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의 대중가요로 보는 근현대사] 서울의 찬가

내 품에 돌아오라 그대여 아름다운 서울로

길옥윤 작사/ 길옥윤 작곡 / 패티김 노래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에 선율과 리듬을 얹으면 감성 공간이 채워진다. 이것은 삶의 보이지 않는 면면을 대변하고 비우고 채우는 감흥 산책(散策)의 과정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노래의 마력(魔力)이다. 마력은 매력(魅力)을 능가하는 힘이 있다. 음악의 상징적 활용은 한비자(BC 280~233)나 여불위(BC?~235) 이후 현대까지 이어져 온다. 그래서 장려곡이 설창(說唱)되고 금지곡이 매몰(埋沒)되는 것. 감동적인 노래 한 소절은 전사(warrior)들을 전쟁터에서 사지(死地)로 뛰어들게도 하지만, 율사(律士)들의 논리적인 설득에 목숨을 거는 경우는 드물지 않는가. 오늘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서울노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패티김이 부른 <서울에 찬가>에 얽히 스토리를 필설한다.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 그리워라 내 사랑아/ 내 곁을 떠나지마오/ 처음 만나서 사랑을 맺은/ 정다운 거리 마음의 거리/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으렵니다// 봄이 또 오고 여름이 가고/ 낙엽은 지고 눈보라 쳐도/ 변함없는 내 사랑아/ 내 곁은 떠나지마오/ 헤어져 멀리 있다 하여도/ 내 품에 돌아오라 그대여/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으렵니다.(가사 전문)


https://youtu.be/EHEjZCeaG5I 

 

<서울의 찬가>는 제14대 서울시장을 지낸 김현옥(1926~1997)이 길옥윤에게 특별히 부탁을 해서 만든 노래다. 그는 불도저(Bulldozer)시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일종의 대중적 상징조작을 위한 노래인데, 대중문화예술 중 문학·대중가요 등이 이런 경향을 많이 지닌다. 이 노래는 1966년 동아방송에서 녹음으로 먼저 발표되었고, 1969년 음반으로 발매된다. 그 시절 서울은 노래처럼 화사한 도시가 아닌 회색빛 암울한 거리였다. 이 도시에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이 노래는 한강의 기적에 감성에너지를 발흥시킨 휘발유 같은 노래라고 해도 좋으리라.

 

이 노래가 만들어진 1966년은 길옥윤과 패티김이 결혼을 한 초기다. 1965년 길옥윤은 일본에서, 패티김은 미국에서 귀국하여 이듬해 결혼에 골인했다. 노랫말은 희망의 감흥을 엮었고, 멜로디는 행진곡 같다. 빠른 템포·경쾌한 리듬의 전주로 시작하는 악곡이 허술하고 눅눅하던 서울의 겉모습보다 감흥을 앞질렀다. 패티김의 시원한 가창은 노래를 듣거나 같이 부르는 이들의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서울의 거리를 예찬(禮讚)하는 정경묘사에 1절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지 말라는 염원을, 2절은 헤어져 있는 사람이 돌아오라는 염원을 담은 뒤, 아름다운 서울에서 같이 살기를 청유한다. 서울을 사랑하는 남녀의 사랑이 맺어진 장소로 묘사하고 있다. 2021년 서울의 봄은 어떠한가.

 

당시 김현옥 시장은 길옥윤에게 노래를 청하면서 서울시에서 전폭적으로 후원할 테니 서울에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직접 부탁했단다. 그는 진주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72세로 타계했다. 그는 국방경비대 창설 후 육군사관학교 전신 국방경비사관학교 졸업 후, 국방경비대에서 복무를 시작하여 1962년 육군 준장으로 전역을 한다. 이력도 화려하다. 13대 부산시장, 14대 서울특별시장, 내무부장관을 지냈다. 박정희에 의해 발탁되어 그 시절 서울 모습을 변화시키는 추진력을 발휘했다.

 

그의 부산시장 직위는 5.16 군사정변 후 현역군인 신분이었고, 전역 이후에도 부산시장과 서울시장을 역임하다가 와우아파트 붕괴사고(1970.4.8. 서울시 마포구 창전동 산 1번지, 와우지구 시민아파트 5층이 부실공사로 무너진 사건. 사망 33, 부상 38)로 사퇴를 한다. 이후 제8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지만 고배를 마시고, 1971년 내무부장관으로 정계에 복귀하여 1973년까지 역임한다. 1980년에는 부정축재자로 몰려 조사받기도 했다. 1981년에는 고향(양산)으로 낙향하여 중학교 교장(사립)을 지냈다. 그는 여의도 개발·강변북로 건설·국내 최초의 고가도로인 아현고가도로와 서울역고가도로를 건설한 장본인이다. 남산 1·2호 터널, 삼청터널, 사직터널도 개설, 청계고가도로도 건설하였다.

