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깟 신문은 봐서 뭐하냐?”
내가 태어난 고향 마을에서 여태껏 살고 있는 외삼촌이 어느 해 추석 성묘 차 들른 내게 시니컬한 어조로 한 말이다. 실제로 외삼촌은 어느 신문도 구독하고 있지 않지만, 나는 다르다. 지금은 모두 9개로 줄였지만, 중앙지(스포츠신문 포함) 8개, 지방지 5개 등 13개의 신문을 집에서 정기 구독해 보았다. 경제지는 제외하고 스포츠지 포함 총 17개의 신문을 정기 구독한 적도 있다.
그쯤 되면 신문들의 굵은 글씨 제목만을 대략 훑어보는데도 1시간쯤 걸린다. 따라서 저녁식사 후 그 신문들을 일별하면서 필요하다 싶은 내용은 따로 챙겨둔다. 뉴스를 볼 시간이 다가와서다. TV 뉴스가 끝나면 비로소 본격적으로 정독에 들어가는 것이 수십 년째 해온 나의 신문보기 수칙이다. 지금이야 퇴직자 신분이라 시간 죽이기로 안성맞춤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내가 남들이 다 놀라거나 의아해 할 정도로 그렇게 많은 신문을 가정에서 정기 구독해 보는 것은, 물론 그만한 까닭이 있어서다. 정치나 사회면도 그렇지만 특히 문화나 교육 분야 기사들이 칼럼 등 글을 쓸 때 많은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아무리 인터넷 세상이라지만 내게 그것은 딴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이 신문 스크랩 활용만큼 편하지 않아서다. 수십 년을 연도별 분야별 등으로 해온 신문 스크랩 뭉치가 좁은 서재 공간을 차지해 더 비좁게 느껴질 정도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고등학교 교사였던 나는 수업에 학교신문 제작 지도를 해왔다. 14년 넘게 여러 학교에서 1년에 네 번(계간) 올 컬러의 타블로이드판 학교신문을 발행(물론 발행인은 교장이다.)했다. 글쓰기 지도가 포함되긴 했지만, 학교신문 제작 지도를 눈썹 휘날리게 해온 공적을 인정받아 재임 중 제법 유명한 교육상까지 수상한 바 있다.
새삼스런 얘기지만, 신문기사는 사건⋅사고 현장의 직접 취재로 이루어진다. 학교신문도 크게 예외가 아니다. 학생기자들이 취재한 내용은 즉시 기사로 작성하게 한다. 기사문이라 하면 흔히 보도에 관계되는 글만을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다. 다른 글에 비해 간결하고 정확한 표현이 되도록 지도한 이유이다. 또한 학생 독자들의 쉽고 빠른 이해를 위해 평범한 단어의 문장으로 쓰도록 지도했다.
기사문이 간결해야 하는 것은 장황한 설명이나 현란한 수식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지면이 제한되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신문기사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리는 것이 목적인 글이어서다. 또한 기사문은 객관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글이므로 학생기자 개인의 감정이나 느낌, 주장이나 의견이 들어가지 않게 쓰도록 지도했다.
잠깐 학생기자들을 지도하여 발행하는 학교신문 이야기를 했다. 이를테면 학교신문에 기업동향 등 취업과 대입 관련 기사를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전하기 위해 나의 많은 신문 보기는 필수 코스가 된 셈이다. 다시 말해 학교신문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진짜’ 신문을 많이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신문에 대한 실망감이 만만치 않다. 아마 오랜 세월 많은 신문을 정기 구독해온 독자로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불만이 아닐까 싶다. 우선 스포츠신문과 내가 사는 지역의 지방신문들이 토요일자를 발행하지 않고 있어 불만이다. 최근 중앙지인 서울신문조차 토요일자를 발행하지 않기로 했는데, 같은 언론인데도 연중무휴인 방송과 너무 다른 신문이지 싶다.
토요일자 휴간은 신선한 뉴스는커녕 그나마 있는 독자들의 외면을 사기에 충분하다. 방송은 제외하더라도 토요일 중앙지로 이미 알게 된 소식을 굳이 월요일자 지방신문에서 또 읽으려 할 독자는 없기 때문이다. 가령 금요일인 7월 26일 오후 2시경 전주상산고등학교의 자사고 취소 결정에 대한 교육부의 부동의 결정이 발표되었다. 전라북도 교육청 결정을 교육부가 뒤집은 것인데, 초미의 관심사인 그런 지역 소식을 다음날 지방신문에서 볼 수 없는게 말이 되나.
