8월 9일 낙안을 거쳐 보성에 이르러서는 600석이 넘는 군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8월 19일에 장흥 회령포에서 경상우수사 배설로 부터 남은 배12척을 인수받고 다음날인 8월 20일 이진(전남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으로 이동하였다.

이 때 왜군은 약 한나절 간격의 시차를 두고 이순신을 추격해 오는 상황이었다. 이진에 당도한 이순신 장군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몸이 허약해져 토사곽란 증세로 심한 몸살을 앓고 병세가 심각해져 8월 23일에는 배에서 내려 조리한 후 겨우 병세를 회복하고는 8월 24일 진을 어란포로 이동하였다. 이틀 후인 8월 26일 오후에 전방 감시 초소장인 탐망군 임준영으로 부터 왜 수군이 이진에 도착했다는 최초 보고가 들어왔다.


사진=코스미안뉴스 / 김정호의 동여도에 나타나는 어란포


그로부터 이틀 뒤인 8월 28일 아침 일찍 적선 8척이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이순신이 머물고 있는 어란포로 들이닥쳤다. 여러 배들이 겁을 먹고 경상우수사 배설은 피하여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적이 바짝 접근해올 때까지 버티고 있다가 호각을 불어 신호를 하고 깃발을 휘들러 공격을 개시했다. 이순신 함대는 적을 해남반도 끝에 있는 갈두(해남군 송지면 갈두리)까지 추격하여 격퇴하고 되돌아 왔으니 이것이 어란포해전이다.

패잔병들과 함께 남은 배 12척을 겨우 수습한 상황에서 이순신이 만약 어란포에서 도망이라도 쳤다면 적은 얕잡아보고 기세등등하게 대규모 공격을 해왔을지도 모른다. 추격을 중단하고 돌아온 이순신 함대는 장도(전남 해남군 송지면 내장리)로 진영을 옮겼다가 다음날 아침인 8월 29일에는 진도 벽파진으로 건너가 진을 쳤다. 어란포해전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칠천량해전에서 왜군에게 처절하게 패했던 조선수군에게 이순신과 함께 싸우면 다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어란포해전 전후의 난중일기를 살펴보자.

1997년 8월 24일. 맑음.

일찍 도괘(刀掛, 전남 해남군 북평면 남성리)에 도착해 아침을 먹었다. 어란(於蘭, 전남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 앞바다에 도착했다. 가는 곳마다 텅 비어 있었다. 바다 가운데서 잤다.


8월 25일. 맑음.

그대로 머물렀다. 아침을 먹을 때, 당포(唐浦)의 어부가 방목하던 소를 훔쳐 끌고가 잡아먹으려고 왜적이 왔다는 헛소문을 냈다. 나는 이미 그 말이 거짓인 줄 알고 있었기에 헛소문을 낸 2명을 붙잡아 곧바로 목을 베어 높이 매달았더니 군중(軍中) 인심이 크게 진정되었으나 배설은 이미 도망쳐 버렸다.

8월 26일. 맑음.

그대로 어란(於蘭)에 머물렀다. 임준영(任俊英)이 말을 타고 달려와서 “왜적이 이진(梨津)에 도착했다”고 보고했다. 우수사(김억추)가 왔다. 노젓는 병사와 기구를 갖추지 못하여 꼴이 말이 아니다.

8월 27일. 맑음.

그대로 어란(於蘭) 바다 가운데 머물렀다. 배설이 와서 만났는데 두려워하는 빛이 역력하다. 내가 "수사는 어디로 도망갔더냐?"고 불쑥 물었다.


8월 28일. 맑음.

적선 8척이 갑자기 들어오자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피하려고 했다. 경상 수사(배설)도 피해 물러나려고 했다. 나는 동요하지 않고, 적선이 가깝게 다가왔을 때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둘러 뒤쫓게 했더니 적선들이 물러갔다. 갈두(葛頭, 해남 땅끝마을)까지 추격했다가 돌아왔다. 뒤따르는 배가 50 여척이라고 했다. 저녁에 진을 장도(獐島)로 옮겼다.