 

<서울의 찬가>를 작사 작곡한 길옥윤은 당시 40세 본명 최치정, 1927년 영변에서 출생하였으며, 작곡가와 색소폰연주자로서 대중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음악의 거장(巨匠)이다. 그는 식민시대와 해방정국,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서양대중음악이 무차별적으로 밀려들어 올 때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우리 정서를 가진 음악으로 발전시킨 대중음악가로서 국민들에게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그는 경성치과전문학교(서울대 치과대)를 졸업한 후 재즈에 심취해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음악클럽을 전전하다가 8.15해방 직후 박춘석·노명석과 그룹 핫팝을 만들어 미군부대에서 색소폰을 연주했다. 1962년에는 데뷔곡 <내 사랑아>를 현인이 불러 히트시켰는데, 그해 가수 패티김을 만나면서 음악인생의 전기를 맞았다. <4월이 가면>, <사랑하는 마리아>, <서울의 찬가> 등 그가 작곡한 수많은 곡을 패티김이 불렀고, 패티김과 결혼함으로써 그들의 로맨스도 유명세를 탔다. 19666개월여의 동남아시아 신혼여행 중에 베트남 전쟁터 위문공연을 자의적으로 시행한 인연으로 맺은 채명신 장군(1926~2013. 곡산출생)과의 인연도 가요계에 남긴 미담이다. 이후 길옥윤은 마셜제도(1986년 미국으로부터 독립) 애국가와 <부산찬가>를 작곡하였으나 1994년 폐암 선고를 받고 삶의 끝자락을 맡는다. 그는 그해 6월 일본에서 귀국하였고, SBS서울방송이 마련한 이별의 콘서트에서 <사랑은 영원히>를 휠체어에 앉은 채 발표했다. 이후 척추암까지 겹쳤으나 음악에 대한 남다른 열정으로 쉬지 않고 작곡을 하다가 그해 10월 영구 귀국하여 여생을 한국에서 보다가 1995년 향년 68세로 작고하였다.

 

<서울의 찬가>를 열창한 패티김은 1938년생 본명 김혜자다. 그녀는 중앙여고를 졸업하고, 21세이던 1958<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부른 가수 이해연의 남편 베니 김(본명 김영순)의 추천으로 린다김이란 예명으로 미8군 무대에서 노래를 시작하였으며, 1959년 미국 가수 패티 패이지의 이름 본따, 패티김으로 예명을 바꾸고 본격 가수 활동을 한다. 그녀는 1962년 우리나라 최초로 리사이틀 공연을 하였고, 1971년 디너쇼도 시도한다. 이후 일본·동남아·미국 등 서구로 진출하며, 미국 카네기홀과 호주 오페라하우스 공연을 하는 등 원조 한류이다. 1978년에는 대중가수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패티김 리사이틀, 서울의 연가>를 공연했으며, 1989년에는 한국인 가수로는 처음으로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공연하였다. 그녀는 2012년 생년 74, 가수 생활 54년을 결산하는 <이별>을 전국 16개 지역에 순회공연 한 후 2013년 가수생활을 마감했다. 패티김은 남편 길옥윤(1927~1995)과의 사이에 정아, 이태리계 남편(아바라도 게디니, 1976년 재혼)과의 사이에 카밀라 게디니가 있으며, 그녀의 대표곡 <이별>은 북한 김정일의 애창곡이라는 풍문이 있다.

 

1995<서울의 찬가> 노래비가 세종문화회관 옆 세종로공원에 건립되었다. 2.2m 높이 1.8m 노래비는 대리석으로 만든 피아노 모양의 좌대 위에 <서울의 찬가> 가사와 악보를 새겨놓고, 그 위에 청동으로 만든 서울시의 시조(市鳥) 까치가 날아와 앉은 형태이다. 제막식행사에는 황문평 노래비건립추진위원장, 김의재 서울시부시장, 노래비 조각가 황현수와 신영균 예총회장 등이 참석했다. <서울의 찬가>를 부른 가수 패티김, 작사 작곡자인 고 길옥윤의 미망인 전연란, 딸 최안리, 동생 최치갑씨 등이 참석했다. 우리나라 전국에 산재한 노래비는 660여 개라고 한다. 필자도 이 중에 많은 곳을 직접 답사하여 노래와 근현대사를 버무려 흥얼거리곤 했었다. 그때마다 소회는 허전한 마음이라고 함이 솔직한 심사다. 어찌해야 할까. 녹물에 찌든 동판과 노랫말을 새긴 혼곤한 대리석, 일그러진 조각과 입상(立像)이 품고 있는 지난날 풍진 세월을. 혹시라도 노래를 기리기 위한 건립이 아닌, 건립을 위한 건립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유행가에 얽힌 시대와 사연을 역사화하여 스토리텔링 하는 일에 더욱 찐한 애착을 갖는 필자의 천착가치(穿鑿價値)는 무엇일까를 숙고한다. 13월에 피는 시민들의 삶에 꽃이 만개할 서울에 봄은 언제 오시려나.


 

[유차영]

시인, 수필가

문화예술교육사

한국유행가연구원 원장


전명희 기자
작성 2021.05.01 12:22 수정 2021.05.01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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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