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종] 임나는 일본 큐슈에 있었다

임나의 지명(1)

이사부가 초략한 임나4촌

금관, 배벌, 안다, 위타 4촌 대부분이 큐슈에 소재

■ 529년 이사부가 초략한 임나 4촌 (1/2)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 『일본서기』 계체기 23년(529년)에는 신라 이질부례(=이사부)가 임나 4촌을 초략(抄掠)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책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다. 『일본서기』에만 실려 있는 내용이다.

미리 말해 두지만, 임나(任那)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는 잘못된 고정관념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임나(任那)는 큐슈 지역을 일컫는 말이었고, 이사부는 이미 512년에 우산국(=울릉도)를 정벌했을 만큼 바다를 누비고 다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보아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서기』계체기 23년의 기록을 발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자 신라는 이번에는 상신(上臣) 이질부례지간기(伊叱夫禮智干岐)를 파견했는데, 무리 3천명을 이끌고 칙명을 듣기 위해 왔다. 모야신은 멀리 무장을 한 수천 명을 보고는 웅천으로부터 임나의 기질기리성으로 들어갔다. 이질부례는 다다라원(多多羅原)에 머물면서 귀복하지 않고 석 달을 기다리면서 계속 칙명 듣기를 청했다. (*그러나 모야신은 칙명을 알려주지 않고 신라 병사들을 모욕하기까지 한다.) 그러자 상신은 ‘금관, 배벌, 안다, 위타’의 4개 마을을 초략하여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다른 책에서는 4개 마을을 ‘다다라, 수나라, 화다, 비지’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다다라 등 네 촌이 공격을 받은 것은 모야신의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이질부례는 이사부를 말한다. 그리고 계체 23년은 서기 529년으로, 금관가야가 신라에 항복하기 전이다. 이런 침탈을 당하고 3년 후인 532년에 금관국은 신라에 항복하게 된다. 인용문에 보다시피 이사부가 노략질하여 뺏어간 4촌이 ‘금관, 배벌, 안다, 위타’의 4개 촌이라는 말도 있고, ‘다다라, 수나라, 화다, 비지’의 4개 촌이라는 말도 있다고 되어 있다. 먼저 ‘금관, 배벌, 안다, 위타’라는 4개의 지명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금관(金官)
금관(金官)은 금관가야가 있었던 지금의 경남 김해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고 그에 대해 별다른 이견이 없으므로 설명을 생략한다.

▶배벌(背伐)
배벌(背伐)의 背는 ‘등 배’자다. 伐은 벌판을 뜻하는 [벌]을 음차한 표기이다. 『삼국사기』에 실려있는 ‘달구벌(達句伐), 비사벌(比斯伐), 음즙벌(音汁伐)’에 쓰인 伐과 같다. 그리고 한자 背는 ‘등 배’자이다. 우리말로 [등]이라 일컫는 말을 적기 위해 背를 빌려서 적은 것이다. 훈차한 표기인데, 진의훈차(眞義訓借)가 아닌 사음훈차(似音訓借)다. 그러니까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일컬었던 지명은 [등벌]이었는데, 그것을 背와 伐이란 한자로 차자하여 적은 것이다.

앞에서 말한 ‘달구벌, 비사벌, 음즙벌’은 ‘達句火(달구화), 比自火(비자화), 音汁火음즙화)’라고도 적었다. 이들 지명에 쓰인 火는 한자의 음을 빌린 것이 아니다. ‘불 화(火)’자의 뜻을 빌려쓴 훈차다. 물론 이 역시 진의훈차가 아니고 사음훈차다.

동일한 지명 [달구벌]을 “達句伐(달구벌)”이라고도 적고 “達句火(달구화)”라고도 적었던 것이다. 경남 창녕의 고명도 [비사벌]도 마찬가지다. “比斯伐(비사벌)”이라고도 적고 “比自火(비자화)”라고도 적었다. 


[등벌/dung-bur]이라 일컫는 지명 역시 그러하다. “背伐(배벌)”이라고도 적고 “同火(동화)”라고도 적었다. 그곳을 가리켜 [동불]이라 하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그 [동불]을 “同火(동화)”라고 적은 것이다. 


[등불]을 또 다르게는 “脊振(척진)”이라 쓸 수도 있다. 脊이 ‘등 척’자이고, 振(떨칠 진)을 가라어로 [부르]라고 했기 때문이다. [부르]는 [불]을 연진발음한 것이고, 일본어 ‘후루(ふる)’는 같은 어원에서 비롯된 말이다.