사진=코스미안뉴스 / 정면에 보이는 섬이 어불도이며 오른쪽 끝자락을 돌아서면 누엣머리가 나온다.


​​어란포해전 당시 이순신 함대가 머물고 있었던 곳은 어디일까. 어란 포구 바로 앞에는 어불도라는 섬이 있다. 그 섬에 '누엣머리' 해변이 있다. 그곳에 있는 바위의 형상이 마치 누에의 머리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어란항에서 서쪽 마을 끝으로 가면 '어란 여인'에 대해 설명하는 표시석이 하나 있고 그 바로 앞에 선착장이 있다. 선착장에서 바라보면 어불도가 바로 눈앞에 보인다. 어불도의 서쪽 끝자락을 돌아서면 누엣머리가 나온다. 이곳이 이순신 함대가 진을 쳤던 곳이라고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다. 누엣머리는 바람과 파도가 잔잔한 지형이며, 해남이나 진도 방면 양쪽에서 바라보아도 잘 보이지 않아 배를 숨기기 좋은 장소다.

사진=코스미안뉴스 / 어란포와 누엣머리 지도


이순신 장군이 어란포 항구가 아닌 어불도의 누엣머리에 진을 친 이유는 간단하다. 어란항은 적이 육로로 추격해 와서 정박해 있는 조선수군을 공격할 수 있는 곳이므로 바다 가운데의 어불도라는 섬에 진을 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섬에 진을 치면 병사들의 탈영도 방지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이 여기서 머물다가 벽파진으로 옮겨가기 전 잠시 들렀던 장도는 해남군 송지면 내장리다. 원래 섬이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매립으로 육지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어란포에는 조선 여인 어란과 관련이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전해 온다. 정유재란 때 일본 장수 칸 마사가게(管正陰)는 어란진에 주둔하고 있던 어느날 그의 연인인 조선 여인 '어란'에게 이순신이 있는 명량으로의 출병 기일을 발설했다. 어란은 그 사실을 이순신에게 전하여 명량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게 도왔다. 이로써 어란은 나라를 구했으나, 자신의 연인이 해전에서 전사한 것을 비관하여 여낭이라는 낭떠러지에서 바다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어느 어부가 그 시신을 거두어 바닷가에 묻어주고 석등룡을 세워 그녀의 영혼을 위로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해남에 근무했던 어느 일본인 순사의 유고집에 나오는 이야기다.


사진=코스미안뉴스 / 어란여인 이야기를 새겨놓은 표지석이 어란포 서쪽 끝자락에 있다. 국립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강봉룡 원장이 작성한 글이다.


구전으로 전해오던 이야기를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일본인이 정리를 했다니 조금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이 설화가 만약 역사적 사실이라면 일본군 장수 칸 마사가게가 어란포에 머문 시기는 1597년 8월 28일부터 9월 14일 사이였을 것이다. 그 당시 이순신은 진도 벽파진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이순신에게 고급정보를 전했다면 그 일대에 잠입하여 정보를 수집하던 조선 망군 임준영을 통해서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

취재차 어란포에 갔을 때 그곳 토박이 향토사학자인 박흥남 님은 어란포해전 당시 조선수군이 진을 치고 있었던 곳은 어불도 뒷쪽 누엣머리라는 이야기와 함께 구전으로 전해오는 '어란 여인' 이야기를 상세하게 일러주셨다. 이순신 장군이 이진에서 어란으로 옮길 때 거쳐온 도괘(刀掛)가 해남군 북평면 남성리 '칼쾡이'라는 사실도 알려 주셨다.

명량대첩의 전초전적인 성격을 띠는 어란포해전은 비록 그 규모가 작고 큰 전과도 없지만 팬잔병들과 남은 배를 수습한 후 치른 최초의 전투에서 과감하게 공격을 펼쳐 적을 격퇴하여 조선수군에게 자신감을 회복시켜 준 것 만으로도 큰 역사적 의의가 있다. 현장에 가면 그날의 역사가 더욱 생생하게 보인다.  [글=이순신전략연구소장 이봉수]


이봉수 기자
작성 2021.01.08 15:23 수정 2021.01.09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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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