월요일인 7월 29일자 신문에서야 보도하니 이미 3일이나 지나 다 아는 그런 소식을 전하는 지방지를 누가 보려 하겠는가! 토요일자 휴간은, 이를테면 스스로 지방신문 볼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자승자박의 행태인 셈이다. 특히 정치ㆍ사회면 기사의 생명인 속보성을 포기하면서 “지역신문을 키우는 것이 지역사랑의 실천입니다” 같은 캠페인 등을 통해 지역신문 사랑 운운하는 것은 참으로 낯 두꺼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뿐이 아니다. 가령 어떤 지방지는 관공서와 학교처럼 국경일이나 공휴일은 물론 모든 신문사가 신문을 다 발행하는 그 앞뒤 날까지도 쉰다. 심지어 어느 지방신문은 임직원들이 해외연수를 떠난다며 한 주일을 통째로 쉬기도 한다. 그러고도 신문이라 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금요일 일어난 사건⋅사고를 다음 주 월요일에나 전하는 신문도 과연 신문인지 묻고 싶다.
그와 관련 생각해볼 것이 있다. 바로 지방신문 난립이다. 전라북도 수도 전주는 유난히 일간지가 많이 나오는 도시다. 인구가 고작 65만 남짓인 중소도시에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나 제2의 도시 부산보다 더 많은 종합일간지(경제지나 스포츠지를 뺀)가 발행되고 있다. 아마 인구 수 대비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일간지 발행이 아닐까 한다.
다다익선이란 말이 있지만, 중소도시의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일간지 발행을 두고 그렇게 받아들이긴 어렵다. 전북도내 14개 시ㆍ군의 재정자립도나 경제 규모를 감안해보면 도무지 이해 안 되는 지방일간지 난립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조차 오불관언인, 완전 신기하면서도 의아스러운 지방일간지 난립이기도 하다.
그런 신문들이 비판적 기능의 정론직필을 제대로 수행할 리 없다. 실제로 어느 지방신문은 비판적 칼럼은 거의 싣지 않고 있다. 직접 취재 없이 보도자료에만 의존해 기사화하는 일도 많다. 놀랍게도 일반 기사는 물론 사설이나 사내 칼럼들을 보면 문맥이 부자연스러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의미 파악이 안 되는 지방신문조차 있어 더 이상 읽기를 포기해버리니 할 말을 잃는다.
또 다른 폐해도 드러나고 있다. 잊을만하면 광고 수주나 기사를 빌미로 한 금품갈취 따위 각종 비리에 연루된 지방일간지 대표, 기자들의 구속ㆍ기소 소식이 그것이다. 범죄 연루자들을 두둔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물론 그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가령 기자들에 대한 열악한 처우가 그것이다. 각종 취재비는 고사하고 월급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다면 아무리 투철한 기자정신을 강조해도 검은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 할까. 기자들의 잦은 ‘의원면직’도 그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뻔한 광고시장이니 그야말로 흙을 파서 신문 내는 ‘깨진 독에 물 붓기’식 지방신문 발행을 계속 지켜봐야 하는가? 정말이지 이름조차 기억하기 힘든 지방신문 난립 이대론 안 된다. 경제적 시장원리와는 전혀 상관없이 진행되는 이 기현상 타파에 모두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그와 함께 사주나 경영진은 적자 재정의 신문사를 더 운영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정부도 기자 월급 미지급 따위 부당노동행위가 있는지, 언론탄압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의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신문사의 은연중 갑질은 또 다른 문제다. 가령 괴이한 문화면이 그렇다. 예컨대 모든 신문 지면의 기본적 구성이라 할 책 소개 기사가 없는 여러 개 지방신문들을 어찌 봐야할지 난감하다. 어느 지방신문의 경우 100% 책 소개가 없는 것도 아니다. 무슨 그런 신문이 있냐며 탄식하는데, 어느 날 보니 대문짝만한 어느 저자의 신간 소개가 되어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편파적인 기사가 신문사, 좁게는 기자의 은연중 갑질임을 스스로는 모르는 모양이다.