본래 脊振은 [등부르]라 일컫는 지명을 적었던 것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후대인들이 잘 알지 못하게 되었고, 오늘날의 일본인들은 그곳을 “세츠부리”라고 부른다. 후쿠오카 남쪽에 세부리산(脊振山)이 있는데, 배벌(背伐)은 바로 그 세부리산 부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배벌



▶안다(安多)
한국어와 일본어의 가장 큰 차이를 얘기한다면, 한국어는 응집(凝集)발음의 경향이 강한 편이고 일본어는 연진(延陳)발음의 특징이 강한 편이라 할 수 있다. 응집발음 연진발음이란 용어가 생소하겠지만, 별것 아니다. 아주 쉽다.

예를 두어 개만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일찌기]→[일찍] (연진→응집)
[가지다]→[갖다] (연진→응집)
[디디다]→[딛다] (연진→응집)

이들은 응집이냐 연진이냐 하는 발음의 차이만 있을 뿐, 똑같은 말이다. 만약 일본어로 [아나타]라고 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을 한국어로는 [안타]라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단 이 점을 염두에 두시기 바란다. 


[야마토/야마타] [울란바토르/울란바타르]에서 보듯 땅을 가리키는 말 [토/타]는 서로 쉽게 넘나들었고 혼용이 되었다. [아나토/아나타] 역시 혼용이 되었다. [아나토]를 [아나타]라고도 했다는 말이다. [아나토]를 일본어에서는 穴門(혈문)이나 穴戶(혈호)라고 적었다. 일본어 ‘아나(あな)’는 穴이고, ‘토(と)’는 門이나 戶이다. “아나토”는 후에 이름이 “나가토(長門)”로 바뀌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안라(安羅)를 ‘안라의 땅’이란 뜻에서 [안라타/안라토]라고도 했다. [아나타]의 응집발음 [안다]를 음차하여 적은 것이 “安多”이다. 그리고 [아나토]를 穴門 혹은 穴戶라고 적었다. 현 “나가토(長門)”의 고명이 바로 “아나토(穴門, 穴戶)”였다. 529년에 이사부가 초략했다는 4촌 중의 하나인 안다(安多)는 바로 나가토(長門)를 가리킨다는 말이다.
 

안다


▶위타(委陁)
[위타]를 연진발음하면 [우이타]가 된다. [우이타/오이타]는 넘나든다. “오이타”란 지명이 큐슈의 동쪽 끝에 있다. 위타(委陁)는 바로 이 “오이타(大分)”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오이타(大分)에는 예전에 碩田國(석전국)이라는 고대국가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서기』경행기 12년 기록에 ‘碩田은 오호키타(於保岐陀)라 읽는다.’고 부연설명을 해 놓았다. 그리고 오이타현의 홈페이지에는 ‘分(분)은 段(단)과 같은 말이고, 段은 [키타(kita)]라 읽었다’고 설명해 놓았다. 그래서 大分을 “오오키타→오오이타”라 한다는 것이다. 본래는 [타+키타]라는 지명을 大段 혹은 大分이라 썼던 것인데, 후대인들이 음차자였던 大를 엉뚱하게 훈독하여 [오오키타]라고 잘못 읽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본래는 [타키탄]이라는 국명을 “啄己呑(탁기탄)”이라고 음차하여 적기도 하고 “大段(대단)”이나 “大分(대분)”이라 적기도 했는데, 그것을 훈독하여 “오호키타(오이타)”라고 잘못 읽게 되면서부터 ‘碩田(석전)’이나 ‘委陁(위타)’와 같은 식의 표기도 나타나게 되었을 것이다.


위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 중에는 지명이나 언어학적인 연구를 무조건 유사역사학으로 폄하하고 무시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런 자들이 맹종하는 견해도 기실은 엉터리 지명 비정을 근간으로 한 것이다. 임나의 지명들을 모두 한반도 남부에 억지 비정한 견해를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이사부가 큐슈를 정벌했다는 말이 허무맹랑하게만 느껴지는가? 왜(倭)가 바다를 쉽게 건너다녔다면 신라도 쉽게 건너다녔을 것이다. 왜(倭)가 신라를 자주 침략했을 거란 생각은 하면서, 거꾸로 신라가 왜(倭)를 침공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왜 못하는가?



최규성 작가



편집부 기자
작성 2018.11.01 14:54 수정 2018.11.11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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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