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너는 내게 물으리라.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내 삶인지 아니면 네 삶인지?
내 삶이라 대답하면
너는 떠나갈 것이리
네가 내 삶인 줄 모른 채
-칼릴 지브란
One day you will ask me
which is more important
my life or yours?
I will say mine and
you will walk away
not knowing that
you are my life.
-Kahlil Gibran
사자가 글을 배워 쓸 때까진, 모든 이야기는 사냥꾼을 칭송하리라.
-아프리카 속담
Until the lion learns how to write, every story will glorify the hunter.
-African Proverb
코로나바이러스 덕(德)으로 수천 년 지속되어온 이 불문율(不文律)에 변화가 일어나 바야흐로 개명천지(開明天地) 코스미안시대가 열리고 있어라. 그 하나의 조짐(兆朕)으로 오늘 아침 (3월 3일자) 한국일보 뉴욕판 기사 하나가 눈에 확 들어왔다.
‘닥터 수스’로 불리는 유명 아동 그림책 작가 고 시어도어 수스 가이젤의 책 6권이 인종차별적 묘사로 판매 중단됐다. 닥터 수스의 가족이 세운 ‘닥터 수스 엔터프라이즈’는 2일 성명을 내고 6권에 대한 판매 중단을 발표하면서 “이 책들은 잘못되고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묘사한다.”고 밝혔다. 이 회사는 교사와 학계 등으로부터 의견을 듣고 몇 달간 논의를 한 끝에 이러한 결정을 내렸으며 전문가들과도 협의했다고 설명했다. 해당 작품은 ‘내게 동물원이 생긴다면’(If I Ran the Zoo), ‘맥앨리것의 연못’(McElligot‘s Pool) 등 6권이다.
책에는 총을 든 백인 남성이 아시아인 머리에 올라간 그림, 맨발의 흑인 남성 두 명이 풀로 만든 치마를 두른 장면 등 인종차별적인 묘사가 등장한다고 CNN 등이 전했다. 영어로 ‘법률은 (고집 센 바보란 뜻으로) 당나귀(The law is an ass)’란 표현이 있는데 상식(常識)에 반(反/叛)한 법 적용을 일컫는다. Said of the application of the law that is contrary to common sense.
이를 지적한 몇 사람의 말을 인용해 보리라. 법률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불행천만유감스럽게도 법률 때문에 해마다 피해 보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통계 숫자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무지와 히스테리, 정치적인 건초(乾草) 만들기로 인해 서적에 탑재(搭載)된 시대착오적인 법률, 반(反) 생명 법률, 편파적인 법률, 현실은 고정되고 자연은 한정적으로 정의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법률 말이다. Laws, it is said, are for protection of the people. It’s unfortunate that there are no statistics on the number of lives that are clobbered yearly as a result of laws: outmoded laws; laws that found their way onto the books as a result of ignorance, hysteria, or political haymaking; antilife laws; biased laws; laws that pretend that reality is fixed and nature is definable
-Tom Robbins, Even Cowgirls Get the Blues
카프카 소설 ‘심판’의 주인공은 자기가 무슨 죄목으로 또 왜 심판을 받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가 아는 유일한 ‘죄’는 그 언제나 그 어떤 상황에서나 모든 죄의 본질, 곧 ‘약자’라는 거다. The hero of Kafka’s novel The Trial has no clear idea what he is accused of, or why. All he knows is that he is guilty of only crime there is, the essence of all criminality at all times and in all circumstances-being on the losing side.
-Malcolm Muggeridge
법률이란 언제나 재산가(財産家)에게 유리하지만, 무산가(無産家)에겐 불리하다. Laws are always useful to persons of property and hurtful to those who have none.
-Jean-Jacques Rousseau
법정(法廷)이란 다음과 같은 사실의 한 표본이다. 크고 막연한 개념으로는 우리 사회가 자유롭고 민주적일는지 몰라도 그 내부 작동하는 작은 방들인 학고 교실과 직장 사무실과 회사 이사회 회의실과 형무소 감방과 군대 병영 막사는 그렇지 않고 한 사람의 지휘관이나 극소수 정예(精銳) 엘리트가 노골적으로 무지막지(無知莫知)하게 전권(全權)을 행사하는 비민주적인 곳이다. The courtroom is one instance of the fact that while our society may be liberal and democratic in some large and vague sense, its moving parts, its smaller chambers-its classrooms, its workplaces, its corporate boardrooms, its jails, its military barracks-are flagrantly undemocratic, dominated by one commanding person or a tiny elite of power.
-Howard Zinn
법률의 1할(10%)은 정의(正義)이지만 9할(90%)은 편의(便宜)다. Law is one part justice to nine parts expediency.
-Lucille Kallen, Introducing C.B. Greenfield
판사가 다른 한 인간을 심판할 때 칼날이 바로 자기 심장을 겨냥하고 있는 것처럼 느낄 일이다. When a judge sits in judgment over another man, he should feel as if a sword is pointed at his own heart.
-Talmud
요즘 인터넷에 김지하의 이름을 도용한 시 ‘토(吐)할 것 같다’가 팩트체크도 없이 마구 돌아다니며 가짜 뉴스를 생산하고 있다고 한다. 몇 년 전 언론인 이준희는 그의 칼럼에서 이렇게 안쓰러워했다.