하긴 그 정도는 책 소개 면이 고정되어 있는 신문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중앙일간지와 달리 지방지 책 소개는 대부분 신문에서 1명이 전담을 하고 있다. 독점에 따른 폐해라 할까, 일부 신문에선 신간이나 동인지를 보내줘도 아예 싣지를 않는다. 담당 기자와 알거나 그의 마음에 들면 기사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책 소개를 하는지, 그야말로 엿장수 마음대로라면 제대로 된 신문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더 어이가 없는 건 좀 아는 기자의 경우다. 신문사의 은연중 갑질이 더 심하게 느껴져서다. 아는 처지라고 매번 신간 소개 기사 등을 써줘 늘 고맙게 생각하는 신문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기자들도 있다. 똥구멍 가려운 속 모른다고 아는 기자들이 예년처럼 책소개를 왜 해주지 않는지 알 수가 없다.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어 확인할 길은 없지만, 혹 촌지 따위를 주지 않아 그러는 것인가?
현장 취재 후 기사를 쓰는 것이 원칙이지만, 특히 문화면의 경우 대부분의 지방신문이 그렇지 못한 실정이다. 가령 시상식 등에서 기자를 본 바 없는데, 다음날 기사로 잘만 실리고 있어서다. 조금 늦게라도 발행일이나 보내온 순서 등 일정한 기준에 따라 책소개 기사로 모두 소화해내는 지방신문이 되어야 한다. 편파적 기사로 인한 신문사의 은연중 갑질을 더 이상 안보길 기대한다.
그런데 정작 짜증나는 것은 보던 신문끊기다. 오랜 기간 하도 많은 신문을 구독하다보니 별의별 일을 다 겪는 셈이라고나 할까! 벌써 오래 전, 직장에서 보는 신문이라 끊으려고 지국에 전활 걸었더니 아무도 받질 않았다. 다시 전화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생각다 못해 문 앞에 ‘구독사절’이라 점잖게 쓴 큼지막한 메모지를 붙여 놓았다. 이후 구독료는 내지 않겠다는 내용도 밝혀놓았음은 물론이다. 그런데도 강제투입은 계속되었다. 나는 아내에게 신문대금을 내지 말라고 일러두었다. 그리고 몇 달이 흘렀다. 마침내 신문지국과 통화도 이루어졌다.
“아니, 언제 신문 끊으라고 했습니까?”
전화기에서 여자가 날선 목소리로 반문했다. 어쨌든 난 신문대금을 줄 수 없으니 그리 알라고 말했다. 여자는 대뜸 “그렇게 큰 아파트에 사시는 분이 우리 같은 서민을 울려도 되는 거냐”며 고래고래 악을 써댔다. 허,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더니……. 그뿐이 아니다. 어느 지방지의 지국장이라는 사람은 여러 차례 배달이 안 되어 전화한 나에게 “신문 한 부 보면서 되게 깽깽거리네” 따위 말을 내뱉기도 했다. 글쎄, 중앙지들의 구독자 늘리기 경품제공 등 과다경쟁은 딴나라 이야기일 뿐이라 할까. 요컨대 함량미달 지국 종사자들이라는 ‘불편’을 겪게 된 것이다.
왜 돈 내고 신문을 보면서 그런 불쾌감과 불편을 겪어야 하는지, 적어도 이 땅의 정기구독에선 필요악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지국장이던 남편이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자 부인이 꾸려간다는 말에 ‘구독사절’ 이후의 석 달 치 신문대금을 다 주긴 했지만, 찝찝한 기분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다른 물품의 장사도 아니고 사회의 목탁이요 거울이라는 신문에 대한 그런 경험은 일어나선 안될 일이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신규 독자에 주는 과다경품 역시 우선 먹기는 곶감이 좋은 것일 뿐 장기적으로 신문시장의 활성화와 발전에 걸림돌이 될게 뻔하다.
그럴망정 나의 많은 신문 보기는 계속될 것이다. 말할 나위 없이 신문시장의 활성화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하여 라는 기대감과 함께다. 신문 매체의 특성상 방송의 속보성을 따라 잡을 수는 없다. 대신 신문은 방송의 단편⋅피상적 보도를 보다 심층적이면서도 자세하게 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입만 열면 인터넷 세상이라 말들 하지만 인쇄매체인 신문이 건재한 건 그 때문이다. 혹 나만 그런 생각일까? [글=장세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