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1월
11일(임신) 가랑비가 하루 종일 내렸다. 늦게 동헌에 나가서 업무를 보았다. [군관] 이봉수1)가 선생원2)의 돌 뜨는 곳에 가보고 와서 “벌써 큰 돌 17덩어리에 구멍을 뚫었다.”3)고 보고하였다. 서문 밖의 해자4)가 4발5)쯤 무너졌다. 심사립과 이야기하였다.
[원문] 十一日壬申 小雨終日. 晩出東軒公事. 李鳳壽徃見先生院浮石䖏 來告已鑿穴大石十七塊云. 西門外壕子四把許頹圮. 與沈士立話.
[주]
1) 이봉수(李鳳壽)는 옥포해전, 당포해전 등에 군관으로 참전하였으며 염초의 제조법을 알아내어 화약 생산량을 높이는 등의 공을 세웠다.
2) 지금의 전남 여수시 율촌면에 있었던 역원(驛院)인 성생원(成生院)이다. 역원은 주로 여행자의 숙식소로 이용되던 곳이다.
3) 16일과 17일 일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철쇄의 설치에 필요한 돌을 구할 목적으로 선생원 부근에서 채석작업을 했음을 알 수 있다.
4) 원문 ‘壕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따라서 파놓은 구덩이인 해자(垓子)를 의미한다. 이날과 2월 4일, 2월 15일, 3월 4일 일기에 나오는 해자에 대한 언급을 통해 당시의 전라좌수영에 해자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성곽은 대개 물이 없는 해자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조선시대의 해자는 대개 규식화(規式化)하여 축조되었다.18 일기의 전라좌수영 해자 관련 기록에 ‘구덩이(坑)가 무너졌다’거나 ‘새로 쌓았다’는 등의 언급이 보이는 점으로 보아 전라좌수영의 해자도 물이 없는 해자였음을 알 수 있다.
5) 원문 ‘把(발)’은 길이를 나타내는 단위로서 한 발은 양팔을 벌린 길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