“김지하가 유아독존의 초야도인 이미지라면, 황석영에게선 시류와 대중적 관심에 셈 빠른 정치꾼 느낌이 묻어난다. 그들이야말로 문학을 넘어 청년기 우리들의 삶을 키운 진정한 시대의 거목들인데 요즘 그들의 노년은 그래서 더 서글프다. 젊은 시절 그토록 가슴을 뛰게 했던 옛사랑이 나이 들어 누추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1991년 5월 나는 다음과 같은 공개서한을 고국의 하늘로 띄웠다.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의 한 사람으로 삼가 외람된 글을 올립니다. 물론 조국을 떠나 사는 주제에 무슨 소리냐 대번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해외에 나가면 누구나 좀 더 애국자가 되지 않습니까. 떨어져 봐야 그리움을 키울 수 있고 멀리서 바라볼 때 산이 제 모습이 드러나 보이지 않던가요.
우생(愚生)은 김형과 같은 서울대학교 문리대 동문으로 김형이 입학하던 해인 1959년 졸업했지요. 그 후 1970년 초 ‘思想界’ 부완혁 발행인의 요청을 받고 부완혁 선생의 표현을 그대로 쓴다면 ‘무보수 게릴라 편집장’ 일을 그 당시 몸을 담고 있든 회사 일로 일본 출장을 다녀온 후부터 보기로 했었는데 일본에 있는 동안 김형의 장편 담시(譚詩) ‘오적(五賊)’이 思想界 5월호에 실려 김형은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되었고 思想界는 폐간되고 말았지요.
또 그 후 1972년 초 직장 때문에 영국에 가 있으면서 나는 김형이 발표한 또 다른 장편 담시 ‘비어(蜚語)’로 다시 체포되어 마산 결핵 요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풍문에 들었지요. 김형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수많은 다른 사람들도 그랬었겠지만 나 역시 흥분하고 짜릿한 쾌감까지 느끼곤 했습니다. 어쩌면 김형을 통해 정신적인 자위행위를 한 것인지 모르겠군요.
이렇게 70년대 옥중에 있던 김형을 위하고 키웠다는 단체가 지난 1991년 5월 9일 김형을 제명했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나는 이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70년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로 출발, 현재 회원 5백여 명의 참여문학단체로 자랐다는 ‘민족문학작가회의’란 이름부터가 내게는 좀 이상하게 들립니다.
자고로 알찬 내용이 없을 때일수록 요란하게 형식을 찾고 거창한 간판을 내걸며 실제로 행동하는 실생활 삶 대신 말로만 글로만 때워 버리지 않던가요. 목소리가 크고 이론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실행과 실천이 없다는 반증(反證) 아닙니까.
칼릴 지브란이 그의 ‘예언자’에서 말하듯이 스스로를 거울 속에 들여다보는 떡은 돌이 되고 스스로를 자랑하는 착한 짓은 못된 짓이 되지요. 그리고 제명이다 파문이다 하는 것이 어째 중세 암흑시대를 연상케 하고 마치 북한의 김일성敎나 남한의 박정희敎에서 하던 짓거리 같군요. 내 편 아니면 죽일 원수, 나 아니면 남, 백이 아니면 흑이라는 유치무쌍한 억지놀음 말입니다.
문제는 이 세상의 모든 폭군을 몰아내기 전에 우리 각자 가슴과 머릿속에 있는 폭군부터 몰아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우리 모두 생활인으로서 삶을 사는 사람일 뿐, 시인이다 문인이다 아니면 어떤 다른 직업인으로 고답적인 레테르를 붙이고 피부에 해롭다는 배우 화장까지 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인생 자체가 무대라고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런대로 우리 모두 진지하나 매사에 너무 심각할 것도 없이 서로를 이해하고 위하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 사회에 잡초처럼 무성하고 가시덩굴 같이 뻗어 사람, 특히 어린이들을 울리고 다치게 하는 엉겅퀴 뿌리를 뽑아 버려야 하지 않을까요. 종교인, 문화인, 예술인에 대한 미신(迷信)부터 타파하자는 것이지요. 세상살이 모든 게 다 예술이고, 모든 게 다 배움인데, 예술마당의 모래사장 모래알 하나, 배움의 바다 물방울 하나 갖고 예술인이다 학자다 할 수 있을까요.
새장에 갇힌 새는 새가 아니듯 종교라는 새장에 갇힌 신(神)은 신이라 할 수 없지요. 종교인이나 성직자들이 편파적으로 편애하는 신을 믿고 눈 감듯 따라가기보다 우주만물의 우리 모두 하나됨을 우리 각자 스스로 깨달아 믿고 섬기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늘과 땅에 있는 우리 모두의 하나님을 찾아 나선 인생순례에 너와 내가 따로 있을 수 없지요. 삶과 죽음이란 네 삶과 죽음이 내 삶과 죽음이고 우리 모두의 삶과 죽음이지요.
예수의 말마따나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고자 하는 자는 얻을 것이며, 어차어피(於此於彼)에 조만간 다 숨져 사라질 덧없는 목숨끼리 더 좀 선의(善意)와 호의(好意)로 서로를 대하면서 한없이 슬프고 애달프도록 아름다운 삶과 사랑을 잠시나마 우리 서로 나누어 보자는 뜻에서입니다.
문인도학자도 아닌 한 사람의 독자 입장에서 망언다사(妄言多謝)입니다.
1991년 5월 15일
미국 뉴저지에서
이태상 드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