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프로젝트] 꿈은 그렇게, 온다.

조은수

사진=코스미안뉴스


처음 도착한 뉴욕의 느낌은 정말 크다였다. 모든 건물들은 높게 솟아 있었으며 건물의 문들 또한 내겐 한없이 크게 느껴졌다. 이 높은 건물들 사이에 내가 다닐 회사가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가 다닌 회사는 미디어아트를 지원하며 전시를 돕는 비영리 단체였는데, 다양한 아티스트를 지원하며 그들과 함께 작업할 수 있었다. 또한 전시 공간 또한 마련되어 있어 트렌디한 작가의 최근작 또한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출근 첫날은 보스가 정말 아무 일도 시키지 않았다. 기껏해야 전선을 정리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다음 날도 나는 도시락을 들고 회사에 출근하여 도시락을 먹는 것이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그러던 중 회사에 기술적인 문제가 생겼다. 한 아티스트의 작품이 모니터에 제대로 출력되지 않았던 것이다. 노이즈가 생겼고 계속 화면이 끊겨 출력되었다. 다들 영상에 대한 이해가 없었으므로 스튜디오에서는 아예 작품이 출력되는 모니터를 꺼놓기까지 해 놨다.

 

스튜디오 오픈 시간이 다가왔고 괜스레 마음이 초조해진 나는, 보스에게 모니터를 꺼놓을 바에 내가 작품 출력 포맷을 바꿔서 출력해도 되는지 물어보았다. 스튜디오 오픈 시간이 얼마 없었기 때문에 보스는 흔쾌히 시도해 보라고 하였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영상 작품은 화질이 저하되지 않은 채 재출력되었고, 출력 포트 또한 다른 것으로 바꾸어 영상이 끊이지 않았다.

 

서툰 영어가 부끄러워 말을 아끼던 나는, 이 일을 끝낸 이후로 크고 작은 영상 작업을 맡을 수 있게 되었고 서툴지만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자신감까지 얻었다. 전시 일정에 맞추어 영상을 제작하고 다양한 포맷으로 영상을 출력하며 회사를 방문하는 작가들과도 작품에 대해 논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직접 작가들과 대화를 하며 그들의 다양한 노하우 또한 배울 수 있었다. 영상에 딜레이를 주는 법, 영상의 화질을 더욱더 고화질로 출력하는 법 등 작가들은 내게 자신들의 표현 방법에 대해 주저하지 않고 알려주었다.

 

때마침 2월 말, 회사 스튜디오가 하루 비게 되었고 나는 인턴들을 모아 작품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보았다. 세계 각국에서 온 인턴들은 자국에서, 혹은 미국에서 유학을 하며 예술을 전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들 흔쾌히 작품을 하고 싶다며 내 의견에 동의해주었다. 나는 이들의 의견을 모아 보스에게 인턴쇼를 하고 싶다고 전했고 보스 또한 좋은 생각이라며 우리의 의견을 지지해 주었다.

 

전시와 창작까지는 길지 않은 시간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나와 다른 인턴들은 업무를 하면서 틈틈이 작품 창작을 해야만 했다. 부족한 장비들로 작업을 해야 했기에 작업 시간이 길어졌음에도 나는 내 작품을 할 수 있어 행복했다. 스튜디오의 크기도 한정되어 있었지만 크기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다른 인턴들의 대략적인 작품 크기까지 재어가며 작품 구상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작품을 보길 바라는 마음에 페이스북 홍보와 이벤트 날짜도 설정해 놓았다. 작업을 하지 않았던 인턴들은 스튜디오 밖에 작은 파티를 하기 위해 술과 음식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전시 당일,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인턴쇼에 방문하였다. 근처에 있는 파슨스와 NYU학생들이 특히 많이 참가하였는데 내가 올린 페이스북 게시물을 보고 참가한 것이라고 하였다. 다른 인턴들 또한 꽤나 많은 사람들이 스튜디오에 방문하여 놀란 듯하였다. 전시된 작품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었지만 작품 하나하나엔 인턴들의 애정이 담겨 있었다. 베트남에서 온 ʼ의 경우 프로그래밍으로 센서가 설치된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면 소리가 나는 작품을 만들었다. ‘캐일리ʼ는 자신이 아끼던 담요를 덮어 모니터에 자신의 얼굴이 출력되는 작품을 제작하였고 존 슨ʼ은 직접 퍼포먼스를 하며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다.

 

나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흰 도화지를 상자에 입혀 그 위에 프로젝터로 영상을 입혔다. 4개의 상자를 준비했는데, 각기 상자마다 하나는 내가 살던 서울의 모습, 다른 하나는 바다, 또 다른 하나는 달,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내가 머물었던 라오스의 작은 숲을 영상으로 출력하였다. 상자에 영상을 입힌 것이기 때문에 어두운 공간 내에서 네 개의 상자만이 빛났고 잔잔한 바다소리가 작품의 기본음으로 깔렸다. 누군가 소리를 내거나 움직이면 네 개의 상자는 소리에 반응하여 오로라로 변하였다.

 

운이 좋게도 관람객이 가장 많은 작품은 내 작품이었다. 사람들은 다들 가만히 서 작품을 감상하였고 작품 옆에 서 있는 내게 이 작품이 좋지 않냐며 말을 걸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내 작품은 아이가 자라는데 필요한 네 가지란 이름으로, 각각의 영상들은 아이가 자라는 데 있어 무슨 영향을 주었는지, 어떠한 위로가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길을 잃고 들어간 서울의 작은 골목, 도망치듯 떠난 바다, 만날 수 없는 이들을 그리워하며 보던 달, 숨을 수밖에 없었던 숲, 그리고 모든 게 신기루가 되어버린 지금. 이러한 주제들은 작품을 하고 싶다는 절실함 끝에 조금 더 작품에 잘 녹아들어 표현되었다.

 

이날 방문했던 사람들 중에는 나와 함께 작업하고 싶다는 작가가 있었다. 일본에서 온, 얼마 전 전시를 끝낸 작가였다. 화려하진 않지만 아름다웠고, 감동적이었다며 첫마디를 건넨 그의 표현에선 알 수 없는 편안함이 묻어있었다. 자신 또한 내 작품을 보며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고맙다며 내게 명함을 내밀었다. 그렇게 길지 않은 말이었다. 짧은 문장이었고 찰나의 순간이었다. 이제 나는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실함과 나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길면서도 짧았던 인턴이 끝나갈 때쯤 내 자리를 정리하며 보스와 회사에 있던 인턴들에게 편지를 썼다. 서툴지만 그들과 함께했던 순간순간들에 대해서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꼼꼼하게 묘사를 했다. 모두들 헤어짐이 아쉬웠기에 떠나기 전 크진 않지만 파티를 열어, 인사를 나누었다. 인턴을 하는 내내 만났던 사람들과 작품들, 인턴들의 전시가 머릿속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손을 모아 입김을 불며 다녔던 뉴욕 거리며, 많은 사람들, 건물들, 룸메이트들까지, 그리워지겠지만 떠날 수밖에 없었다.

 

지난 삼 개월간 종종거리며 걸었던 마지막 퇴근길을 눈에 담으며 다짐했다. 10년 이내에 이곳으로 돌아와 꼭 개인전시를 열 것이라고.[글=조은수]

이정민 기자
작성 2021.02.11 10:22 수정 2021.02.11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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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