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열풍의 블랙홀이 생겨났다. 머리를 뜨겁게 하는 재미와 가슴을 데워주는 흥미 위주의 기획과 연출 파장(波長)이다. 인류학적인 의미와 장르 승화 측면의 징검다리는 어디에서 찾을꼬. 국악·팝·개그·뮤지컬 등 정통 길을 지향하던 가수들이 트로트 경연 대열로 운전대를 돌린다. 정통성·예술성과 대중성·상업성의 충돌이 아니라, 상업성으로의 치우침이다. 특히 나이 어린 국악 전문가(전국대회 입상자)들의 꺾기·굴리기·목청 떨기 절창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마음이 무거움을 어쩌랴. 트로트 무대 위에 올려지는 노래 100중 98은 리메이크 복고의 노래다. 진화부재(進化不在)의 놀이마당 흥(興)은 넘치고 발(發)은 주춤거림의 반복이라면 훗날이 염려된다.
특히 경연곡 대부분은 대중가요 탄생 시점의 역사 인류학적 음유가 결여된 상태로 연출되고, 통상적인 심사평 어휘가 반복되어 아쉽다. ‘야~ 잘한다·시작에서 끝났다·원곡 가수 나도 놀랐다·재주가 많네.’ 등등. 불려지는 노래도 특정 가수(심사위원)들의 곡목이 주를 이룬다. 정치판이라면 중우중치(衆愚政治)와 우민화(愚民化)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런 시점에 어느 방송사·기획팀이 역사의 물결을 얽은 대중가요 유행가 트로트를 기획적으로 얽어낸다면 얼마나 기특한 발상이라고 칭송을 받을까.
이런 맥락(脈絡)에 걸치는 노래가 바로 1972년 이미자가 열창했던 <민비閔妃>다. 이 노래는 1973년 4월~1973년 12월까지 MBC TV에서 방영한 일일드라마의 주제곡이다. 조선 나라의 황후(皇后)가 왜놈들의 칼끝에 찢기어 비명을 지르며 이승을 마감한 사건 이후 78년 만에 되살아났던 현실 역사를 음유한 노래다. 사람(부류)마다 민비·명성황후에 대한 시각과 생각을 달리한다. 한 개인의 권력욕과 독선적 행태에 대한 견해는 달리하더라도, 한 나라의 임금 비(妃)에 대한 적국(敵國)의 죄행(罪行)에 대한 분심(憤心)은 다를 리가 있으랴. 지구레코드사 음반 JLS-120641에 이미자의 목청으로 실었다. <민비>는 명성황후 피 살해사건을 올올이 얽은 유행가다.
님 떠나신 옛 터전에 달님이 뜨면/ 두견새 울어 울어 밤을 지새네/ 스란치마 열두 폭을 피로 물들인/ 그 원한을 못 잊어서 홀로 우는가/ 아~ 왕비마마 왕비마마 가슴 아프오// 허물어진 대궐터에 눈을 감으면/ 지금도 슬픈 사연 들리어오네/ 경복궁에 넓은 마당 힙쓸리던 날/ 참지 못해 풍경처럼 홀로 울었나/ 아~ 중전마마 중전마마 가슴 아프오.(가사 전문)
노랫말의 단어와 어휘·소절에 그날의 사연을 매달면서 들으시라.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에서 있었던, 동서고금 인류의 기록역사 7천 년에 없었던 만행이다. 스란치마 열두 폭을 피로 물들이고, 숨이 끊어진 주검을 모아서 장작불에 태웠다. 이로부터 반년 정도 뒤 1896년 2월 시해된 왕비의 부군(夫君) 고종 임금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한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왜놈들의 공갈공포(恐喝恐怖)가 얼마나 험상궂었으면 한 날의 왕이 피신을 했을까.
을미사변(乙未事變) 당시, 현장 지휘는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였다. 명성황후 암살사건·명성황후시해사건·을미지변·을미팔월지변이라고도 불렀으며, 그들의 작전암호명은 ‘여우사냥’이었다.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수립한 낭인들은 기습적으로 경복궁에 진입하여 궁녀 복장을 입고 있던 황후를 찾아내 시해한 뒤, 시신에 석유를 뿌려 소각한 뒤 연못(옥호루)에 던졌다. 황후 시해 계획을 세운 이노우에가 일본으로 돌아 간 때는 사건 20일 전, 1895년 9월 1일 육군 중장 출신 미우라 고로가 새 공사로 부임한다. 미우라는 조선에 온 뒤 두문불출하고 불경을 외우면서 지냈는데, 붙여진 별명이 염불공사였고, 수도승 같다는 평을 듣는 위장 술책을 폈다. 사건에 가담한 조선의 일본 극우 낭인단체는 천우협(天佑俠)과 현양사(玄洋社)였다. 낭인들은 정치깡패가 아니라 의식화된 지식인 테러리스트로 봐야 한다.
사건 전날 밤 한성신보 직원들과 낭인들은 칼·총을 들고 용산으로 모인다. 그날 밤 공덕리(마포)에 있던 대원군 별장에도 공사관 직원·고문관·순사 등이 모였고, 술에 취한 이들은 복장도 제멋대로였다. 그들이 공덕리에 도착한 때는 자정쯤이었으나, 흥선대원군이 교여(轎輿)를 타고 떠난 때는 새벽 3시 경이었다. 그때 대원군은 76세였다. <한국통사>(박은식 저, 1864년 고종즉위~1911년 105인 사건까지 47년간의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사서)에는 대원군이 일본인들에게 ‘오늘의 일은 단지 왕실을 호위하는 것뿐, 궁중에서 폭거를 행하지 말라.’라고 했다고 한다. 대원군의 도착과 동시에 경복궁 담장을 넘은 폭도들은 왕비가 경복궁에 없음을 알고 건청궁으로 향한다. 흉도들은 전당을 수색하였고, 대원군은 강녕전 옆에서 기다렸다. 낭도들은 곤녕합 옥호루에서 궁녀복을 입고 있던 황후를 찾아내어 살해한다.
1896년 2월 당시 21세였던 청년 김구(金九, 1876~1949)는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겠다면서 황해도 치하포에서 일본군 장교 쓰치다 조스케 살해했다. 살인 이유는 국모(國母)인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었다. 김구는 식당 주인이자 동장인 이화보를 시켜 자신의 거행을 알리고, 집으로 돌아가 체포되기를 기다렸다. 자택에서 체포된 김구는 해주 감옥에 수감 되었다가 인천 감옥으로 압송되어 사형선고를 받는다.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중, 고종 임금의 지시로 사형집행이 중지되었다. 1896년 덕수궁에 자석식 전화기가 설치되었는데, 이 전화는 인천까지 개통되었었다. 고종은 인천 감옥에 직접 전화를 걸어서 사형집행을 중지시켰다. 이는 전화가 개통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트로트 열풍 시대, 흘러온 유행가 트로트에 역사의 옷을 입혀보자. 잊혀져 간 역사가 반추된다. 흘러온 유행가는 그 노래 탄생 시점의 현재다. 보물이고 강물 결 위를 흘러가는 영원을 향한 썩지 않는 돛단배다. 우리 고유의 유행가는 우리 민족의 자긍심·애국심의 문화예술 불쏘시개다.
[유차영]
시인, 수필가
문화예술교육사
트로트스토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