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은 참 대단한 나이입니다. 아홉 살에서 열 살이 되고, 열아홉에서 스물 그리고 서른아홉에서 마흔이 되듯이 한 살 더 먹을 뿐인데, 서른은 사람들에게 참 다양한 의미를 주기 때문입니다. 스물아홉이 되니 이제는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저는 이제 조금 이해합니다. 사람들마다 저마다 사는 속도가 다르고, 학교를 다녀야 할 때, 일을 시작해야 할 때가 모두 비슷하지만 무엇을 하든 언제 시작하든 그건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서른은 예외입니다. 서른을 앞두고 아직 가슴으로는 ‘서른은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서른이 사람들에게 다양한 의미로 다가온다지만 그 의미가 스무 살과는 사뭇 다릅니다. 스물에는 열아 홉에는 없던 세상으로 넘어간다는 불안감도 존재하지만 그 불안감보다 훨씬 큰 두근거림과 열정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른은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야. 서른이 되어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거야 등등 서른에 대한 정의는 많지만 서른은 왜인지 우리가 한 번 넘어야하는 인생의 첫 산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인지 서른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힘이 듭니다. 서른에게 이름을 붙인다면 저는 ‘신데렐라의 마법이 끝나는 나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12월 31일에서 1월 1일을 숱하게 넘기며, 이제 하루 차이로 새해를 맞이한다고 해서,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고 해서 흥미진진한 모험은 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습니다. 스물아홉의 12월 31일이 지나서 서른의 1월 1일을 맞이해도 멋진 드레스를 벗고 새엄마와 새언니 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신세가 되는 것도 아닐 겁니다. 재앙이나 불행이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저는 왜 이리 서른 살을 생각하면 숨이 턱 막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서른 살을 생각하면 저는 시험을 앞둔 아이처럼 지난날 내가 해왔던 일을 돌아보고, 내가 지금 하는 것들을 펼쳐보고, 못 끝낸 숙제를 한꺼번에 해치우듯 불안하고 버겁습니다. 해야할 것도 참 많습니다. 서른에는 차도 있어야 하고, 번듯한 직장에, 꽤 높은 급여, 결혼할 짝도 챙겨가야 합니다. 누가 숙제를 줬는지, 시험은 누가 왜 내는지도 모르는 채 저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억지로 끝내느라 버거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12시를 알리는 종을 치는 신데렐라의 마음이 이렇게 초조했을까요. 29살이 끝나고 30살이 되는 종이 땡 치면 꿈같던 시간은 모두 지나가고, 저는 바꿀 수 없는 초라한 현실을 마주 할 것만 같습니다. 20대가 내 초라한 삶을 덮어 줄 만큼 환상적이었던 건지, 성인으로서 독립적으로 살아가며 희망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20대의 종말 선언을 받기 때문에 30대가 되는 것이 두려운 건지 구별되지 않습니다.
동화 속 공주님은 12시가 지나도 현실을 이겨내고 왕자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내가 그 주인공이 되니 현실은 누군가 나를 구하러 와주길 바랄만큼 로맨틱하지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나는 동화 속 주인공이 아니니까요. 30대에 뒤처지면 평생 뒤처진다든지, 20대에 경쟁력을 갖추지 않으면 30대가 힘들다거나 하는 말들이 저를 채찍질합니다.
신데렐라와 제게는 공통점과 다른 점이 하나씩 있습니다. 신데렐라도 저도 두려운 현실에서 도망쳤습니다. 신데렐라는 유리구두를 한 짝 흘렸고, 신데렐라를 잊지 못한 왕장님이 신데렐라를 찾아왔습니다. 저에게도 왕자님이 있었지만 다른 점은 제게 다른 점은 제가 직접 그 왕자님을 찾아갔다는 사실입니다. 제게 왕자님은 제가 사랑하는 ‘그림’이였습니다.
영원한 행복이 없듯이, 영원한 불행도 없습니다. 영원한 불행이 있다면 생각만 해도 억울할 겁니다. 30대를 바라보는 마음이 그랬습니다. 모두들 30대를 누군가 내린 저주처럼, 넘어야 할 아주 높은 산처럼, 현실을 되돌리는 마법처럼 그렸습니다. 대학을 막 졸업하고도 저는 당장 다가오지 않을 30대를 걱정하는 날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대부분 쓸데없는 걱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20대의 절반은 30 이후의 삶을 걱정하며 살았습니다. 앞서가는 친구들을 질투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을 따라가고 버거운 시간을 보내기를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이렇게 불행해야 하며, 이 불행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그 답은 제가 나답게 살지 않은 데 있었습니다. 내가 맞추려는 기준도, 얻으려고 애쓰는 것도 모두 제가 원하는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다닌 것보다 그림을 보러 다니는 것이 좋았고, 가치관이 맞지 않는 곳에서 하루하루 버티는 것보단 내가 원하는 가치를 전할 수 있는 일을 찾아다니는 것이 더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내가 가진 것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니 더 이상 불행한 마음도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두렵지도 않습니다.
제가 다시 입고 있던 멋진 마법 드레스를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부끄러울 게 없기 때문입니다. 원래 그게 나이고, 허름한 드레스를 입은 나를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든 이제 상관없기 때문이죠. 이렇게 생각해보니 서른에게 고맙습니다. 서른이 넘어야 할 산이 아니라 오랜 고민을 통해 마법이 풀려 내 모습으로 돌아오더라도 모두가 행복해지도록 깨닫게 해주는 마법 주문 같으니까요. [글=하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