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프로젝트] 생을 담는 문장들

조은수

사진=코스미안뉴스



길을 걸을 때마다 세상은 여전히 똑같다고 느꼈다. 내리치는 햇살이며 잘게 무너지는 모래 알갱이들, 매번 해는 뜨고 달은 지는데 변하는 건 나뿐이었다. 모든 마음이 예전 같지 않았다. 동생은 아팠고 엄마는 매일 힘들었다. 나는 변할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까지 조금씩 무너지는 걸 알았다면 아마 나를 잡고 있는 모두가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세계가 변하고 있다는 걸.

 

그래서 나는 매일 조금씩 부서지는 나를 힘겹게 잡아 올리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절망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조금씩 금이 가는 나를 숨겨야만 했다. 절망은 내가 무너지길 기다리며 나의 뒤를 쫓아다녔다. 그랬기에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 모든 상황들이 내 발목을 잡을 때마다 나는 참아야만 했다. 절망이 얕은 미소를 띠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게도 봄이 올까? 켜켜이 쌓여가는 먼지 덮인 희망을 보며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멀찍이 서 있는 보통의 삶이 우두커니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기웃거렸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눈앞의 모든 사물들이 찰나의 순간마다 덩어리져 흘러가 버렸다. 나는 더 크게 웃고 더 가벼워지는 연습을 하기 위해 실없는 소리를 사람들에게 내던졌다.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새롭게 지워진다. 지워짐으로서 분명해진다. 종종 노래를 들으며 스케이트보드를 타며 생각했다. 시시하고 지루하다고. 나는 사람들의 편견과 정확히 일치했다.

 

직장을 그만둔 지 일 년이 되었다. 사직서는 지루하고 진부한 개인의 이야기를 품고 상사에게 전해졌다. 나는 구질구질한 변명 속 깔끔하게 처리되는 내 사직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새로운 직장을 갈 때마다 변명이 늘어졌다. 누군가 물었다. 그럼 아픈 부모님은 지금 괜찮으세요? 길고 긴 의미 없는 하루가 끝날 때 나는 그 끝을 붙잡고 일기를 썼다. 곪아 있던 것들이 종이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일기는 매일매일 지워졌다. 역한 냄새를 풍기는 글들은 그랬기에 내 아픔과 함께 매번 새롭게 쓰였다. 살면서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나는 열여섯 그 어딘가에서 마무리되었어야 했는가, 의구심이 들었다.

 

지겹게 반복되는 그 지루하고 불행한 뻔한 클리셰. 어쩌면 너무도 평범할지 모르는 이야기들 속에서 나는 펜을 잡았다. 글을 쓰며 나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어쩌면 제일 마주하기 힘들었기에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알기 힘든 사람일지도 몰랐다.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랐다. 나는 내가 쓰는 글들의 의미를 몰랐다. 동생은 매일 내게 죽고 싶다고 말했다. 지독한 우울증이 나를 잡아먹기 위해 동생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 같았다.

 

나는 그저 평범하고 싶었을 뿐인데, 수많은 생각들이 나를 스쳐 갔다. 어쩌면 그때 절망은 알았을지도 모른다. 곧 내가 그에게 빠지리라는 것을. 나는 내 바짓가랑이가 온통 젖어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는 길어지는 수술을 기다리며 모든 것들이 하나라도 잘 마무리되길 바랐다. 갑자기 닥쳐온 모든 불행과 불안이 하나씩 그 끝의 매듭을 짓길. 허공을 응시하며 초조해하는 내게 누군가 물었다. 보호자세요? 나는 메마른 목소리로 라는 짧은 말과 함께 다시 웅크리고 있는 절망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사람은 다시금 내게 말을 붙였다. 잘 될 거예요. 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 희망을 가지고.

