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프로젝트] 농담하는 당신은 개별적인 사람이다

최형만

사진=코스미안뉴스


글을 쓸 때 핵심을 파고드는 어떤 논리의 근원을 붙잡으려고 애를 쓸 때가 있다. 이를 원운동의 관성력에 비유해보면 이는 마치 구심을 향해 안으로만 다가서는 내적인 방식이랄 수 있다. 이럴 경우 우리가 흔히 간과하는 것이 글쓰기의 정석이 아닌, 비틀기를 통한 실험성과 도전이다. 반면 원심을 향해 지나치게 나아가다 보면 이번엔 내적인 뼈대로서의 구심점을 잃기 십상이다.


설령 이 두 가지를 전부 충족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또 있다. 중심과 외부를 적절히 조율하였어도 그것이 가지는 울림이 없다면 이 또한 좋은 글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필자의 경우도 구심과 원심을 적절히 조율해보려고 하나 여전히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고 마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럴 때 중심을 잡는 방식으로 유용한 것이 있다면 필자에게는 공감과 소통적인 측면으로서의 농담 같은 언어가 아닐까 싶다. 이는 직접적인 인간관계나 글이라는 매개를 통한 소통이나 둘 다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점에서다. 언어로 촘촘하게 이어진 관계를 느슨하게 허무는 농담이야말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에게 마음의 여유를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불안이 많은 사람일수록 지나치게 치열하게 산다고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과거부터 이어온 불안에 새롭게 등장하는 불안 천지라서 무엇을 하지 않으면 초조해지는 건 아닌지 한 번쯤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그래서 더 필요해 보인다. 무수한 삶의 방식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정답이라고 말하는 것만을 기를 쓰며 좇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개성을 중히 여긴다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개성 또한 누구나 원하는 것일 경우가 더 많은 듯하다. 가령 어떤 주제에 관해 글을 한 편 쓴다고 하더라도 저마다 다른 글이 나와야 정상이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각종 블로그나 커뮤니티만 봐도 하나의 주제를 논하면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는 걸 자주 본다. 이 말은 글을 소비하는 패턴조차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유행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개성 있는 글은 개별적이지 결코 종합적이 아니라는 말을 떠올려보면 이런 현상은 실로 난감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대개가 좋은 말 투성이거나 그도 아니면 모두가 문제라고 지적하는 걸 반복해서 지적할 뿐이다.


한 해를 마감할 즈음의 소감이나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의 각오 또한 종합적 방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종합적이라는 걸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최종 목적지에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종합적인 성공이나 출세가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새해에는 좀 더 많은 사람을 돕겠다거나 좀 더 자연을 사랑해보겠다거나 혹은 좀 더 멋대로 살아보겠다는 각오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새삼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대상이나 어떤 상태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본질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모임에서 웃고 떠들면서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더라도 지나고 나면 왠지 허탈한 기분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이 역시도 개별적이지 못하고 종합적이어서 그렇다.


예로부터 몸에 좋은 것은 쓰다고 했다. 쓴소리를 잘 받아들이는 사람일수록 개별적인 인간이 될 확률이 그만큼 높은데 이는 다른 사람이 원하는 사람이 되라는 게 아니다. 타인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공감능력과 함께 자기만의 굳건한 정신을 느슨하게 만드는 여유를 가지라는 말이다. 서두에서 공감과 소통적 측면으로서의 농담을 언급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필자나 여러분이나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죽음이다. 제아무리 출세하고 부귀영화를 누릴지라도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게 우리네 삶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능행 스님의 글을 좋아하는데 오랫동안 호스피스 활동을 해 오신 스님의 말에 따르면 수천 명의 죽음을 마주했지만, 죽음에 초연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는 종교인도 예외는 아니어서 평소에 들판을 베개 삼아, 구름을 이불 삼아 한세상 살겠노라고 수행한 스님들조차도 마지막 순간엔 삶의 애착을 보였다고 한다.


필자도 한때는 유서를 작성해서 몸에 지니고 다닌 적이 있다. 갑작스럽게 사고를 당할 경우를 대비한 것인데 훗날 유서를 다시 들여다보니 대개가 돈과 관련된 것이어서 씁쓸해했던 적이 있다. 대충 적어보자면 소지한 카드의 용도와 결제계좌, 비밀번호, 각종 공과금이 결제되는 계좌, 그리고 어머니와 관련해서 정기적으로 지출되는 항목과 보험 등이었다.


이렇듯 죽는 순간까지도 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대개의 사람들처럼 참으로 종합적으로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돈을 멀리해야 개별적이라는 뜻이 아니니 이점 오해 없었으면 한다. 다만, 어떤 대상과 관계를 맺는 데 있어 자신을 모두 던져버리고 매몰되지는 말자는 것이다. 이는 자식을 향한 마음에서도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이다. 그랬을 때 비로소 자식도 자신만의 개별성을 획득할 수 있을 테니까.


머지않아 새해가 다시 돌아올 것이다. 시간이라는 개념에서 헌 해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지만 무엇을 결심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시기다. 새해에는 필자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좀 더 많은 농담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여유롭고 넉넉한 사고 안에서 자신만의 통점으로 글을 쓰거나 행동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개별적이고 개성 넘치는 글쓰기이며 삶일 것이다. [글=최형만]

 

 



이정민 기자
작성 2021.02.15 11:37 수정 2021.02.15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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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