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임진왜란 전적지 답사

부산대첩의 현장을 가다

부산대첩의 경과와 역사적 의의

1592년 음력 4월 13일(이하 날짜는 음력)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래, 조선군은 육상 전투에서 연전연패하고 있었다. 그러나 5월부터 7월까지 3차에 걸쳐 경상도 해역으로 출전한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은 불패의 신화를 이뤄냈다. 5월 1차 출전에서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승리했고 6월 2차출전에서는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에서 승리했다. 7월에는 3차출전을 하여 결정적으로 한산대첩에서 승리하여 남해의 제해권을 확보하고 적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여 전쟁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4차출전을 위하여 전라좌우수영군 연합함대가 집결했던 전라좌수영 앞바다


8월로 접어들자 북진했던 왜군이 남하하여 도망갈 기미가 보인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순신 장군은 연합함대를 편성하여 적의 본거지이자 소굴인 부산포를 공략하기로 하고 제4차출전을 위해 전라좌도와 전라우도의 전선 74척과 협선 92척을 여수 전라좌수영 앞바다에 집결시켰다.

여수를 출발한 이순신 연합함대는 남해도 관음포(좌상), 사량도(우상)를 지나 당포(하)로 진출했다.


8월 24일 전라우수사 이억기, 조방장 정걸 등과 함께 여수를 출발하여 남해땅 관음포(경남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에 이르러 1박한 이순신 연합함대는 다음날 25일 사량도 인근 바다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을 만나 당포(통영시 산양읍 삼덕리)로 가서 밤을 새윘다. 이로써 전라좌우수군과 경상우수군이 사실상의 연합함대를 편성했다. 이때만 해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기 전으로 각 수사들은 대등한 지위에서 소속 함대를 지휘했지만 이순신 장군이 사실상 전체 지휘를 한 것으로 보인다.

견내량(좌상)을 통과한 이순신 연합함대는 원포(우상)에서 밤을 새우고 김해강 입구(좌하)와 양산강 입구(좌하)로 진출했다.



26일 밤 거제도 잘우치(資乙于赤, 거제시 사등면)에 이르러 견내량(거제시 사등면과 통영시 용남면 사이의 협수로)을 통과한 조선수군은, 27일에는 웅천땅 제포 뒷바다 원포(창원시 진해구 원포동)에서 밤을 새웠다. 28일 김해강과 양산강 두 강 앞바다로 진출하여, 적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창원 구곡포 출신 보자기(어부) 정말석으로부터 적도들이 몰운대 쪽으로 대거  도망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당시 김해강은 낙강(洛江, 낙동강) 하구의 삼각주인 명지도(현재는 매립으로 명지녹산공단이 되었음)를 사이에 두고 흐르는 서쪽 지류를 말하고, 양산강은 동쪽 지류를 말한다.

그날 이순신 장군은 가덕도 북변 서쪽 기슭에 본대를 숨기고 방답첨사 이순신과 광양현감 어영담을 가덕 외면에 잠복시킨 후 양산의 적을 탐망했다. 종일 살폈으나 적 소선 4척이 몰운대쪽으로 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날 밤 천성(부산시 강서구 가덕도동 천성리) 선창에서 밤을 지냈다.

29일 새벽 닭이 울 무렵에  출발하여 앙산강과 김해강 앞바다 장림포(부산시 사하구 장림동)에 도착했다. 이때 낙오된 왜적 30여명이 대선 4척과 소선 2척을 타고 양산으로부터 나오다가 이순신 함대를 보고 위세에 놀라 육지로  올라가버리자 경상우수군이 주도하여 모두 불태워 없애버렸다. 그날 밤 다시 이순신 연합함대는 가덕도 북쪽으로 와서 밤을 새웠다.

사진 위로부터) 가덕 천성, 몰운대 앞바다 쥐섬, 화준구미, 다대포를 이순신 함대가 순차적으로 지나가면서 적을 격파했다.



다음날인 9월 1일 새벽에 출동하여 샛바람이 거세게 부는 몰운대를 돌아 화준구미(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화손대 동측 내만)에서 왜군 대선 5척을 만나고, 다대포(부산시 사하구 다대동)에 이르러 대선 8척, 서평포(부산시 사하구 구평동 감천항) 앞바다에서 대선 9척, 절영도(부산시 영도구)에 이르러 대선 2척을 만나 모두 불태워 없애고 곧장 부산포로 향했다.

이순신 연합함대는 서평포(상), 절영도(좌중), 초량목(우중), 부산포(하)를 순차적으로 공략했다.



적의 소굴 부산포로 들어가는 관문인 초량목(부산시 중구 중앙동 영도다리 아래)에 이르자 적 대선 4척이 나오는 것을 가볍게 불태워 없앤 이순신 함대는 지체없이 부산진성 아래의 적선을 향해 장사진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부산포로 진입하연서 이순신 장군은 "우리의 군세로 만일 지금 공격하지 않고 물러선다면 반드시 적이 우리를 멸시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라고 하면서 독전기를 휘둘렀다. 장사진으로 돌진해 오는 조선 수군의 위세에 눌린 약 470여척의 왜군 함대는 감히 바다로 나와 싸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배 안과 성 안, 산 위, 굴 속에 있던 적들이 총통과 활을 갖고 산으로 올라가 여섯 군데에 진을 치고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철환과 화살을 빗발치듯 쏘아댔다. 편전을 쏘아대는 사람은 조선인 포로로  보였다. 적들은 모과 만한 철환을 쏘기도 하고 주발덩이 만한 수마석도 쏘아 우리 배를 많이 맞혔다.

김정호의 동여도에 나타난 부산대첩지 인근 지도



이에 맞선 조선수군은 죽음을 무릅쓰고 총통으로 장군전과 피령전, 장편전, 철환 등을 일시에 쏘면서 종일 전투를 벌여 수많은 적을 사살하고 100여척의 적선을 깨트렸다. 부산대첩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임진장초 부산파왜병장(釜山破倭兵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동안 4차례 출전하고 10여회 접전하여 모두 승첩하였으나 장수와 사졸들의 공로를 논한다면 이번 부산싸움보다 더한 싸움이 없겠습니다"라고 이순신은 선조에게 보고했다. 이날 조선 수군은 수를 알 수 없을 정도의 적을 사살했으나 아군은 6명의 전사자만 내는 압승을 거두었다. 

이날 조선수군은 적을 완전히 소탕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본거지를 대파하여 돌아갈 길을 염려하게 했고, 이 때문에 왜적들은 더 이상 연해안을 약탈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것이 부산대첩이 갖는 역사적 의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날 선봉에 서서 용감하게 싸웠던 녹도만호 정운이 이마에 철환을 맞고 전사했다. 지금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몰운대에는 정운 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순의비가 있고 부산대첩이 있었던 날인 양력 10월 5일을 '부산시민의 날'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현장 취재/ 이순신전략연구소장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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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1.02.02 16:44 수정 2021.02.02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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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