 

그 순간 화면의 수술 중이라는 붉은 글자는 푸른빛을 띠며 회복 중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 말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회복실로 달려가야만 했다. 길고 긴 수술이었다. 한 시간이 지체되었고 의사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만약 잘못되었으면 어쩌지? 그 만약이라는 말과 함께 절망은 빠른 속도로 내 몸을 뒤덮고 있었다. 회복실로 향하는 억겁의 시간을 지나 수술을 끝낸 할머니의 얼굴을 보았을 때 비로소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희망은 내 옆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희망 또한 마주 볼 힘이 없었다. 곤히 잠든 할머니를 바라보며 생각을 곱씹었다. 어쩌면 그 사람은 사람의 모습을 한 신이 아니었을까 하고. 집에 돌아와 나는 비어있는 내 일기장을 보았다. 나의 고통스러운 나날들은 매번 남김없이 글로서 남았다 사라졌다. 하지만 그 아린 고통과 감정들은 여전히 손끝에 남아 있었다. 나는 나의 절망을 마주 보기로 결심했다.

 

이제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다. 만약 절망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나는 겸허히 나를 내주고 무너지고 싶었다. 나는 사람이었다. 감정을 이겨내는 것도, 사회에 적응하는 것도 스물 중반의 내게는 너무 벅찼다. 그 모든 것들이 절망이라는 파도에 밀려왔을 때 나는 어쩌면 알았는지도 모른다. 내가 곧 절망을 마주 보아야 한다는 것도. 나는 매일 새롭게 일기를 썼다.

 

그리고 그 악취가 풍기는 글들을 지우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그때의 고통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도록 나는 내가 유일하게 나와 소통할 수 있는 감정에 충실하여 문장들을 완성해나갔다. 사소한 음식 이름이나 만난 친구들 이름, 옷가지까지 지난 일기들은 나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나와 손을 잡게 되는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이었다.

 

나는 작은 것에도 쉽게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딸기를 좋아했고 눈부신 햇살을 좋아했고 핫도그를 자주 먹었다. 일기에 쓰인 나날들은 고통스러운 날들보다 평범한 날들이 더 많았다. 나는 밀린 일기들을 매일같이 읽었다. 아픈 동생이나 엄마가 아닌 내가 나를 보살필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가끔 사소한 걸로 좋아하는 나를 보며 내 스스로도 놀라곤 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겨울이, 고통이 조금씩 그 딱딱함을 녹여내고 있었다. 글을 쓸 줄 몰랐다. 직장을 다니며 세상을 배우고 남들이 말하는 그 정도의 삶만을 살기 위해 노력해왔다. 머리로 쓰는 글에 대해 이해는 했지만 나를 위한, 나를 나타내는 글들에 대해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나를 위해 글을 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 오롯이 나를 위한 글.

 

금이 가던 아픔은 이제 조금씩 그 자리를 나로서 채우고 있다. 새살이 돋아남과 동시에 나는 나로서 내가 단단해짐을 느낀다. 나는 살아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모든 관점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이어질 수 없는 나의 실존을 계속 살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여전히 운명은 내 손안에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실감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실존하며 그들의 생을 채워간다. 만약 내가 나를 조금 더 잘 돌볼 수 있다면, 그리고 이러한 것들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다면 나는 끊임없이 글을 쓸 것이다. 글은 새로운 형태의 모습으로 내게 나타날 것이고 만들어질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개인이 개인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 아픔의 무게를 헤아릴 수 있도록 나 또한 많은 이들과 생각을 나누고 함께 글을 쓰고 표현하고 싶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 금이 가 있다. 다만 그 아픔을 채워나가는 방법에 대해서 서툴 뿐.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 알며 스스로가 스스로를 챙겨줄 필요가 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미래에 마주할 우리처럼. [글=조은수]

이정민 기자
작성 2021.02.05 11:41 수정 2021.02.05 11:48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이정민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1/1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Shorts 동영상 더보기
2025년 4월 24일
2025년 4월 23일
2025년 4월 22일
나는 지금 '행복하다'
2025년 4월 21일
2025년 4월 20일
2025년 4월 19일
2025년 4월 18일
2025년 4월 17일
2025년 4월 17일
2025년 4월 16일
2025년 4월 15일
2025년 4월 14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2일
2025년 4월 12일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