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프로젝트] 책의 죽음

강지영


살펴 가십시오.

책더미를 마주하고 있다. 손바닥 크기의 공간을 허락받지 못해 죽음에 이르게 된 종이책에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지. 목장갑을 끼고 기계적으로 종이 뭉치를 찢는 중년여성과 파쇄차에 서책을 구겨 넣는 나이 지긋한 아저씨와 도서관 밖으로 책을 나르는 청년들. 그 가운데 서서 서적의 종말을 지켜본다. 손에 든 이 책까지 내놓으라 할 새라 반납하러 온 도서를 가슴에 꼭 끌어안는다.


날개가 꺾이고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기고. 총도 없고 칼도 없고 폭격 소리도 나지 않는, 조용하기 그지없는 매장지에서 피 냄새를 맡는다. 문자의 죽음을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명이 울린 것도 아닌데, 살려달라는 손짓을 본 것도 아닌데, 생을 다해가는 자와 눈을 마주친 것도 아닌데 전장의 최전선에 서 있는 듯 몸이 굳어온다. 이 결별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라고, 무용함을 선고받은 재생용지에서 왜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지.


집단매장지가 된 책 섬을 둘러 천천히 걷는다. 책자는 의도적으로 설치한 듯한 예술작품이 되어 도서관 앞마당을 차지하고 있다. 애상한 눈길로 죽어가는 서책을 넘어다본다. 누군가의 청춘이 빼곡히 담겼을 논문과 신인 소설가의 열망이 묻어나는 소설과 노교수의 노련함이 깃든 인문학서와 수집가의 노고가 서린 외국 서적. 끝이 가져오는 경건함 때문인지 서책의 무용함을 마주한 충격 때문인지 책에 서린 사연이 구구절절 가슴을 파고든다.


이 서권(書卷)의 자리를 마련해준다 해서 전부 주인을 찾아가는 것도 아닐 텐데 어째서 안타까움을 지우지 못하는 것인지. 모든 문적(文籍)이 같은 크기의 노력을 담고 있지는 않을 터. 지면 위 문자에서 빠져나온 제각각의 영혼을 마주하고 있는 듯 눈앞이 아련해진다. 돌아서는 일이 저자를 죽이는 것 같아서, 살해 공범이 되는 일 같아서, 그 죽음이 나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아서 발길을 돌리지 못한다.

무표정한 얼굴과 싹둑거리는 소리, 반복적인 몸짓이 전부인 현장이 왜 이토록 처참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수백 권의 서질(書帙)이 세상에 작별을 고하고 있다. 서책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폐기로 분류되어 주어진 수명을 다하지도 못한 채 파쇄기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싹둑싹둑. 껍질이 잘려나가고 몸이 두 동강 나고 문자가 재가 되어 흩날리는 이곳에서 종말이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종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귀를 가른다. 지금 나는 전장에 있다. 인쇄 매체가 폐기되고 허공의 글자가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세기의 전환점 가운데 있다. 일찍이 데리다는 책의 죽음을 언급했고,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했으며, 바디우는 철학에 이별을 고했다. 책을 든 사람이 줄고 휴대전화가 일상을 점령하고 영상과 모니터가 종이책을 먹어치우는 시대. 진정 서책이 설 자리는 없는 것일까.

조문객 없는 장례식장의 유일한 문상객이 되어 연기(煙氣)로 사라지는 문자를 본다. 황량한 폐허에서 구시대 유물로 낙인되어 가는 책을 응시한다. 바래고 갈라지고 찢긴 것이 책만은 아닐 터. 서책에 깃든 영혼을 마주하며 질문을 던져본다. 저자들은 알고 있을까 공들여 남긴 그들의 시간이, 노고가 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을, 책의 시대를 살아온 그들의 손에 지금 이 순간 들려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살펴 가라는 한 마디로 헌화를 마치고 돌아온 밤, 책 나눔 행사에서 가져온 저작을 한군데 모은다. 영화, 철학, 소설, 신화학, 법학. 장르를 하나로 아우를 수 없는 종이책들이 책장 한 칸을 채워낸다. 빼곡함에 안도의 한숨이 인다. 누군가를 죽음으로부터 구해 오기라도 한 듯, 나도 모르게 다행이라는 말을 반복한다.

기호가 나열되고 읽히는 공간의 변화, 인류는 종이라는 지면을 잃어가고 있다. 매체가 변하면서 문자는 장식이 되었고 책은 장신구로 전락했으며 작가는 타이피스트가 되었다. 인간은 문자를 숙명으로 부여받았다. 하얀 종이는 늘어가고 연필은 짧아지지 않고 지우개는 굳어간다. 활자화된 문자의 죽음, 그것은 사고하는 인간의 상실이다. 펜을 쥔 손은 점점 말라가는데 종이책을 잃은 가슴이 젖어오는 이유는 무엇인지.

 

책 한 권을 편다.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어느 때 보다 무겁게 들리는 밤이다. [글=강지영]

이정민 기자
작성 2021.03.18 11:56 수정 2021.03.18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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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