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수많은 고정된 형태 속에서 살고 있다. 이 형태들을 벗어나는 일이란 여간 두려운 것이 아니다. 나 또한 지금까지 형태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어지간히 발버둥 치며 살아왔다. 누구나 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형태를 벗어났구나! 라고 생각하면 두려움과 자기연민의 감정을 느낄 것이다. 두려움과 자기연민의 감정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나라는 존재는 세상 불쌍한 인간이 되고 만다. 우리를 순식간에 불쌍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형태라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녀석이다. 이 무서운 녀석 중, 단연 최고의 공포를 선사하는 것이 가족의 형태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가장 기본적인 가족의 형태는 아빠, 엄마, 자식일 것이다. 만약 이 형태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순식간에 동정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편부, 편모 가족이라 칭하고 새로운 형태 속으로 집어넣는다. 그들을 돕기 위한 것이라는 이름으로 옆줄로 밀어버리는 것이다. 아이들은 새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혹여나 기본적인 가족의 형태를 벗어 난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확인받는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값싼 동정과 함께 제공해 주는 것은 두려움과 자기연민의 감정이다. 이 두려움과 자기연민의 감정은 불행히도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아이들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삶 전체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 그림자를 더욱 강력하게 만드는 것이 유감스럽게도 미디어다. 드라마에 나오는 가족의 형태는 비수가 되어 아이들의 가슴에 상처를 낸다. 양친이 있는 가정이 가장 일반적인 모습인 양 그려진다. 반면, 편부, 편모 가정 혹은 조부모와 사는 가정 등은 마치 행복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무엇인가 결핍된 것처럼 그려진다.
부모가 버젓이 있다는 것이 행복한 가족의 조건이 될 수 있을까? 내가 지금까지 겪어온 바로는 절대 그렇지 않다. 멀쩡히 부모가 있는 집이라 할지라도 뚜껑을 열면 끓고 있다. 단지 찌개의 종류가 다를 뿐이지. 인생이라는 굴곡진 여정 가운데 오욕칠정(五慾七情)을 제어하고 무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가족이란 이 험난한 여행의 최고의 협력자가 되기도 하지만 최악의 방해꾼이 되기도 한다. 이들과 투덕거림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하고 느끼기도 한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기에 분명 가족은 중요한 존재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나는 가족의 구성원이 꼭 피를 나눈 엄마와 아빠 그리고 형제자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편부, 편모, 조부모, 위탁 부모, 보육원의 친구들과 선생님 모두가 훌륭한 가족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가족이 그렇지 아니한가! 가족 구성원을 입맛대로 고를 수는 없다. 그렇기에 가족 안에는 기쁨, 슬픔, 화목, 불화, 이 모든 것이 있다. 설사 입맛대로 골랐다고 할지라도 아름답기만 한 가족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어릴 때 엄마가 돌아가셔서 애정 결핍이 심하고 열등감을 가지고 있어요. 아빠는 저를 정성으로 돌봐주셨지만, 엄마가 너무 그리워서 매일 울 곤 했어요.’라는 고백을 들어 본 적이 있다. 저 애정 결핍과 열등감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아마도 일반적인 사회의 관념이 한몫을 톡톡히 했다고 생각한다. 가족의 다양성은 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일까? 어떤 형태가 더 행복하고 더 불행한지는 도대체 누가 정한 걸까? 모든 형태가 존중받고 그 속에서 느끼게 될 다양한 경험을 모두 존중해 줄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는 아주 큰 착각 속에서 살고 있다. 부모가 없는 아이는 불행할 것이라는 착각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그런 편견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다고 자부하지는 말자. 지금 바로 당신의 눈앞에 어린아이가 나타나 ‘저는 아빠가 없어요.’라고 이야기한다면 몇 초 만에 당신의 눈썹은 요동을 칠 것이고 눈동자는 갈 곳을 잃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당신의 뇌는 적당한 위로의 말을 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일 것이다. 부모가 없는 아이는 불쌍하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자칫 잘못하면 그 아이를 동정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나는 불쌍하구나!’라는 인식을 심어줄 것이다.
어느 사람도 부모가 있어서 행복하고 부모가 없어서 불행하다고 정의를 내릴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나? 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전자와 후자를 10년간 추적 조사하고 통계를 내어 누가 더 행복하고 성공한 삶을 살았는지 따져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가지지 않아도 되는 결핍감과 열등감을 어린아이들에게 심어주지는 말자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해법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 또한 미디어다. 미디어는 편견을 조장하기도 하지만 순식간에 편견을 깨부수어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에 조금 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등장시키자. 그리고 그들은 약자도 불쌍한 이들도 아니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자. 할머니랑 사는 사람도 있고 아빠가 아랍인인 사람도 있다. 모두 우리 사회의 흔하디흔한 가족의 모습이다.
정형화된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부수고 다양한 형태를 기둥으로 삼아 다시 이야기를 세워보는 것은 어떨까? 적어도 아이들에게‘너의 줄은 여기가 아니니까 옆줄에 서 줄래?’라고 말하지는 말자. ‘줄 같은 건 없어! 그냥 네가 서고 싶은 곳에 자유롭게 서봐!’라고 말해주자. 다시 이야기하지만, 사실을 논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어차피 지극히 주관적인 영역인 행복을 수치나 통계로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의 편견이 어떤 이들에게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김경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