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는 최소한의 형식이며 완결된 문장을 쓴다는 것은 드러냄의 방향을 명확히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책을 읽다가 저자의 생몰연대를 살피면서 저자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참작하며 읽는 편인데 글 쓰는 행위 그 자체로는 시대적 배경과 그리 큰 역학관계가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물론 철학과 역사의 이름을 전면에 내걸고 인쇄된 문장들이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하루에도 수백 권의 책이 쏟아져 나오는 현실에서 별 비판 없이 그들의 고매한 철학적 원류나 장구한 역사 인식에 기댄 독서법이 실제로 어떤 역할을 해나갈지, 혹은 독자에게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지 그 효용에 있어 막연히 엄지 척을 들 수는 없을 듯합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보수성을 지녔다고 믿는 편인데(정치 논리가 아닌 현실 논리로서) 그런 점에서 우리가 그 많은 책을 읽으면서 깨닫고 취하는 과정이 어쩌면 애초부터 정립된 개인적 보수성을 더욱 견고히 굳혀가는 과정은 아닐까, 한 번쯤은 짚어봐야겠습니다. 한 권의 책을 읽어도 백 권을 읽은 것 이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백 권을 읽어도 한 권을 읽은 것보다 못한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생각이 깊어지는 것은 아님을 뜻하는 말일 겁니다. 오히려 독선과 아집으로 더욱 똘똘 뭉쳐 어지간해선 소통하기 힘든 사람으로 치닫기도 하니까요.
실제로 주변을 돌아보면 책을 많이 읽지 않았음에도 빛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책을 많이 읽었음에도 가장 기본적인 인간적 소통조차 힘든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고전 인문학을 많이 읽어야 사유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도 어찌 보면 한낱 신기루를 좇는 것에 불과합니다. 자칫하면 지적 허영에 빠지는 가장 빠른 길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날줄과 씨줄이 있어도 바르게 엮어나갔을 때라야 좋은 옷을 만들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어떠어떠한 책을 읽어봤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이 그 책을 읽음으로써 무엇이 달라졌는가를 늘 염두에 둬야겠습니다. 자기 생각을 더욱 견고히 굳히는 성격이 아닌, 자신을 변화시키는 방편으로 책을 읽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추천하는 첫 번째 방식으로 읽은 책에 대해 리뷰를 쓰는 것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는 책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는 행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눈으로 본 것은 쉽게 잊기 마련이고 귀로 들은 것도 다른 한쪽으로 빠져나가지만, 자신이 행한 것은 그만큼 오래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휘력이 늘고 타인을 이해시키거나 생각을 표현하는 훈련을 하게 되고 그것이 곧 작문이며 좋은 글쓰기로 이어집니다. 리뷰를 쓰는 방법 또한 단순히 책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데만 그쳐서는 안 됩니다. 책의 저자가 했던 말을 반복하는 앵무새가 돼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서두에 언급했듯 이는 저자의 생각에 기댈 뿐이지 결코 자기 생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무조건 비판만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한 번의 필터를 통하여 곱씹을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곱씹는 과정이 사유이며 이 역시 부단한 훈련이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는 책을 선택하는데 있어서도 필요합니다. 간혹 TV에 유명인이 출연해서 책을 소개하거나 드라마에서 PPL 상품으로 노출되는 책은 다음날부터 날개 돋친 듯 팔린다고 합니다. 마치 그 책을 읽지 않으면 교양인이 안 될 것만 같은 느낌도 듭니다. 쉽게 베스트셀러가 되는 이유지요. 이런 현상이 마냥 부정적일 필요는 없지만, 책에 대한 자신만의 선택 기준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하는 이유기도 합니다. 저 같은 경우 좋은 책을 고르는 기준은 추천받은 책에서 시작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좋은 책을 읽다 보면 그 속에서는 반드시 저자가 언급하는 또 다른 책이 한 권쯤은 나옵니다. 그렇게 독서목록을 정하면서 읽었습니다. 그저 노벨상을 받았다는 이유로 책을 선택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것이 좋은 책이 아니라는 게 아니라 그런 이유로 선택한 책은 저자의 생각에 쉽게 설득당해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일 확률이 높아서였을 겁니다.
두 번째로 추천하는 방식은 신문의 좋은 칼럼을 찾아서 읽는 것입니다. 칼럼만큼 사유하기에 적합한 글도 없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우리는 마치 위대한 철학만 사유의 대상으로 보는 데 익숙합니다. 그래서 '실존'이라 하면 적어도 사르트르가 나와야 하고 '사실'이면 발자크나 플로베르 정도는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시대의 위대한 철학자들도 서로서로 맹비난하면서 사유를 넓혀갔을 뿐입니다. 교부 철학과 스콜라 철학이 그랬고, 경험론과 합리론이 그랬습니다.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와 같은 합리론자는 본유관념에 의해 우리는 전부 다 알 수 있다고 했지만, 흄은 '인간 본성론'이라는 책에서 우리는 어느 것에 관해서도 객관적 인식을 가질 수 없다고 했으며, 이는 근대철학에 사형선고와 같은 말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후 칸트가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라며 선험철학의 흐름을 만들기도 했지만요. 하지만 근대철학의 문을 연 칸트 역시도 쇼펜하우어에 이르면 맹비난을 받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존경하거나 혹은 두렵게 생각하는 철학의 원류를 거슬러가 보면 각자의 주장일 뿐입니다. 이는 철학뿐만 아니라 미술, 음악 등 모든 분야에서의 새로움은 앞선 사상을 뒤엎으면서 시작된다는 걸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이런 사상을 배우면서 어떤 비난도 없이 받아들이는데 너무나 익숙합니다. 자칫 지적 허영에 빠지기라도 하면 이런 걸 암기하려고까지 듭니다. 이때 우리가 소소한 사유의 즐거움을 배울 수 있는 것이 좋은 칼럼입니다. 우리가 사는 일상을 통하여 보석처럼 빛나는 깨달음을 주는 칼럼은 그 자체로 위대한 철학 못지않게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더구나 지금을 말하고 있으니 시대 배경을 살피는 수고로움도 한결 덜하겠고요. 다만, 흔히 수필로 통칭하는 것과 구별을 할 필요는 있으나 넓은 의미에서 한데 묶는다고 해도 칼럼은 생활 속의 새로운 발견이라는 측면에서도 사유하기에 아주 유용한 도구가 돼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어딜 봐도 좋은 글쓰기에 관한 글은 넘쳐납니다. 읽어보면 모두 공감 가는 말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덮고 나면 솔직히 하나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눈으로 가볍게 읽었기 때문입니다. 호기심이나 재미로만 읽었기 때문입니다. 글쓰기에 관한 본인의 훈련은 없고 그저 읽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책을 수천 권을 읽은들 사유에 따른 행위가 개입하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내용조차 가물가물하다가 결국 잊히고 맙니다. 단지 지식적으로 많이 아는 것은 나이가 들다 보면 그리 큰 자랑거리는 못됩니다. 그러나 정신적 풍요로움을 지니고 있다면 이는 나이가 들어서도 큰 위로가 됩니다.
한 권의 책을 읽더라도 백 권의 책을 읽은 것처럼 변화를 꿈꾼다면 리뷰를 써보거나 좋은 칼럼을 읽어보길 권합니다. 하나의 문장을 쓴다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다는 걸 깨우치는 게 바로 글쓰기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작가만 글을 쓰는 시대가 아니니까요. 저 역시 글을 쓰는 이유는 불안한 생각을 다듬기 위함도 있지만, 이런 행위를 통해서 위로받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사유는 덤으로 따라오겠지요. [글=최형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